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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109
(소설 삼국지 )
1권 4장 군웅들의 성장
2) 서량의 반란
난이 끊이질 않게 되니 장수들은 군대를 계속해서 거느리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관제(官制)에 따르면 중앙 무관직으로 대장군을 비롯한 여덟 명의 장군과 다섯 명의 교위를 설치했는데, 경사를 방어하는 상비군 소속의 다섯 명의 교위를 제외한 장군들은 본래 상설직이 아니었다. 내외에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을 토벌할 임무가 부여된 장군이 임명되었지만 정벌이 끝나게 되면 장군 직책은 없어지게끔 되어 있었다.
환관들과 황제의 외척들이 득세하면서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자 실질적인 권력은 병권에서 나왔다.
후한 안제(安帝) 이래 정치가 쇠미해지자 외척 경무(耿寶)가 대장군(大將軍)이 되면서 대장군은 사실상 상설화되어 관부를 설치하고 휘하에 관속들과 부곡(部曲) 병사들을 두게 되었지만 나머지 장군들은 여전히 전란과 정벌이 있을 때만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일이 끝나면 장군의 직책을 없앴다.
전쟁과 반란이 끊이질 않자 여덟 명의 장군을 비롯하여 각종 잡호장군(雜號將軍)들도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게 되니 장군들의 직책은 상설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상황은 반란을 정벌하는 과정을 통해 전투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장수들에게 군대를 사병화 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장군들의 휘하에 군대가 상설화되어 가면서 군벌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일어난 각종 반란 중 가장 고질적이고 장기간 지속된 난이 서량지역의 반란이었다.
서량 지역은 왕망의 난 이후 혼란기에 적미적(赤眉賊) 등의 약탈로 황폐화되자 후한 광무제 시절 마원이 금성지방의 강족들을 삼보(三輔, 서한의 수도였던 장안군과 그 좌우의 좌풍익, 우부풍 등 3개 군)로 옮겨와 살게 한 이래로 호(胡), 한(漢)이 잡거했다. 선비, 강, 저, 호족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니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서량의 군, 현의 주민들은 대부분 둔전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성정이 거칠고 무력을 숭상했다. 토착세력과 호족의 수장들이 결합하여 세력을 키워 반란이 그치는 날이 없다. 심지어 태위 최열(崔烈)이 양주를 포기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서량 지역은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서량의 강족, 호족들이 도적들과 연합해 북궁백옥 등을 수령으로 추대해 난을 일으킨 것은 황건적의 난 진압이 거의 막바지에 이렀던 중평원년(184년) 겨울이었다.
봄이 되자 반란군 무리는 수만 명 기병을 앞세워 삼보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황성 경사로 진격해 백성들을 죽음에 빠트리고 있는 환관의 무리들을 주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은 것이다. 서량의 반란이 중앙 정권을 위협하는 대란으로 진화한 셈이다.
장안 인근에 산재한 선황(先皇)들의 원릉이 침탈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황건적을 토벌했던 영웅 좌거기장군 황보숭을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이 때 동탁이 중랑장에 임명되어 황보숭의 부장이 되었다. 중평원년 하곡양(下曲陽)에서 장각을 치다가 패한 죄로 면직되었던 동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량주의 반란군은 여러 잡다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머리가 여러 개인 뱀과 같았다. 구심체가 없이 지휘체계가 분산되어 유리하면 합세해 진격하고 불리하면 흩어져 달아나 근거지를 지켰다. 머리 하나만 자르면 와해되는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
지구전이 불가피했다.
난의 진압이 늦어지자 황보숭의 위명을 시기하던 조정에서는 이를 핑계로 그를 해임했다. 환관들과의 알력이 작용해서 식읍이 대폭 삭감 당한 것이 이때의 일이었다.
황보숭이 해임되자 변장(邊章), 한수(韓遂)의 무리는 더욱 세력을 떨쳤다.
