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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소양로 일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생활장인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11.9~2017.12.31. 이때 생활장인학교의 취지와 자신의 프로필을 작성하는 시간이 있는데, 아래의 글은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의 카페지기인 저 이 박사가 예시로 작성한 것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강의가 있으니 참여해 주세요. 생활장인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표인 소양로 강동대장간 박경환 강지영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참 열심히 살아가는 부부입니다. 여러분이 응원하고 참여하면 힘이 되어 정말 밤새워 일하는 일등 한국인의 자랑이고 세계의 명소로 거듭날 겁니다.^^
생활장인전승학교
1.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누가 나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참 할 말이 많을 겁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거든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누군가 ‘어떻게 살아왔냐고’ 나에게 물으면 대답이 참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누군가 말하는 우뚝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많이 다녀서 전문인이 된 것도 아니고, 고위공직자도 아니고, 운동을 잘 하여 이름 난 사람도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정치인이나 사기꾼, 텔레비전 속에서 화려하게 살아가는 방송인도 아니랍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사람을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일의 대가를 비싸게 지불해 주는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세금 내서 그들을 살게 해 주니까요.
최소한 우리는 대기업처럼 큰 사업은 아니지만 우리들만의 보람된 일을 해 왔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만 평생을 매달렸어요. 더군다나 남을 속이지도 않았고, 내가 일한 만큼 벌어서 자식들 키우고 식구들 먹고 사는 게지요.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만 매달렸어요. 어쩌면 누군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물려받았고요. 누군가는 우연히 어려서부터 하던 일을 여태하고 있는 게지요. 또 누군가는 이것저것 하다가 적성에 맞는 일을 택하기도 했답니다. 대부분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였어요. 그 세월이 흐르면서 세월만큼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한다고 자부합니다.
요즘 하는 애기 중에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입니다. 매일 3시간씩 훈련을 한다면 약 10년이 걸리고 매일 10시간씩 투자 할 경우에는 약 3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말입니다.
“저는 생활의 장인(匠人)이랍니다.”
참 떳떳한 내 삶이었으니까요. 나는 그야말로 이름 없는 무형문화재입니다. 지금은 호화로운 기술에 밀려 사라져 가는 일들도 많습니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로봇이 사람을 앞질렀다고 할까요. 얼마 전 있었던 알파고와 인간이 바둑내기를 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알파고-제로”라는 더 진화된 ‘인공지능 시스템’이 나와 스스로 터득한 규칙만으로 100대 0으로 승리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문명의 기술에 많이 놀랍니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복합현실 등의 환상과 실재가 합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참 세상 많이 달라졌지요. 정말 우리의 눈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술이 발달해도 우리 손이 필요한 삶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룬 것들의 의미는 더 가치가 있습니다. 기계와 인간은 참 많이 다릅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계도 인간이 잘 다뤄야 하듯이 기계를 만지는 인간의 손끝은 참 무한합니다. 바로 그 손끝을 가진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생활장인(生活匠人)이라고 부릅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식품을 만들고 옷을 다듬었지요. 그 손끝의 움직임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생활 속에서 숙달되어 장인이 되었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참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오늘을 만들었고, 또 오늘의 노력이 멋진 내일을 기약할 테니까요.
2. 우리 마을 새롭게 가꾸어요.
우리가 여태 살아온 마을은 우리의 삶터였습니다. 세상천지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바로 무릉도원이고, 이상향이지요.
누군가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 살고 있어요?”
“나는 소양로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떳떳하게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을의 주인이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듯이 우리는 우리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 볼까요.
“당신은 어디 살고 있나요?”
“그게 저 춘천 ….”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순간 우리 마을은 외계의 마을이 되고 말지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 말입니다. 그 순간 내가 살아온 마을에 대한 자부심은 사라지고 맙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마을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재개발의 대상이 되고,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 되는 겁니다.
마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마을을 존속하게 하고 더 아름답게 해줍니다. 관심을 가지고 마을을 가꾸면 달라집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을을 세계 최고의 마을로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마을을 세계 곳곳에 알리는 겁니다.
참 좋은 사례가 많습니다. 대구에 가면 ‘근대로의 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전주에 가면 ‘한옥마을’을 만나게 되고요. 군산에 가면 ‘근대문화역사의 거리’가 있고요. 부산에 가면 ‘감천문화마을’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들 그 지역에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살렸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부각한 것이지요. 요즘 여러 시도에서 행하는 도시재생사업이라는 결과물입니다. 원래 있던 것에 색깔을 입혔습니다. 어떤 색이냐고요. 바로 그곳에 원래 있던 과거로의 삶이 주는 매력의 색깔이었지요.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가 현재에 돌아오면 됩니다.
