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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에는 『환단고기桓檀古記』 역주본 해제 ‘1.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파트의 여섯 번째 ‘환단고기 진위 논쟁’ 부분을 다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 중국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
먼저 ‘중국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 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대표적 왜곡 사례는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본기本紀」에서의 ‘금살치우擒殺蚩尤’, 그리고 「세가世家」 편에서의 ‘기자조선箕子朝鮮’, 그리고 「열전列傳」에서의 ‘위만조선衛滿朝鮮’인데, 이것의 폐해가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사마천 『사기史記』에 보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문장 자체로 보았을 때도 결국 ‘조선의 왕으로 봉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 기자가 조선에 뭔가 등극하지 못했구나. 전혀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대주의에서 비롯한 역사 왜곡과 심화그런데 이러한 거짓 정보, 거짓 문헌과 기록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이제 국내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사대주의에 의한 역사 왜곡과 심화입니다.
윤내현 교수도 “우리 고대사가 잘못 시작된 것은 고려 중기 숙종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숙종 때면 1095년에서 1105년 사이인데, 이 숙종 시절인 1102년 예부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箕子로부터 비롯하였는데도 사전에 등재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려사』 권63 지 권제17 예5)
이런 연유로 결국에는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짓게 됩니다. 나중에 조선의 세종 때는 평양에 단군 사당도 짓습니다. 이 세종 시절을 전후해서 조선 초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동방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모두 1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태종실록 권10)라고 했고, “전조선의 왕은 단군이고 후조선의 왕은 기자다.”(세조실록 권3)라고 했습니다.
흔히 조선의 사대주의는 ‘명明사대주의’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또 하나는 ‘존주사대尊周事大’라고 합니다. ‘주나라를 존중하는 사대다.’라고 하는 것인데, 이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라고 하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이 조선이 문명화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군 천 년, 기자 천 년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조선 시대에는 역사 말살책을 씁니다.
‘고대 사서 수서령收書令’, 또는 ‘수거령收去令’이라고 하는데요. 세조⋅예종⋅성종 50년에 걸쳐서 우리의 단군조선, 그리고 그 이전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사서들을 수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단고기』 속에 들어 있는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와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대변설大辯說」 등이 전부 다 수거령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책을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세조⋅예종⋅성종 50년을 거치면서 우리 역사가 파괴되고, 결국은 성종 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국정 교과서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동국통감』을 통해서 기자 중심의 역사책을 편찬한 것입니다. 사서 중 ‘동국’이라고 쓰여 있는 모든 책에는 기자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즉 태종 때의 역사관을 담은 권근의 『동국사략東國史略』, 세조 때부터 명을 받아서 성종 때 완성한, 서거정 중심의 『동국통감』이 그런 유형의 책입니다. 기자 중심의 역사책이 편찬되어 완성되는 과정에서 수서령을 거침으로써 우리의 온전하고 올바른 역사를 드러내는 책들이 금서화되고 숨겨지고, 불태워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닉자처참
匿者處斬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조선왕조 예종실록 1년)
그러면서 결국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 그리고 기자조선의 끝에 준왕凖王이 있고, 그 준왕을 물리치고 찬탈한 위만의 위만조선衛滿朝鮮, 그리고 거기에서 한사군漢四郡에 이르게 되는 역사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게 만들어진 기자조선의 폐해라는 겁니다.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자조선의 끝에 준왕이 있고, 이를 찬탈한 위만과 그의 손자 우거, 이를 정벌한 한 무제와 한사군이 있는 이 역사를 완성하게 된다. 가짜 역사를 완성하였다는 겁니다. 결국에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서 시작되어 고려 중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대주의의 역사 왜곡이 있었다는 겁니다.
2. 일본의 역사 왜곡, 식민사관
이걸 받아서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이 역사 왜곡을 완성하게 됩니다. 지금이 2022년인데, 일본의 기원이 2682년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후진국으로 역사도 2천 년밖에 안 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런 인식과 주장을 맞게끔 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 합니다. 일본의 역사보다 훨씬 줄어든 조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왕검을 신화로 여기고, 그리고 기자조선도 없애 버리고……. 뭐 가짜 역사니까 없애 버리면 좋지만 그것을 불순한 의도로 없애 버렸다는 겁니다. 그 결과 위만조선과 한사군만 남겨 놓은 그런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1920년 조선총독부의 국사교육지침을 보면, ‘옛날에 반도의 북부는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라고 해서 여기를 옛조선, 고조선이라고 하고 ‘남부는 진辰이다.’라며 이렇게 바꿔 놨습니다.
