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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풀무생활협동조합 발생 1. 이찬갑 선생과 협동조합 2. 풀무학교와 협동조합 3.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이후 풀무생협)의 탄생
Ⅱ. 협동조합 운동의 성과 1. 유기농업 재배 촉진 및 직거래 확산 2. 전국 최초의 지역언론 발생 3.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 만들어 |
Ⅰ. 풀무생활협동조합 역사
1. 이찬갑 선생과 협동조합
1922년 12월 염태진, 이광수가 외국제품 수입 배격을 위해 서울에서 ‘자작회’를 만들었는데(‘그 나라 역사와 말’ 백승종 지음. 2002년 궁리 출판사)) 이가 우리나라 처음 소비조합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1928년 9월부터 약 1년 동안 도쿄에서 빈민생활을 한 이 시기에 이찬갑은 일본 고베생협을 만든 일본생협의 대부 카가오토요히코(賀川豊彦)와 함께 살면서 소비자협동조합을 깊게 접하게 된다.
일본에서 정주로 돌아온 이찬갑은 1931 - 33년에 오산양계조합의 조합장, 1933 -1935년 오산소비조합 전무이사 등을 지낸다.
1920년대 말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용동마을에 소비조합이 있었다. 오산학교가 ‘학교마을’을 만들어 이상촌 운동을 한 곳으로 7개 마을이 동참했다. 각 마을 대표가 상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경제, 정치, 사회적 지위 향상 문제까지 다루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이 1930년 사망하자 부의금 낸 금액을 보면 이광수 5원, 용동자면회 10원, 조선일보 100원을 낸데 비해 소비조합에서 50원을 낸 것을 보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 ‘그 나라 역사와 말’)
2. 풀무학교와 협동조합
1958년 홍성군 홍동면에 이찬갑, 주영로선생이 풀무농업기술학교를 열면서 학교만 연 것이 아니라 같은 해에 협동조합도 만들었다. 설립자 이찬갑은 학교와 지역이 함께 가기위해 생활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가는 협동적인 지역사회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1960년 풀무학교에 소비조합의 전신인 구판장을 열었고, 1969년 교사와 졸업생을 중심으로 홍동에 풀무신협을 열었는데 도시가 아닌 농촌지역에서 신협 설립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시도였다.
홍동지역에서는 1975년부터 유기농업을 실천하면서 학생도서관, 주민스스로 갓골어린이집설립, 농기계협동조합 창립, 제빵협동조합창립, 풀무생협창립(1980년) 등으로 1978년부터 1980년에 농촌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실천하였다(박원순).
3.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이후 풀무생협)의 탄생
1980년 3월 23일 풀무학교 일요성서집회 부녀반은 서울여대 이동영 교수를 초청해 소비조합에 대한 좌담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지역 소비자협동조합 발기인회를 구성했다. 5월 20일 풀무소비자협동조합 창립총회를 했다. 풀무학교 교직원과 지역 주민 등 27명이 함께 했으며 홍순명 풀무학교 교사가 이사장을 맡고 주민 7명의 이사와, 감사 3명을 선출했다. 조합원은 가입금 1천원, 출자금은 한 구좌에 5천원으로 정한 정관을 통과했다.
그해 7월1일 홍동면 운월리 마을에 10평 정도 크기 가게를 월세 2만5천원에 임대해 들어가 판매업무를 시작했다. 조합원은 주민 31명으로 늘어나고 순 출자금 7만원이 모아졌다. 총 자산은 500만 원이었는데 풀무신협과 홍동농협 등에서 차입한 것이다. 판매 상품은 설탕, 라면, 밀가루, 세제류 등 가정생활에 필요한 것들이며 술은 팔지 않기로 했다.
1984년 11월 13일자 한국일보는 1면 머릿기사에서 “전국에 76개의 소비자협동조합이 결성돼 있으나 대부분 형식적인 조직만 있을 뿐이고 조합활동을 하고있는 곳은 3개뿐이며….”라고 경제기획원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도했다. 그 기사보다 4년 앞서 창립해 활동하는 풀무소협은 우리나라 최초 소협이거나 적어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3개 조합중 하나였던 것이 틀림없다.