소양로가 주는 이미지는 좋습니다. 바로 춘천인이 살았고 한국인이 살았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참 멋진 사람들의 삶이 흩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과거의 모습을 찾아 현대에 이을 수 있는 곳입니다. 왜, 대구, 부산, 군산, 전주와 같은 마을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요.
우리가 마을을 꾸미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은 어디 살고 있어요?”
“나는 그 멋진 소양로에 삽니다.”
자부심과 부러움이 함께 깃든 대답이 나오게 될 겁니다.
3.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가꾸어요.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살았나요?”
“….”
참 대답이 막막해 집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위해 산 적이 없었거든요. 향상 삶의 중심에는 나보다 자식들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굴레가 언제나 나의 희생을 강요했으니까요. 우리는 그런 삶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라. 배려해라. 참아라. 착하게 살아라. 효도해라. 봉사해라.’
모두 희생을 강요하는 말들입니다. 한순간도 삶의 중심에 내가 놓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가진 능력과 재능과 기술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냥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나라에 희생하면서 사는 게 당연한 인생으로 생각했지요. 열심히 일하는 목표가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만 평가되었습니다.
이제 바꾸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살 건가요?”
“나는 나를 위해 살 거예요.”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살았나요?”
“나는 나를 위해 살았어요.”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결코 내가 살아온 목표가 자식을 위한 것도 가족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웃을 위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가꾸기 위해 생활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 가족을 먼저 생각한 것은 공동체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함께 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희생당한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나를 위한 삶인가요?”
이렇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
아마도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내가 번 돈은 나를 위해 먼저 써야 하나요. 가족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번 돈으로 여행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좋은 옷을 사 입어야 할까요. 살다가 싫으면 언제라도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야 나를 위해 산 것인가요. 가족과 함께 했기에 오늘의 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중심에 우리의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함께 부대끼며 산 세월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지요.
이젠 나를 나답게 만든 일을 자랑스럽게 풀어 써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의 최고경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바로 생활의 장인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우리의 일을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참 자랑스럽게 얘기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았어요. 내가 이 방면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요. 이 재능을 자랑스럽게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요.”
이렇게 마음먹는 순간, 당신은 참 멋진 사람으로 바뀔 겁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과 국가가 더 고마운 존재가 될 겁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 더 예쁠 것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생활장인 개개인의 이야기(홍보, 관심, 자긍심유발)-자서전 쓰기
1.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ㅡ 희생
2. 세상의 중심은 나 - 人乃天, 천상천하유아독존, 변화
3. 나는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 – 잠재의식, 장인정신, 실천
4. 나의 멋진 삶,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 자부심 공유
프로필 쓰기 순서
1.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2. 나는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3. 나는 이 일을 얼마동안 했나
4. 이 일의 매력은 무엇인가
5. 일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실패이야기와 성공이야기
6.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주는 특성과 장점 찾기
7. 내가 하는 일의 보람 찾기- 도움과 배려, 가족의 관계
8. 이웃과의 훈훈한 정 나누기
9.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 장인으로서의 긍지
10.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어- 최고임을 나타내는 말
11. 나와 나의 일을 한 마디(줄)로 나타낸다면 –간판에 붙일 문구
프로필 쓰기(예시)
1.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① 기본설명
“소양로 옷 수선”
우리 가게 간판 이름입니다. 간판만 보면 제가 하는 일을 알 수가 있어요. 입다가 해어진 옷이나 새로 산 옷의 기장 등을 줄여주는 일을 하지요. 옷 수선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도 알고요.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② 사회적(손님과의) 역할
참 많은 사람들이 제 손끝을 지나간 옷을 입고 바깥출입을 한답니다. 외출을 할 때 자신 있게 자기를 내세울 수 있게 하지요. 그런 옷을 나는 원래처럼 또는 사람들 각자의 몸에 맞게 해주는 일을 한답니다.
2. 나는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① 당시 사회상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오래 되었습니다. 약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0년 초였지요. 그때 우리나라는 도시의 팽창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농현상으로 농촌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일시에 쫓겨나 갈 곳을 찾으면서 일어난 일이지요. 동시에 산업화 바람이 불었습니다. 수출이라는 미명 하에 젊은 사람들은 모두 구로공단과 마산방직공장 등지의 공단으로 갔습니다.
② 생활장인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
저는 그때 구로공단에서 옷을 만들어 파는 봉제공단에 들어갔습니다. 남매들이 많아 진학을 한다는 것은 한낮 꿈이었지요. 현실은 꿈을 이루어 주지 않았습니다.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서울로 갈 때 저도 보따리를 싸서 친구들을 따라 갔습니다. 세상이 뭔지 전혀 모를 때였지요. 16살이었으니까요.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나이입니다. 그때 유행가 중에 <앵두나무처녀>라는 노래가 많이 불러졌습니다. 그 노랫말 마냥 우리는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구를 따라서 보따리를 쌌지요.
