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베트남 사파마을을 트레킹하며 만난 풍경.
이른 새벽 사파마을은 상상속의 도시처럼 몽롱하기 그지없다.
해발 1600m 위치 때문일까? 낮게 깔린 구름의 장난일까?
사방을 구름이 휘감은 그곳에서 이른 새벽 눈을 떴으나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구름의 속삭임이 사라지자
눈앞에는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우윳빛으로 감싸던 마을은
한 순간에 온 세상을 푸르름으로 바꿔 놓았다.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물결치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풍경에 첫 눈에 사파에 빠져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침잠과 싸워가며 겨우겨우 일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지에서만큼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알람도 없이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 편이다. 고산지대여서 그런지 한여름 8월의 날씨답지 않게 아침 공기가 너무 상쾌해서 눈앞에 펼쳐진 푸름에 이끌려 1초의 고민도 없이 이불을 박차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세상이 고요할 것 같은 시간에 사파마을은 활기로 넘쳐났다. 어떤 인위적인 에너지의 도움 없이 오로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활력이 사파에는 있었다. 아침을 여는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묘한 감동과 끌림을 느꼈다. 언제 일어나서 이 물건들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걸까?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시장을 빼먹지 않고 가는 편인데 베트남 사파의 새벽 시장은 지금껏 갔던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흔히 동남아 국가 사람들은 더운 나라에 사니깐 게으르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의 편협한 생각이었다. 사파마을 주변에는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들이 많은데 새벽 3~4시에 집에서 출발해 두세 시간을 걸어와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판다고 한다. 직접 기른 농작물부터 손수 키운 닭, 오리, 그 품목들도 각양각색이다. 마침 내 눈에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 회사 유니폼도 아닐텐데 다들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다. 소수민족 중 하나인 자오족들이었는데 검정 천에 색색의 수가 놓인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빨간 천을 신기하게 말아올려 모자처럼 쓰고 있었는데 모자에도 빨간 수술이 달려 어깨까지 늘어져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빨간 머리 앤처럼 보였다.
자오족들은 망태기처럼 생긴 큰 바구니를 지게처럼 메고 다니는데 그 바구니 안에는 100% 수공예품들이 한가득이었다. 심지어 한시도 손을 쉬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한가닥 한가닥 엮어서 무언가를 만들고 한땀 한땀 수를 놓는다. 화려한 색실로 이어 만든 알록달록 모자며, 가방이며, 액세서리 등을 보니 눈이 휘리릭 돌아가고 손이 근질근질해진다. 너무나 곱게 수놓인 크로스 물병가방을 발견하고 나중에 트레킹 때 쓰면 참 좋겠다 싶어 뚫어지게 쳐다봤더니 자오족 여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낸다. 간혹 특별히 유혹하지 않아도 그 섬세한 솜씨에 내가 먼저 아쉬운 듯 눈빛을 보내게 되는데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에는 흥정에서 백전백패이다. 갖고 싶다는 나의 구매 욕구를 눈빛에서 벌써 들켰기 때문에 무조건 지는 게임이다. 비록 흥정에는 실패했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물병가방도 사고 진한 고기육수에 치명적인 향내를 풍기는 고수가 고명으로 얹어진 진짜 베트남 쌀국수를 후르륵 한 그릇 먹고 쫄래쫄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베트남을 여행 중인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사파마을의 또 다른 아침 풍경은 트레킹을 떠나는 여행자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소수민족의 행렬이다. 트레킹 가이드를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귀신같이 알고 열댓 명의 흐멍족, 자오족들이 숙소 앞에 대기 중이었다. 그녀들의 역할은 트레킹을 하는 동안 같이 걸으면서 말동무가 되어준다. “Where are you from?” “What’s your name?” 간단한 영어를 몇마디 쏟아내곤 수줍게 웃으며 사라진다. 아마도 여행자들에게 주워 들은 몇 마디 영어 외에 그녀들은 할 줄 모를 것이다. 한 명이 가고 나면 또 다른 한 명이 다가와서 또다시 반복. 호기심 많은 여행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그녀들의 영어가 한없이 짧지만 나의 영어 또한 한없이 짧고 굳이 언어가 아니더라도 더 진한 언어가 여행지에서는 통하니깐 자연스레 웃고 떠들며 자칫 힘들 수 있는 트레킹을 즐기며 걷다 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같은 풍경에 행복감은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일요시장이 열리는 박하마을의 플라워족.
해발 1600m. 산을 개간해 그곳에 계단식 논을 만들고 지금껏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시골 모습과 흡사하다. 인간의 노력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황홀한 풍경을 보여주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은 타오르고 짭조름한 냄새를 풍기며 비지땀을 쏟아내지만 땅을 걷고 걸으면 걸을수록 기운이 났다.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어 지금 이 순간을 담아 내는데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신기한지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사진구경에 바쁘다. 아마도 특별한 그녀들의 의상 덕분에 여행자들에게 사진 모델은 되었겠지만 정작 본인의 사진을 가진 이들이 없는 듯했다. 함께 걷던 자오족들에게 사진을 찍어 선물했더니 너무나 즐거워 해서 괜시리 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초록의 다랑논과 여유롭게 자리잡은 목조가옥은 스위스 알프스를 떠올리게 했고 동양의 알프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스위스 알프스에 하이디소녀가 있다면 베트남 사파에는 흐멍족이 자오족이 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들의 미소는 사파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아름다운 보석같은 존재들이다.
베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소수민족 중 하나인 블랙 흐멍족.
때로는 길을 안내해주고 때로는 친구가 되어주던 그녀들이었지만 트레킹 마지막에는 철석같이 친구라고 믿었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루종일 단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이야기. 팔찌며, 손지갑, 귀걸이 등을 보여주며 애절한 눈빛과 함께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야생화로 꽃반지를 만들어 선물했던 것도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이 들자 그 배신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호텔 앞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그녀들의 노고를 알기에 지나칠 수가 없어 흥정을 해보려고 했지만 사실 관광객들에게 닳고 닳은 그녀들과 흥정을 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속된 말로 때가 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그 모습들이 귀찮지 않았다. 직접 만든 팔찌를 들고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만약 호텔입구에서부터 팔찌를 내밀고 사달라고 했다면 어쩜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본론은 숨겨 두고 몇 시간 동안 여행자의 마음을 먼저 얻는 장사술에 나도 모르게 감탄해버렸다. 함께 걸으면서 마음을 줘버렸는데 어찌 거절을 할수 있을까? 내 왼쪽 손목이 1달러 팔찌로 가득해졌다. 왼쪽 손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아름다운 사파를 찾는 여행자들이 소수부족들의 화려한 의상에 한 장의 사진은 찍으면서 1달러짜리 팔찌에 인색하지 않기를. 그들의 호객행위에 상업화됐다고 실망하지 말기를. 그러기엔 사파는 너무 아름답고, 소수민족들의 삶은 너무 정직하니깐.
여행팁
△베트남 하노이에서 야간기차(10시간 소요)로 라오까이까지 가서 사파행 미니버스(1시간 30분 소요)를 타면 도착.
△마을 입구 숙소보다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멋진 풍경의 숙소를 구할수 있다.
△인근 소수민족 마을 라오차이, 깟깟마을로 트레킹은 반나절 정도면 충분하고 길도 험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일요일에 사파지역을 방문한다면 박하시장 방문은 필수. 다양한 소수민족을 만날 수 있다.
△박미정
△ 1980년 창원 출생
△합성동 트레블 카페 '소금사막'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