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한 번에 50명 내지 100명씩 승선하고 바다를 가로질러 일본과도 교류하였는데
서기 570년 이후에만 무려 18번의 교류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빈번하게 해상을 이용한 교류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조선 술과 항해 술이 뛰어 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추측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수나라에서 고구려를 침입해 들어올 때 무려 800 명이 동시에 승선할 수 있는 '오아 五芽'라는 배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와 겨룰 정도면 고구려의 배도 보통 크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항해술과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는 천문학인데 고구려는 이 분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 하였다. 일본 나라현 아스카 촌에서 발견된 기토라 고분에서는 현무, 백토, 청룡, 주작 등 사신도와 함께 천문도가 남겨져 있다. 작은 석실 천장을 365개의 금박을 입힌 별들과 그것들을 연결한 북두칠성, 견우, 직녀, 전갈, 오리온 등의 68개의 별자리가 가득 채우고 있는데 서기 700년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천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천문도의 관측 지점을 분석한 결과 아스카 촌이 위치한 북위 34도 지점 이 아닌 북위 37도 지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위치한 지역의 위도와 일치한다. 아스카 촌에서는 볼 수 없는 별자리들이 이 벽화 속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그 위치를 추정한 것이다. 이를 보았을 때 이 천문도의 원형이 별도로 존재했고 그것은 고구려에서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분을 발견한 일본의 학자들도 당시 일본이 그러한 천문도를 그릴 역량이 못 되었으며 대체적으로 고구려에서 전해진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실제 고구려는 뛰어난 천체 관측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 벽화에는 별자리 밝기에 대한 구분이나 정확한 관측에 의한 성수도( 星數圖) 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반면에 고구려의 진파리 4호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밝기에 따라 별들의 크기가 다르게 묘사 하는 등 중국과 비교해서도 고구려의 천문학은 상당히 앞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