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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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크라스키노로 가다.
크라스키노는 한인 최초의 정착지인 지신허가 있고,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가 있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지역적으로 먼 곳을 움직이지 않아 조금은 수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 곳 크라스키노로 가는 날이다. 아침 8시 30분 출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시간 정도 가면 바라바쉬 휴게소가 나온다. 먹거리와 편의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 휴게소를 생각하면 안 된다. 휴게소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고 옆으로 화장실이 있다. 이번여행에 카페나 기념품 샵은 카드 사용을 하려고 환전을 하지 않았다. 휴게소 화장실 가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꼭 작은 돈이라도 환전이 필요하다. 여행사 남대표님과 한옥협동조합 장대표님의 도움으로 낭패를 면했다.ㅎㅎ
바라바쉬 매점에서 재미있는 한글을 발견하고 우리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수돗물에 맥주’ 번역기에다 생맥주를 주문했는데 수돗물에 맥주가 나온 모양이다. 지난 열하 답사 때도 번역기 때문에 큰 웃음을 준 장대표님 덕분에 여행의 피곤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바라바쉬 휴게소 근처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13도의군이 결성된 자피거우가 멀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학자마다 달리 3곳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다시 2시간 정도 달려서 크라스키노 시내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은 중국식이다.
크라스키노에서 핫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중근 단지동맹기념비가 나온다. 2011년 8월에 새로이 만든 비석이다.
연해주 의병장 안중근 의사가 1909년 2월 연추 하리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것을 기념하여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비를 세웠다.
‘단지동맹유지’라는 비문은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백규삼,황병길,조응순,강순기,강창두,정원주,박봉석,유치홍,김백춘,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 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이 비석은 추카노보 마을 입구 시냇가 공터에 세웠었는데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7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현지 진출 기업인 남양알로에와 협의하여 남양알로에 제1농장 입구로 이전하여 세웠다. 그러나 이곳도 러시아 국경수비대 통제구역에 포함되어 있어 한국인들의 관람 참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다시 2011년 8월 유니베라(구 남양알로에) 현지 지사 입구의 대로변 현재 위치로 이전하고 석물을 추가 배치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원래 단지동맹기념비 외에 안의사 단지 손도장을 새긴 검은색 기념 석물 2기와 화강암 조형석 15기를 추가 배치하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술을 올리고 묵념을 하였다. 옆으로 커다란 말똥 덩어리가 쌓여 있어 문화재지킴이 정화활동을 하였다. 서경문화유산포럼 신영주 회장 등 지킴이들이 커다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다른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참배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정화활동을 마쳤다.
3.1운동 100주년,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10주년 되는 뜻 깊은 해에 이곳을 방문하여 술잔을 올리고 묵념을 하며 안중근 의사와 11분의 동지회 회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빛이 손톱만큼 가벼워지는 것 같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니 어미에 대한 효도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일제의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선고되자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보 냈다고 한다.
안중근(1879~1910)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무를 사살하고 러시아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일본 경찰에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 의사와 독립군들의 애국심과 희생이 3.1운동과 독립으로 이어진 것임을 우리는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엽서가 있다.
‘대한의사 안중근 공 혈서’라는 제목에 피로 쓴 대한독립이 선명한 태극기를 중앙에 두고 4면에는 안중근 의사 사진을 배치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이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최후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도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는 비어 있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에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다시 떠나온 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한인최초 정착지 지신허 마을 입구에서
지신허 마을 옛터 라는 비문이 있다고 한다.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최초의 한인 마을, 이 비석은 지난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맞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연을 한 가수 서태지가 헌정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그것으로라도 이곳이 한인 최초 정착지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4킬로미터 앞에서 막혀있다. 넓은 들판에 간단한 초막하나 세워두고 임시초로로 사용하나보다. 그리고 가느다란 줄을 쳐 놓고 통행을 금한다. 이곳은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통제구역이란다. 가느다란 줄은 높은 장벽보다도 더 견고해 보인다.
아쉬운 마음을 고이 접어 두고 오대장님의 강의를 들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독립운동가들이 가려고 했던 길, 나라를 위해 목숨과 재산을 다 바쳤던 그 길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찾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하셨다. 우리가 오늘 이분들을 기억하고 알리는 역할이 또 다른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는 길 라즈돌리노예역을 찾아갔다.
1937년 한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때 최초 집결지라고 한다. 현재에도 기차 운행은 된다. 시골 간이역처럼 한적하다. 동네 중학생들 몇몇이 놀러 나와 있다. 대합실에 들어가니 텅 비어 있다. 의자 하나 없고 표를 사는 구멍도 한쪽 벽면에 아주 작게 나 있다. 라즈돌리노예역에서 크라스키노까지 가는 길은 1900년대 항일운동의 대표적 인물 최재형이 통역으로 지도하며 닦은 도로라고 하여 더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