이것이 지금 100년 지났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모든 역사 교과서를 보면, ‘한반도 남쪽은 단군조선이 아니다.’는 100년 전 일제 시대의 지침에 충실하게 현재 고조선 지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 북부에 고조선이 있었는데 거기를 한 무제가 침탈해서 한사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것이 420년 동안 유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420년이 끝나는 시점을 313년으로 설정해 놨습니다. 이후 ‘320년에 삼한을 정벌했다.’라는 설을 가지고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등장하게 되고, 거기엔 무리수가 있으니까 나중에는 369년으로 바꿔 버립니다.
결국 처음에 얘기한 것은 뭐냐 하면 ‘313년에 한사군이 멸망당하고 7년 후인 320년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정벌했다.’라고 하면서 그 주장이 먼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420년에 200년을 더해 약 600년간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동그라미를 친 것은 일본이 얘기하는 한사군의 범위입니다. 일본은 한강을 포함한 곳을 한사군이라고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러한 지도를 일본의 교과서에 그리고 있고, 전 세계에서 그것을 받아서 쓰는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 말살책조선 시대의 역사 말살책은 고대 사서의 ‘수서령收書令’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도 그들(일본)에 의해 자행된 역사 말살책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고대 사서들을 수거한 ‘수거령’입니다. 물론 수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전국에서 고대 사서를 20여만 권을 압수해서 불태웠다. 남산에서 또는 경복궁에서 불태웠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의 증언을 보면 “한국의 역사는 절대 엄금이다.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한국의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분이 영어로 쓴 것을 우리 임시정부의 번역가분들이 번역을 했는데, 영어 원본엔 이렇게 나옵니다.
one of the first of these reforms was to go through all the public archives and private libraries and systematically #collect and burn#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나다니엘 페퍼)
Collect and burn! 모아서 전부 불태웠다는 겁니다. 이렇게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에 관한 작품들, 문학, 역사들을 다 모아서 불태웠다는 분명한 증언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마도 한 곳만 보더라도 고문서류가 6만 6천 매 이상, 고기록류 3,576책 등이 수거되어 불태워졌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일본 학자 하라타 사카에루 ‘역사와 현재’, 1981.04.25.)
일본 레이타쿠麗澤대 교수를 역임했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조선총독부를 은퇴하고 일본으로 올 때 조선 왕실의 기증이라면서 규장각 사서를 몇 수레나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 전역에 5만여 권의 한국 고대 사서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거의 3천 종 5만여 권이 된다는 겁니다.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그 정도이니 더 많은 곳을 조사하면 더 많은 책들이 나오겠죠.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이 책들은 목록이 전부 다 공개된 것이 아니다.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에 한국 도서가 얼마나 있는지 진짜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숨겨 놓은 도서 목록이 따로 있다는 것이 어떤 재판 결과에서 밝혀졌다.”(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2024.07.30. 조선일보 기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51종에 20만 권 사서를 압수했다는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고, 사실은 51종이 아니라 거기에 숨겨진 목록이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조선사편수회의 역사 조작
일본은 수거령을 내려서 수십만 권의 책들을 수거하고 난 다음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그리고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생기면서 약 16년간에 걸쳐 일제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 일본어로 만든 35권, 2만 4천 쪽 분량, 거기에 부록 두 권까지 해서 조선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조작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학이 해방 이후에 한국 사회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요 조선학회의 대표격인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1950년대에 연세대에서 만든 ‘동방학지’ 제1집을 읽고 한국 사학계를 평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동방학 연구는 자기들이 깔아 놓은 레일 위를 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일제 시기의 조선 연구와 금후에 한국에서의 조선 연구 사이에 단층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서로 어긋나는 게 없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 완벽히 계승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김용섭 교수,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중)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을 가는 학자들, 신석호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 위를 가는 학자들은 이병도李丙燾와 이기백李基白, 노태돈盧泰敦, 송호정宋鎬晸, 그리고 지금의 젊은 사학도들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병도의 경우 조선사편수회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분명하게 나와 있죠. ‘이병도는 실제적인 친일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1943년 매일신보에 쓴 글을 보면 “일본 제국의 학도병이 되는 것은 광영이며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석호申奭鎬는 덜 알려져 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악질이죠.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조선 시대 전기를 정리하는 촉탁 수사관, 수사관보를 지냈습니다. 광복된 해인 1945년에 지금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전신인 국사관國史館을 창설하게 됩니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광복 후 친일 세력이 다시 집권하자 조선사편수회의 경력을 발판 삼아서 역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키게 되는데요.