풀무소협은 창립 6개월만인 1981년 3월 2차 총회를 했는데 조합원 57명, 총 매출 1368만원, 당기 순이익 55만원을 발생해 출자배당 24%, 이용고 배당 5%를 실현했다. 또 1년 후인 1982년 2월 총회는 조합원 77명, 당기순이익 44만 2천원, 출자배당 23%, 이용고 배당 5%를 실현하는 결산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1983년 2월 제4차 총회는 부채 341만원, 당기 순손실 128만 6290원의 결산안이 상정됐다. 총회가 끝난 후 실무 책임자가 사임했다. 소협은 지역 개인에게 운영을 맡기고 이익금의 절반을 내놓도록 했다. 소협은 개인의 것이 되고 조합원의 외면을 받았다.
1983년 12월 9일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소협을 해산하고 재창립 발기인회를 구성했다. 12월 23일 주민 45명이 풀무소비자협동조합 재 창립총회를 열고 정관, 임원, 직원 등을 완전 히 새로 짰다. 논란 끝에 전 소협 출자금을 승계받아 전액 인정하기로 했다.
홍동면은 홍성읍에서 약 10키로미터 떨어진 농촌 지역이다. 홍성읍내로 나가는 버스도 하루 한 두 번 운행하는 등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따라서 홍동은 읍내 보다 각종 상품 값이 비쌌다. 풀무소협은 이같은 환경 속에서 소비자들의 단합된 힘으로 공산품을 싸게 구입해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출발했다. 풀무소협은 라면 설탕, 소금 등 간단한 생필품으로 시작해 시멘트, 합판 등 농자재까지 취급했으며 뒤에는 흥농종묘 홍성대리점과 계약, 씨앗까지 판매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로 홍동 농민들도 쉽게 홍성읍내 시장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대형 수퍼마켓들이 생겨 싼 값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해지면서 소협의 역할이 축소됐다. 홍동 농민들에게 더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는 농민들이 생산한 농축산물을 어떻게 판매할 수 있는가였다. 더욱이 생산비가 더 들어가는 유기농업 농축산물을 어떻게 생산비를 보장 받으며 판매할 수 있는가 하는 게 문제였다.
풀무소협은 1987년 8월 1일부터 공산품 판매를 중단했다. 그리고 유기농산물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생산자조합으로 바꾸며 이름을 ‘풀무생활협동조합’으로 변경했다. 나아가 풀무생협은 홍동면 외 지역 농민 중에서도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킴으로 관활구역을 홍성군 단위 조합으로 넓혀나갔다.
이렇게 해서 홍성군 전체 조합으로 된 풀무생협은 2007년 12월31일 현재 다음과 같은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2008년 조합원 총회 자료)
▲조합원 864명 ▲직원 16명 ▲생산위원회 59개 반(쌀 29, 채소 24, 축산 6) ▲총 매출액 122억 4000만원(가공업체 48.9%, 직거래물류단체 44%, 대형 유통업체 3.9%, 급식 및 자체 판매 2.5%, 단협 및 전문매장 0.4%) ▲조합원 친환경 인증별 생산면적(논, 밭 합계) : 유기재배 101만 7249평(82%), 전환기 유기 재배 16만 6755평(13.6%), 무농약 재배 4만1382평(3.4%), 저농약 재배 6553평(0.5%), 합계 1123만 1939평 ▲가공사업 유제품, 식혜 분쇄류, 스낵류, 절임류, 기타 합계 7억 2400만원 판매 ▲거래처 : 직거래 물류단체 3, 전문매장 3, 가공업체 21, 대형할인점 1, 급식업체 5, 학교 15, 기타 79, 합계 127곳
Ⅱ. 협동조합 운동의 성과
1. 유기농업 재배 촉진 및 직거래 확산
풀무생협은 1980년대 창립과 동시에 경실련생협(박문숙)과 손잡고 서울과 성남시 등 수도권 지역과 농산물 직거래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이 소식은 <농수축산유통정보(1984년 12월 3일)>, <한국일보(1984년 12월 6일)> 등 언론에서 “홍성 풀무생협에서 농산물 직거래 사업을 시작해 유통단계를 줄여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에 이익을 주게 됐다”고 보도하며 전국에 알렸다. 1985년에는 서울 대신동 강남소협과 쌀 직거래 사업을 했다.
풀무소협에서는 각 마을 1명씩 16명으로 농산물유통위원회를 결성하고 주정배를 위원장으로 선출해 조직적으로 생산을 관리해 나갔다.(한국일보 86년 6월 11일 보도) 당시 월 평균 80키로그램들이 쌀 100가마씩 공급했다.