조정에서는 후임자로 사공(司空) 장온(張溫)을 지명했다. 장온은 거기장군으로 임명되고 가절을 수여받았다. 동탁은 파로장군(破虜將軍)이 되어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임명된 주신(周慎)과 함께 장온의 통솔을 받게 되었다. 장온은 여러 군에서 십여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소집하여 미양(美陽, 우부풍 소재) 현에 주둔했다. 원릉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변장과 한수도 미양으로 진격해 장온, 동탁이 지휘하는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수차례 겨뤘으나 전황은 점차 관군에게 불리해졌다. 량주의 도적은 수도 많았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 전투력이 강했다. 농사를 짓던 농민들을 긁어모아 임시로 훈련시킨 민병들로는 당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이 되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중평2년(185년) 11월 어느 날 밤 불처럼 밝은 유성이 떨어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었다. 별똥별이 변장과 한수의 진영에 비치자 노새와 말들이 놀라서 울었다. 변장, 한수의 반란군에는 변방의 이민족이 많이 섞여 있었다. 미신에 약한 이들은 이를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본거지인 금성(金城)으로 귀환하기를 원했다.
동탁은 소식을 듣고 적을 격파할 기회가 왔다고 매우 기뻐했다.
다음 날 동탁은 우부풍 태수 포홍(鮑鴻)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일제히 진격했다. 적을 대파하고 수천 명의 수급을 참했다. 변장과 한수는 패주하여 유중(榆中,금성군 소재) 현으로 도망쳤다. 동탁의 위명이 서량지역에 진동했다.
장온은 주신(周慎)에게 병사 삼만을 이끌고 적을 추격토록 했다.
주전의 별부사마였던 손견(孫堅)은 장온의 참군사(參軍事)가 되어 종군하고 있었다. 총지휘관으로 임명될 당시 장온은 용명이 자자한 손견을 참모로 초빙했다. 손견이 주신에게 계책을 말했다.
“적은 지금 성중에 있고 성안에는 곡식이 없습니다. 성 밖에서 군량을 날아올 것이므로 적의 양도를 끊어야 합니다. 저에게 일만 명의 병사를 주시면 적의 군량 수송통로를 끊겠습니다. 그러면 장군께서 대군을 이끌고 뒤를 받쳐주신다면, 적은 배가 곯아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강족의 거주지로 도망치게 되더라도 토벌해 량주지방의 소란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주신이란 자는 꽤나 용렬했던 인물이었다. 손견의 계책은 받아들여지 않았다.
주신은 아무런 전술도 없이 전군을 몰아 유중성을 포위했다.
변장과 한수의 반란군이 선수를 쳤다.
주신의 군대가 진치고 있는 후방에 규원협(葵園狹)이라는 좁고 긴 협곡이 있었다. 황토대지가 오랜 세월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이었다. 이곳은 관군의 유일한 보급 통로였다.
반란군은 부대를 나누어 변장은 성을 지키고 한수는 성문을 나와 포위망을 우회해 규원협을 점거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수가 규원협에 보루를 구축하고 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자, 주신의 군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주신은 차량과 치중을 다 버리고 후퇴했다. 적이 추격하자 관군의 여러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궤멸 당했다.
한편 동탁은 장온의 지시를 받아 삼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애당초 난의 진원지였던 선령강족(先零羌族)을 치기 위하여 적지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후방의 부대들이 붕괴되자 동탁의 군대는 고립되고 말았다. 망환(望垣, 량주 한양군) 북쪽에서 강족과 호족들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군량은 떨어졌는데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탁은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적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동탁군의 주둔지 우편에는 소도수(所度水)라고 하는 비교적 큰 하천이 있다. 수심이 제법 깊었다. 말을 타고도 건널 수 없는 하천이었으므로 반란군들은 소도수(所度水) 강 건너 편에는 포위망을 구축하지 않고 비워 두었다. 동탁의 병사들이 강을 건너 도망치려 하면 기병을 보내 요절을 낼 심산이었다.
동탁은 병사들을 일부 풀어 강에서 물고기를 잡게 했다.