③ 가족의 생계와 나의 결실 – 피땀의 결실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피곤하고 졸리면 잠 안 오는 약을 먹었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먹던 약이었습니다. 그 약을 먹고 이틀 밤을 새고 나면 눈은 깨어 있는데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요. 국가산업의 역군이라나요. 국가에서는 연일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현장에서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렇게 일을 하고 받는 월급은 참 값진 돈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그 월급은 시골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큰돈이었습니다. 동생들 학비며 생활비에 충당이 되었으니까요. 비록 제가 그 공장에 처음 들어가서 몇 년간 번 돈은 그렇게 썼지만, 제가 오늘까지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간혹 중간에 악덕 사장으로부터 돈을 떼이기도 하고 일한 만큼 월급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3. 나는 이 일을 얼마동안 했나
①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
제가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다보니 어느 덧 결혼을 할 나이가 되더라고요. 저는 저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쉽게 나의 바람을 이뤄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당시 사회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는 아니었지만 성실했어요.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했지요. 나이는 어렸지만 제 몸뚱이 하나는 밥 굶기지 않겠더라고요. 남편은 결혼 후 뭔가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해서 춘천에 있는 카센터 보조원으로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매일 새카맣게 기름 묻은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제가 가면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그런데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겨우 셋방에 살면서 아껴 써야 둘이 굶주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게다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까지 생겼어요. 돈이 필요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그동안 익혔던 봉제기술을 써서 일을 시작 했어요.
② 일을 다시 시작하다
그때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있어서 옷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많았어요. 가게를 차릴 돈이 없으니 남의 양장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나마 남편과 제가 둘이 버니 살림이 조금은 나아졌어요. 양장점 구석에 젖먹이 아이를 눕혀놓고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옷 먼지 나는 그곳에 아이를 두었다는 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으니까요. 남편과 저는 너무나 절실했어요. 우리 아이만은 지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거든요. 돈이 없어 아이를 학교에 못 보내는 우리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③ 기술을 완벽하게 익히다- 일의 고비를 넘다
제가 양장점에서 일을 한지도 꽤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옷을 만드는 일을 모두 익힐 수 있었어요. 재단이며 디자인 등 여성들이 원하는 옷은 뭐든지 만들 수 있었지요. 기술이 느니 자연히 봉급도 많아지고요. 이 방면에서는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남편도 오래도록 일을 하다 보니 기술이 늘었습니다. 처음 카센터 보조로 일하면서 받던 설움을 씻어낼 수 있었지요. 남편은 카센터 사장의 무시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행패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몰랐어요. 남편이 사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하고, 욕설을 듣는 장면을 볼 때 정말 혼자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아마도 가족의 힘으로 남편은 그 모진 세월을 참을 수 있었을 겁니다. 사장에게 맞아 이마에 난 상처를, 집에 와서 저에게는 일하다가 다친 것이라 말하더라고요. 그냥 아무 말 없이 둘이 손을 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몇 번이고 저는 남편에게 그 일을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감싸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힘든 세월을 이겨냈습니다. 막상 다른 일을 할 게 없었거든요. 이제는 남편도 어엿한 자동차공업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둘이 열심히 일한 대가였습니다. 회사가 크지는 않아도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전 항상 남편에게 말합니다. 힘든 시절 잊지 말고, 사원들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라고요.
저는 남편이 카센터에서 당하는 핍박을 보면서 더 이를 악물고 일을 했어요. 아이의 아빠가 겪는 설움에 비하면 저는 대접받는 일이었거든요. 다행히 제가 일하는 양장점의 사장님은 따뜻한 분이었어요. 가족처럼 저를 대해주었습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보면서 저는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어요. 기계화가 이뤄지면서 대량 생산하는 기성복이 옷 시장을 잠식했습니다. 기성복은 맞춤보다도 예쁘고요, 시대의 유행을 이끌어 갔습니다. 차츰 맞춤옷을 원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양복점과 양장점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물론 제가 다니던 양장점도 폐업을 했지요.
4. 이 일의 매력은 무엇인가
① 숙달된 기술은 영원하다
우리 가족은 어느 정도 살만했습니다. 남편과 제 봉급도 오르고 아이들도 병 없이 말썽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었으니까요. 참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일을 그만해도 남편의 수입만으로도 생활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꿈이었던 아이들 학교 보내는 것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회적인 변화의 덕택이라 할까요.
