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설(無說說)>
무설설(無說說), 말하는 바 없이 말하고,
말이 없는 가운데에 말이 있다는 뜻이다.
말 없는 가운데 말이 있다는 것이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설법해도 모르는 이야기이니 말없이 설법을 하는
침묵의 소리를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 체득이 가능하리라.
선문(禪門)에선 말과 침묵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말과 침묵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곧 말인 것이니,
말이란 말하지 않는 가운데 말함(無說說ㆍ무설설)이요,
침묵이란 말하는 가운데 말하지 않음(說無說ㆍ설무설)이다.
말이 많다고 의사가 통하는 것이 아니며,
말없이도 통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무설설(無說說)은 광장설(廣長說)의 반대되는 말이다.
더구나 말 못하는 자연물도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예건대 소나무, 바위와 같은 무정물도 말없이
그 무엇인가를 알려준다면 이 역시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만고풍상을 다 겪은 노송이 장구한 세월의 의미를 알려준다든가,
비바람에 깎인 바위 모서리가 원융(圓融)의 이치를 말해주기도 하니,
그 역시 의미심장한 설법일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런 선시가 있는가보다.
<소리 없는 소리>
지난 해 늦은 봄 삼월(三月)
들보 위에 집을 이으며
날 보고
산(山)에를 가거든 산(山)을 배우자
바다로 가거든 바다를 배우자
태양(太陽)을 보거든 태양(太陽)을 배우고
우뢰(雷)를 듣거든 우뢰를 배우자
들리는 것마다 무설설(無說說)의 법음(法音-부처님 말씀)
보이는 것마다 무문자(無文字)의 경권(經卷-경전)
진대지(盡大地-이 땅 전체)가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魯蔗那佛).
그런데 같은 맥락의 말에
‘무설설(無說說) 무문문(無聞聞)’이란 말이 있다.
굵직한 노송은 설함이 없이 설하고,
우리는 들음이 없이 들어야한다는 말이다.
어디 소나무뿐이랴, 삼층석탑이 토해내는
사자후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갖가지 꽃들도 화엄세계의 장엄법문을 설하는데,
어리석은 나는 제불의 미묘법문에 막혀 겨우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만 법 비(法雨)를 담는다.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하찮은 저 작은 벌레도 나 여기 있다고 몸짓을 하고,
저 담 밑의 갖가지 꽃들도 화엄세계의 장엄 법문을 하고 있음에야,
어리석은 나는 그들 제불의 미묘 법문을
제대로 듣지 못하니 부끄러워 돌아선다.
『운문사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을 때,
대지를 향해 아래로 옆으로 뻗는다.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것이다.
가장 낮아짐으로써 대지의 모든 생명들을 다 품고 받아들인다.
하심(下心)! 한없이 자신의 마음을 낮출 때
일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며 경건하게 대할 수 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통해서
‘무설설(無說說) 무문문(無聞聞)’의 진리를 배운다.
설함이 없이 설하고, 들음이 없이 듣는 것이다.
참으로 설할 수 없는 실상의 자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다.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 했다.
고요히 선정에 든 소나무!
학인 스님들에게 무한한 가르침을 주는 선지식이요, 스승이다.
경전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우리는 소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도
생명의 존귀함과 거기에 담겨진 더 많은 진리들을 깨우칠 수 있다.』
- 진광 스님
또한 같은 뜻의 ‘무설설 불문문(無說說不聞聞)’이란 말이 있다.
말하는 바 없이 말하고, 듣지 않은듯하면서 듣는다는 뜻이다.
말이 없는 가운데 말이 있으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전해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말이 무설설(無說說)이고,
이심전심으로 듣는 것이 곧 불문문(不聞聞)이다.
관음보살이 법을 설하면,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들은 바 없이 듣는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께서 선재(善哉)! 선재善哉)!라 하고,
무설설(無說說)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리라,
그러니까 무설설(無說說)이고 불문문(不聞聞)이다.
설한 바 없이 설했는데,
묘하게도 일체중생은 들은 바 없이 듣고 변화를 한다.
본래 그러한 데에 말없이 계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심(下心)하고
향상일로(向上一路)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
백의관음보살님은 말없이 설법을 하시고,
남순 동자는 듣지 않아도 설법을 알아듣는구나.」
유명한 <관음찬(觀音讚)>에 나오는 게송이다.
즉 “관세음보살은 법을 설해도 전혀 설하는 것이 없이 설하며,
그 설법을 듣는 시자 남순동자는 역시 듣는 것 없이 듣는다.”라는 뜻이다.
옛날 고사에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伯牙)는 자기를 알아주는
참다운 벗 종자기(鍾子期)를 잃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하는데,
그런 관계를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듣는 지음자(知音者)의 관계라고 하며,
관음보살과 남순동자(南巡童子)는 진리를 잘 설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동도(同道) 수준에 오른 관계였다.
그리하여 관음보살은 말로써 설명하지 않았지만
남순동자는 들음 없이 들었다.