식량을 보충하려 한다는 소문을 냈다.
강족과 호족의 수령들은 이를 듣고 비웃었다. 좀 더 굶긴 다음에 공략할 심산이었다.
동탁의 병사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 한복판에 둑을 쌓고 물을 퍼냈다. 반란군의 척후병들은 구경만 할 뿐이었다. 동탁은 군중에 모래주머니를 많이 만들어 놨다가 한밤중에 보를 완성한 다음 전군을 둑 아래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철군이 거의 다 끝날 즈음에서야 적병들이 알아채고 추격을 시작했다. 동탁은 마지막 대오가 강을 건너자마자 둑을 텄다. 수심이 깊어져 적은 먼 산 바라보듯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장온 휘하의 여섯 개 군대 중 주신의 부대를 포함한 다섯 개 군이 모두 궤산되었으나 동탁의 부대만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동탁의 장졸들은 더욱 동탁을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서량에서의 동탁의 작전 결과를 높게 평가하여 리향후(斄鄉侯)에 봉하고 식읍 천호를 하사했다.
변장과 한수가 이끄는 반군은 위세가 높아졌지만, 장온은 산하 부대가 모두 궤산되어 싸울 군대가 없었다. 장온은 동탁에게 부대를 이끌고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탁은 진격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부대를 우부풍으로 후퇴시켜 주둔시켰다. 적의 위세가 흉맹하니 굳세게 지키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이었다. 장졸들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살아 돌아온 상황이라 진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군중에서는 장온이 장안에 앉아서 현실도 모르고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불평불만이 대단했다. 패전의 궁지에 몰린 장온은 병사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문책만이라도 면하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명령을 거부한 동탁을 장온이 소환했다. 동탁은 몇 번 불렸으나 가지 않았다.
다시 부르자 단신으로 장온을 찾았다.
장온이 명령을 수차례나 어긴 것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탁의 태도는 심히 불손했다. 보다 못한 손견이 나서서 장온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군막 안이 비좁아 동탁이 들을까 염려는 되었나 보다.
“동탁은 군법을 어기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군율에 따라 참하십시오.”
동탁이 비록 장수라 하나 장온은 가절을 수여받았으므로 전시 명령불복종으로 처형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장온은 통탁이 들을까 우려하면서 작은 소리로 답했다.
“동탁은 평소에 하서, 농우 지방에 위명을 떨치고 있소. 오늘 만약 그를 죽인다면 서쪽을 정벌하는 일을 누구에게 의지하겠소.”
손견이 다시 강권했다.
“명공께서는 친히 황군을 이끌고 나와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고 있소이다. 어찌 동탁 따위에게 의지하려 하십니까? 오늘 동탁이 말하는 것을 보니, 명공을 존경하지 않고 윗사람을 가볍게 보고 예의를 지키지 않으니 그것이 첫째 죄요, 변장과 한수가 수년간 발호해왔으니 마땅히 적기에 진격해 토벌해야 하거늘 동탁이 토벌이 불가능하다고 떠들어대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군중이 의심하게 하였으므로 이것이 두 번째 죄요, 동탁이 임무를 맡았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고 부름에 응하지 않고 밖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스스로를 높게 생각하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옛적부터 이름난 장수가 군주에게 부월을 하사 받고 군을 지휘하면서 불복종하는 자를 처단하지 못한 자로서 성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오늘 명공께서 동탁에게 사사로운 정을 베풀어 엄벌에 처하지 않는다면, 위엄을 잃고 형벌이 어지러워질 터이니 그때는 어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온은 더 듣지 않고 손견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대는 그만 물러가라.”