1986년 6월에는 대학을 갓 나온 젊은이들이 풀무소협과 직거래를 통해 유통과정을 줄여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겠다며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좋은쌀집’ 간판을 걸고 쌀집을 차렸다.
1989년 한국여성민우회는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풀무생협과 유기농산물을 직거래로 공동 구매를 시작했다.
그후 풀무생협 환경농산물은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소비자단체로 확산돼 판매함으로 농민에게 판로를 열어주고 도농간 직거래 운동을 앞서 실천해왔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 환경농산물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 농산물과 비교하기 어려운 가운데 값이 비싸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간 신뢰가 없이는 유통이 어렵다. 풀무생협은 생산자들의 재배과정을 엄격히 관리하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 유통시킴으로 환경농산물 시장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풀무생협은 홍동을 전국 최대 유기재배 생산지로 만들었다
2. 전국 최초의 지역언론 발생
풀무소협은 1985년 5월 <홍동소식>이란 월간지를 발행했다. 이 <홍동소식>은 1986년 12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했다. 그러나 이 <홍동소식>은 1988년 12월 <주간홍성>을 창간하는데 모태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군단위 지역신문 <주간홍성>은 전국에 퍼져 20년동안 닫혔던 지역민의 입과 귀와 눈을 열어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심화시키는데 기여 했다.
<홍동소식> 창간호 1면에 게재된 발간사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홍동소식’은 풀무소비자협동조합 회보로 발행합니다. 협동조합이란 그 조합 자체를 위해서 생기고 운영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원을 위할 뿐만 아니라 조합원이 살고있는 지역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조합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본지는 한 달에 한 번씩 홍동지역의 여러 소식을 고루 전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또 주민의 상식과 교양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글과 안내, 모두가 알아야 할 광고 등을 곁들이고자 합니다. 우리 몸에 피가 제대로 순환해야 건강을 유지하듯 의사소통은 신체의 피돌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홍동소식은 홍동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 지방잡지 또는 지방신문처럼 구밀 계획입니다.
지역발전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홍동면에서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아는 일입니다. 이웃 없이 내가 살 수 없고 나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그런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협동은 무르익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달에 홍동에서는 매우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며칠 전 홍성읍으로 가는 역재 철도 건널목에서 운월리 강사영 씨 자동차와 기차가 충돌해 자동차에 함께 타고 있던 영생약방 이배식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운전하던 강씨 부부가 크게 다쳐 중태입니다.
건널목 간수가 출근하기 전 새벽이었습니다. 그 건널목에는 몇 년 전에도 홍동 의 한 농민이 모는 경운기와 기차가 충돌해 여럿이 숨지는 등 사고가 잦은 곳입니다. 그 건널목은 간수가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며, 건널목 좌 우에 있는 집 한 채씩이 운전자 시야를 가려 사고 위험이 높은 등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큰 사고는 당연히 신문에서 보도하고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으나 신문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서울이나 대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이같이 <홍동소식>은 우리 홍동이 안고 있는 문제를 찾고, 알고, 해결하기 위해 여론을 모으고자 합니다. 시골과 도시의 격차는 여러 가지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것 하나는 시골에 문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지는 홍동 주민이 이웃을 서로 알고 하나 되게 하는데 기여하고 시골에 청신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매월 발행하던 홍동소식은 A4 크기 4쪽 혹은 8쪽 짜리 뉴스레터 정도 였다. 그런데 전두환정권이 2년만인 1986년 12월 강제로 폐간시켰다.
홍동지역 주민 20여명으로 ‘홍동소식 탄압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 정부 투쟁을 논의 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이 군사 정권과 싸워 이길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접었다. 그리고 차라리 군 단위서 주간지 발행을 신청하고 그 역시 탄압을 받을 경우 전국적인 언론투쟁을 벌이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동아일보>는 1987년 2월 2일자 1면 고정 칼럼을 통해 “홍동소식이란 신문이 언론기본법에 의해 숨을 거둔 사실을 아는가”라며 전국에 알렸다.
홍성YMCA 젊은 이사 6명으로 구성된 ‘화요독서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1년 반 동안 준비 끝에 1988년 12월 1일 <주간홍성>이 창간됐다. 이렇게 탄생한 지역신문은 전국으로 확산돼 20년 동안 지방화시대의 피돌이 노릇을 하고 있다.