따라서 관음보살과 남순동자는 말 없는 가운데 법을 설하고
말없는 가운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경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진 경지를 말한다.
진리는 본래 말이 필요 없다.
마음을 열어놓으면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이미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마을 듣게 된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으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설밥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삼라만상이 다 부처님 법신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무처설(無處說) 무처문(無處聞)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관음찬(觀音讚)> 게송을 음미해보자.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 -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고,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 - 남순동자는 들은 바 없이 듣는다.
병상녹양삼제하(甁上綠楊三際夏) - 화병 위의 푸른 버들은 늘 여름이요,
암전취죽시방춘(巖前翠竹十方春) - 바위 앞 대나무는 어디나 봄이라네.
백의관세음보살은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라는
바닷가 낙가산에 계신다고 한다.
오른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그 병에는 어김없이 버드나무가 꽂혀 있다.
게송에서와 같이 정병 속의 버드나무는
언제나 여름날의 우거진 녹음을 상징하니
이는 중생의 탐욕과 번뇌를 식히는 그늘을 상징한다.
아울러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시는 바위 앞의
푸른빛 무성한 대나무는 시방세계가 항상 봄날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하기를 발원한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가 함께 한다.
남순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주인공인
선재동자(善財童子)를 일컬음이다.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53선지식을 순방하면서
각각 가르침을 얻어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행을 한다.
구도행 도중 수물 여덟 번째 만나는 분이 관세음(관자재)보살이다.
<화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보살도의 수행법을 질문 받고 오로지 중생을 불쌍히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수행도로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普門示現 願力弘深 大慈大悲 救苦救難).
게송에서 관세음보살은 말씀 없이 설법하시고,
남순동자는 듣는 바 없이 그 설법을 듣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금강경 오가해(金剛經 五家解)에서 말한다.
여래가 무설설(無說說)이니 이를 듣는 것도 불문문(不聞聞)이 돼야 하고,
이를 질문하는 것도 불문문(不問問)이 돼야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한다.
부처님이 설한 바가 없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제자들과는 마음이 통했겠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에게는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여래와 진리와 우리가 마음이 통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설한 바 법이 없다고 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하겠다.
부처님은 지금 우주의 대도(大道)를 설하고 계신다.
하지만 대도는 부처님이 설하든 말든 항상 명명백백하게 있다.
모든 것이 대도의 품에 있다. 나와 대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설하는 것이 바로 무설설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한 법 또한 나와 따로 있어 보고 듣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나의 모자람을 채워야 하겠다.
그래서 능도 스님의 선시를 소개한다.
허공(虛空)은 늘 티 없음을 알려 주고,
청산(靑山)은 쓰잘 데 없는 말 없음을 말하고 있네.
스치는 바람은 장애물을 살짝 비켜가며
미안해하고,
흐르는 물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추어 흐른다.
바위를 만나도 시비를 하지 않고,
인간이 온갖 오물을 버리고 더럽혀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갈뿐.
우리는 이와 같은 말없이 말하고,
들음 없이 들어야 하고,
시비 없이 살아야 한다.
虛空, 靑山, 바람, 물..........
청산유수무설설(靑山流水無說說): 청산과 흐르는 물은 말없이 말하고,
창공미풍불문문(蒼空微風不聞聞): 창공에 부는 바람은 들음 없이 듣네.
그런데 또 비슷한 말에 ‘무설설 무법법(無說說無法法)’이 있다.
도선(道詵) 국사가 신라 문성왕 8년(846)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에서
수도하던 혜철(惠徹) 도인을 찾아가서
그에게서 ‘무설설 무법법’을 화두로 받아서 불철주야 고행한 끝에 확철대오했다고 한다.
무설설(無說說)은 말 없는 가운데 말함이고,
무법법(無法法)은 법 없는 가운데 법을 말함이다.
말없는 말, 또 말을 하고도 말한 바가 없는 무설설은
무법법의 ‘법 없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무법이 법이며,
곧 법이 법이 아닌 것과 같은 ‘무법법’의 도리다.
결국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알음알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다면,
그 걸 알음알이로는 이해할 수 없고,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진리는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가르쳤다.
<유마경>에 전해지는 무설설(無說說) 침묵의 소리를,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만 체득이 가능하리라.
자연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서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바람 불고,
물 흐르는 가운데 전해져 오는 진리의 소식에 감사해야 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비리와 범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행위를 멈추고, 순수한 영혼의 떨림에 응답해야 한다.
지금 이 지구상에 종교라는 이름의 테두리 속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종교간 다툼이 문명의 충돌로 비쳐져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있는 현실을 보면
인류는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종교 단체들도 지나치게 이념에 매몰돼,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얼마나 벌어지고 있는가.
“종교는 권력과 돈이 없을수록 존경받는다.”고 했는데,
종교 단체들은 돈벌이에 눈이 멀어있다.
이러다간 종교가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악마의 손길이 될까봐 우려된다.
우리 모두 부처님의 무설설 가르침을 절실히 되새겨 봐야 할 때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