동탁이 이처럼 방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탁은 휘하의 군사들의 충성심을 믿었다. 동탁군의 장졸들은 동탁을 철썩 같이 따랐다. 당시 서량에서는 동탁의 부대를 제외하고는 변변하게 전투를 수행할 만한 군대가 없었다. 서량지역에 마땅한 근거가 없는 장온으로서는 동탁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탁은 조정의 실세인 환관들에게 재물을 풀어 외호세력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위법한 짓을 일삼는 집단일수록 비호세력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며, 든든하게 막아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 병사들을 아끼지만 법규의 엄정함에 따라 군율을 시행하는 황보숭과는 달리 동탁은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면서도 휘하 장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장졸들을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처럼 생각해 위법사항이 있어도 군율을 떠나 봐주었고, 전리품이든 관물을 횡령한 것이든 부하 장졸들에게 아낌없이 풀었다. 황보숭과 휘하 장졸들 간의 관계는 서로 친애하고 존경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적인 관계였다. 동탁과 부하들과의 관계는 좋은 일이건 나쁜 짓이건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였다.
장온이 군대를 다시 수습하자 변장, 한수의 무리들은 장기적으로 조정의 대군에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술적 후퇴를 했다. 각기 본거지로 후퇴하면서 겉으로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정벌군을 해산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중평 3년(186년) 2월 장온은 서량 반군을 잠재운 공로를 인정받아 태위에 임명되었다. 지역의 안정이 회복될 때까지 장안에 주둔하면서 태위의 직무를 수행토록 했다.
삼공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 경성에 거주하지 않고 밖에서 직을 수행하게 된 것은 장온이 처음이었다. 장온은 12월이 되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경사인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량 반군의 준동은 계속되었다.
중평4년(187년) 한수가 우두머리가 되어 농서군을 함락시켰고 량주 자사 경비와 한양 태수 부섭은 내분에 의해 휘하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 그러자 장온은 그 해 4월 서량의 반란을 완전 평정치 못한 책임으로 면직되었다.
중평 4년(187년) 서량의 강족, 호족들과 도적들에게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탐욕에 빠져 서로 침탈하고 싸우는 와중에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 등 초기 지도자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그 와중에서 남은 세력들을 조정해 하나로 묶은 것이 한수였다. 한수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기보다는 위인됨이 차분하고 남의 주장을 잘 들어주는 성격이었던 탓에 여러 세력들 간에 충돌과 분열이 일어난 후 나머지 세력들이 자연스럽게 한수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세력들을 다시 하나로 연합하는데 성공한 한수는 다시 십여만의 군사를 일으켜 농서(隴西)로 진군했다. 농서군의 주성을 포위하자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와 손을 잡고 군을 통째로 들어 반란에 가담했다.
량주 자사 경비(耿鄙)는 휘하의 여섯 개 군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한수의 반란을 토벌하고자 했다. 량주 자사 경비(耿鄙)는 부임한 지도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자사 경비(耿鄙)에 대한 민심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양주의 치중종사 정구(程球)는 간사한 자들과 통모하여 사리를 추구해 왔으므로 관내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다 치중종사 정구(程球) 원망하고 있었다. 사정을 잘 알 리 없는 경비는 그를 신임했다.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 적도(狄道)에 이른 경비는 한수의 무리와 내통한 휘하 사람에게 정구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때 경비 휘하에서 사마(司馬)로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병력을 지휘하던 부풍(扶風)인 마등(馬騰)도 병사를 이끌고 한수와 연합해 반란에 가담했다.
한수와 마등은 의기투합해서 왕국(王國)을 반란의 우두머리로 추천했다. 왕국은 중평원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황중의종의 호족 송건, 북궁백옥 등과 함께 먼저 서량의 반란에 가담한 도적 두목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수가 마등과 연합해 삼보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복귀시켜 좌장군(左將軍)에 임했다. 동탁은 전장군(前將軍)에 임했다. 황보숭과 동탁 두 장군에게 서량의 반적을 막게 한 것이다.