신석호의 원래 이름이라고 할까요? 창씨 개명된 이름은 데라타니 슈죠寺谷修三입니다. 그는 미 군정기인 1946년 3월에 설립된 국사관을 거쳐서 건국 직후 대한민국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창립에 진력하게 됩니다. 광복 후에 성명을 복구해서 옛날 명칭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신석호입니다.
그에 대해 이덕일 교수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사무국장 신석호가 총괄했는데, 국사 편찬의 역사를 보면 신석호의 재임 기간을 1929년 4월에서 1961년 1월 21일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했다고 당당하게 밝혀 놓고 있는 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선사편수회라고 하는 것이 해방 때까지 존재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여기에 있는 사료들을 모아 가지고 ‘우리 역사서를 좀 더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만든 것이 미 군정 때 ‘국사관’이고, 이후 몇 년 뒤에 ‘국사편찬위원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편찬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생각나죠? 조선사편수회 바로 이전에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라고 했잖아요. 이제 우리 역사니까 ‘조선사’ 대신 ‘국사’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 그리고 그것이 국사관, 국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는데 그 흐름이 바로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 학자가 논문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일본 통치기의 조선사 계통이다.’라고 하는데, 그 계통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이마니시 류今西龍까지 나오죠. 그다음이 누구냐면 신석호입니다.
일본 통치기의 조선사학 계통이 신석호로 계승되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석호의 단군관을 보면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신석호 전집을 보면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고 나서 아사달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삼척동자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단군신화 시비’인데요. ‘역사적 사실로 믿을 사람이 어딨느냐. 삼척 동자도 믿지 않는다.’ 이거는 일본 학자들보다 더 과격한 그런 언사가 쓰여 있다는 겁니다. 한국인이 아니라 데라타니 슈죠죠.
한국역사연구회와 기관지 <역사와 현실>
이 국사편찬위원회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김인걸이라는 교수인데 이분이 뭐라고 했냐면 작년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몽고와의 전쟁 이후 새로운 정체성의 기반이 된 단군 민족의식이 자리 잡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몽고와의 전쟁 이후에 단군 의식이 나왔다 하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라도 천년사는 당초 천 년 역사를 기록하려다 편찬 범위를 넓혀서 5천 년 역사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집필진도 112명에서 213명으로 늘리고 예산도 24억 원으로 증액했습니다. 여기에는 뭐가 담겨 있냐? ‘단군은 신화다.’, ‘고조선의 남쪽은 진이다. 그러니까 전라도도 진국이다.’ 이런 내용들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겁니다.
전라도 천년사든 또 옆에 있는 경상도 천년사든 역사를 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고, 요즘에는 김해 역사를 발간한 김해 지사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그 지역의 향토사를 정리하려다 보니 결국에는 모든 책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쪽은 단군조선이 아니라는 100년 전 지침에 충실하게 전라도사도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김인걸 씨는 원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이 한국역사연구회도 1980년대 후반에 나왔습니다.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1986년에 『환단고기』가 출현하고 세상에 알려져서 100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렇게 『환단고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위기의식을 느껴서 나온 단체들이 전부 다 이 1980년대 후반에 나왔어요.
‘한국역사연구회’의 취지문에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로 단결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뭡니까? ‘단결해 가지고 민족사관을 몰아내자.’라는 의식으로 만든 게 한국역사연구회입니다. 이곳의 기관지가 〈역사와 현실〉인데, 최근에 기고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장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2020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라고 해서 “이유립은 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단학회라는 걸 설정했다.”라고 썼습니다. “설정했다.”, 이건 없는 걸 만들어 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글을 버젓이 기관지의 논문으로 싣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발탁이 되어 인문학부 교수로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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