3.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 만들어
홍동면에 여러가지 사업, 단체 활동들이 있다. 이 활동들은 한 개인이 아닌 주민 공동으로 하며 관청이나 상부의 지시가 아닌 주민 스스로 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주민 의 자주적 공동체활동은 일찍부터 신협과 생협의 협동조합 활동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홍동의 이런 시도는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다.
성공한 사례는 풀무소협, 풀무신협, 갓골어린이집, 홍성환경농업마을, 홍성여성농업인센터, 풀무학교생협 등이 될 것이다.
풀무신협은 1969년 우리나라 신협운동 초창기에 창립해 40년 가까이 건전하게 운영해 서민금고 역할을 잘 하고 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면단위에서 보기 어려운 신협을 만든 풀무신협은 신용사업 외에도 미생물을 배양하는 사료첨가제를 개발해 공장을 세워 생산하며 배합사료 공급, 환경운동사업 등 여러가지 경제사업을 하고 있다. 풀무신협은 2007년 12월 말 현재 조합원 3020명에 자산 211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홍동면 전체 인구수가 1620세대 4181명(2008년 3월 21일 현재)이기 때문에 한 집에 2명 가까이 조합원으로 가입 돼 있다.
갓골어린이집은 1980년에 홍동면민 100 여명이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이사회를 구성하는 등 협동조합 방식으로 설립했다. 홍성군내 첫 민간 어린이집으로 주민들이 푼돈을 내 운영했으나 뒤에 사회복지법인으로 만들어 행정당국의 지원을 받고 운영된다.
홍성여성농업인센터는 2001년 시작해 2002년부터 정부(농림부) 지원을 받으며 농촌 어린이 보육, 아동 방과후 지도, 여성농업인의 교육과 문화, 건강강좌 등 농촌 여성 지위향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각종 활동을 한다. 33개 마을 대표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대표 선출 등 운영을 주도하며 100여 명의 회원이 함께 활동한다.
우리나라 환경농업은 경기도 양평, 경북 울진 등에서 보듯 대부분 관청에서 시작하고 지원하며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홍동 환경농업은 30여년 전 풀무학교에서 지역으로 확산돼 주민 스스로 협동조직을 만들어 시작한 민간 주도형이다. 당시 증산정책에 역행한다며 행정당국의 견제와 박해 속에 시작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관청의 지원을 받는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온 특징을 갖고 있다.
홍동의 협동조합식 주민운동 중 실패한 사례들은 농기구이용협동조합, 식빵 협동조합, 도서협동조합,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대체공업연구소 등이다.
홍동에서 다시 준비하는 협동조합식 지역공동체 운동도 있다. 홍동밝맑도서관 건립운동과 신재생에너지 운동이다. 홍동밝맑도서관은 2007년 가을에 주민 100여명이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시작했으며 올해 안으로 건평 150평 크기의 주민 도서관을 세울 목표로 활동 중이다. 이 도서관은 도서 열람 대출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활동을 함께 하는 주민 복합 문하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홍동에는 10 여명이 신재생에너지 시민모임을 결성해 태양광 발전, 바이오 에너지 개발 등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6가정에서 태양광 발전으을 통한 전기를 사용한다.
홍동에서는 매년 1월 말에서 2월 중 풀무신용협동조합과 풀무생활협동조합 조합원 정기총회가 열린다. 홍동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보통 500 명 내외가 모여 한나절 혹은 하루종일 회의를 하며 토론을 벌인다. 지난해 사업결산과 감사 내용, 새해 사업 계획을 놓고 토론을 벌이며 3년에 한번씩 치열한 경쟁 속에 투료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한다. 그렇게 30년 여년(풀무생협 28년, 풀무신협 39년)을 반복하면서 주민들의 토론문화와 정치, 사회적 의식이 깨어나 민주주의의 훈련장이 되고 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자유롭게 가입, 탈퇴할 수 있고 사유재산과 경제적 이익을 부인하지 않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이다. 반면 협동조합은 출자금에 상관 없이 1인 1표의 평등한 의결권, 경쟁과대립의 피해를 완화하며 비영리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산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본적으로 다르다.
홍동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더 나은 대안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상적인 농촌마을을 만들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열심히 모이고 토론하며 실천한다. 그 밑 바닦에는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초기부터 시작한 협동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