황보숭과 동탁은 각각 2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나 총지휘권은 황보숭에게 주어졌다. 동탁은 황보숭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을 내심 부끄러웠고 불만스러워했다. 동탁은 중평 2년(185년)에도 황보숭의 부장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패군지장으로서 면직되었다가 복직된 것만도 감지덕지하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경위야 어쨌든 황보숭은 조정의 문책을 받아 해임 당했다가 이제 막 복직되었고 자신은 지난 수년간 역전을 치루면서 공적도 많았고 동관(潼關) 서쪽 지방에서 위명이 확립되어 있는 판이었다. 동탁은 내심 삼보가 지켜진 것도 다 자신의 공적이라고 자임하고 있었다. 동탁은 황보숭과는 동향 출신인데다가 경력도 엇비슷했다. 게다가 지금은 직급도 동급이었다. 황보숭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평 5년(188) 11월 왕국이 한수와 마등을 이끌고 삼보의 목구멍과도 같은 요충지 진창(陳倉) 성을 포위했다. 동탁은 뭔가 보여주겠다는 심산에서 곧장 진창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황보숭은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동탁이 불만을 표시했다.
“지혜로운 자는 때를 노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신속함을 잃지 않는다고 했소. 속히 구하러 가면 진창성은 보전될 수 있으나, 구하지 않는다면 성은 함락되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오. 전멸되고 나서 성을 차지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그렇지 않소. 비록 백전백승을 한다 한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만 못하오. 지금 상황에서는 선제공격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고 기다려야만 적을 이길 수 있소. 현재 공격해서는 우리가 이길 수 없고 적이 유리하오.”
황보숭은 진창성은 견고해서 쉽게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지금은 적의 예봉이 강하니 지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황보숭은 말을 이어나갔다.
“병력이 부족하면 수비하고, 병력이 여유가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이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여유가 있는 자는 구천을 나는 듯 움직이고, 부족한 자는 아홉 겹 땅속에 틀어박힌다고 했소. 진창성이 비록 작다고 하지만 성의 수비가 견고해 아홉 겹 땅속에 파묻힌 상황도 아니고, 수괴 왕국(王國)이 강하다 하나 하늘 위를 날 정도는 아니오. 그렇다면 공격하는 쪽이 피해를 입고 수비하는 자는 능히 지킬 수 있소. 진창은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므로 왕국은 지금 손해를 볼 곳에 묶여있는 셈이오. 우리는 병력을 움직여 번거롭게 할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하오.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공격하면 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오.”
과연 왕국이 겨우내 진창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성이 견고해 80여일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중평 6년(189) 2월 적군의 병사들이 지쳐 피폐해지자 스스로 포위를 풀고 물러날 기색을 보였다.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병사들을 진격시켜 공격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동탁이 반대했다.
“불가하오. 사마병법에 이르기를 궁지에 몰린 적을 공격하지 말고 돌아가는 적을 추격하지 말라 했소. 지금 우리가 왕국을 추격하면 돌아가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 되오. 궁지에 몰린 적이 독기를 품고 덤빈다면 어찌 이기기가 쉽겠소. 게다가 적은 우리보다 훨씬 수가 많소.”
황보숭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소. 이전에 우리가 공격하지 않은 것은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한 뒤 적이 피로함을 기다려 공격하고자 한 것이오. 지금은 피로한 적을 공격하자는 것이지 돌아가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오. 왕국의 무리가 도망치고자 하고 있는데 무슨 싸울 의지가 있겠소. 정돈된 군대로 혼란한 적을 치는 것이지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이 아니오.”
병법의 내용을 아는 것과 실제로 쓰는 것은 다르다. 실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은 냉정한 판단을 요구한다. 동탁은 동물적으로 본능에 의지했지만 황보숭은 냉철한 계산에 의지했다. 항상 전장에서 황보숭이 동탁보다 나은 결과를 거둔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동탁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진격을 반대했다. 황보숭은 동탁에게는 후방을 지키라고 하고 단독으로 진격해 공격에 나섰다. 황보숭의 군대는 여러 차례 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왕국의 목을 포함해 만여 명 반군의 수급을 참했다.
동탁은 공이 황보숭에게 돌아가게 된 것을 무척 한스럽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동탁은 황보숭을 몹시 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