양장점이 문을 닫은 후 몇 년간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경제력에 만족 한다는 것보다도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하잖아요.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이 좀 어려운 옷 수선이 있으면 저에게 와서 부탁을 해요. 저는 그냥 제가 잘 하니까 해드렸지요. 모여서 수다도 떨고, 옷 수선을 맡기고 고맙다며 가져온 과일을 깎아먹으면서 말입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저를 만나면 이야기 했어요.
“야, 그 좋은 기술 두었다가 뭐할래. 무덤 가져갈 거야.”
저는 친구들이 던지는 말에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보았어요. 참 많은 세월 동안 저를 따라 다닌 일이었어요. 옷 수선을 하고, 옷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저에게는 참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오늘까지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한 기술이었지요. 바로 생활 속에서 터득한 기술이었어요.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 제가 계속 옷 수선을 하였지요.
② 일에서 나라는 존재의 매력을 느끼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옛날 아주 오랜 옛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에 나가 낙엽을 쓸었습니다. 그때였어요. 싸늘한 늦가을이었지요. 홑바지에 홑적삼을 입고 추위에 덜덜 떨며 저와 같이 마당을 쓸던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은 왜 세상에 태어났어요?”
참 의아하게도 저는 할아버지께 그렇게 물었지요. 저는 할아버지께서 뭔가 아주 멋진 말씀을 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의외였어요.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단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순간 마당에서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 모으는 것이 정말 싫었는데, 글쎄 일하기 위해 사람이 태어났다니요.
“픽! 뭐 그래?”
저는 그렇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답에 콧방귀를 뀌고 말았습니다. 사실 어린 나이인지라 일이라는 중요성을 몰랐거든요. 우리 인생에서 일은 참 소중합니다. 다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지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제가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 손자들이 나에게 물으면 저도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옷 수선은 저에게 있어 하늘이 내린 일이 되었습니다. 천직(天職)이란 이럴 때 하는 말일 겁니다. 처음에는 어쩌다가 시작했고, 중간에는 아이들 키우고 먹고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천직이 된 것입니다.
제가 옷 수선을 하는 동안은 정말 행복합니다. 가위질을 하고, 재봉틀을 돌리고, 한 땀씩 바늘로 옷자락을 기워 나가다 보면 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바늘과 실의 매력이라 할까요. 아니면 저와 일의 매력이라 할까요. 찰떡궁합이 따로 없어요. 일을 하는 순간 저는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잊습니다. 세상 천지에 이 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요.
오늘처럼 쌀쌀한 가을이 되면 홑옷을 입고 추위에 떨던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정말 따뜻한 솜옷이라도 한 벌 제 손으로 해드리고 싶습니다. 잔칫집에서 허름한 홑옷 주머니에 넣어 가져오셨다가 손주들에게 사탕 한 알을 꺼내 주시며 흡족히 웃던 모습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당신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기일이 되면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찾아뵙겠습니다.
5. 일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실패이야기와 성공이야기
① 몇 달 수입에 해당하는 옷 두 벌이 생기다
“이거 어떻게 해요?”
옷 수선을 맡겼던 손님이 당황해서 한 말이었어요. 제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옷을 찾아갔던 손님이 다시 그 옷을 들고 찾아왔지요.
“….”
저도 할 말을 잊었습니다. 헷갈린 것이었어요. 너무나 잘 한 수선이 그만 다른 사람의 옷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싼 모피 옷이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
두 사람의 몸이 다른데, 저에게 맡긴 모피 옷은 비슷한 색깔에 비슷한 재질이었던 것이었지요. 그렇다고 비슷한 재질의 색깔이니 서로 교환해 입으라고 할 수도 없었지요. 애초에 크기가 다른 옷이었지만, 손님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잖아요. 순간 앞이 깜깜했어요.
“어떻게 하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말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옷에는 옷에 딸린 개인의 추억과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변상을 한다고 그 추억과 사연이 오롯이 딸려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물한 옷일 수도 있고요, 자녀들이 칠순이나 팔순 때 선물로 준 옷일 수도 있어요. 도저히 변상과 책임은 있을 수 없거든요.
정말 난감했습니다. 물론 다른 옷의 주인공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새 옷을 입는다는 설렘보다도 누가 선물로 준 옷을 입는다는 느낌이 더 크잖아요. 이미 크기를 잘라 재봉한 옷이기 때문에 다시 할 수도 없었어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황당하고 앞이 노랗게 보입니다. 그 일로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교훈이었지요.
②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다
옷 수선을 하다가 보면 가끔 찾아가지 않는 옷이 있습니다. 미쳐 연락처를 적어놓지 않아서 연락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금방 찾으러 온다거나,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저 알지요.”하면서 안면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일종의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일 년 또는 이 년이 지나서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지만 대략 일이 년이 지나면 수선을 맡긴 것을 잊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 어디 사세요?”
아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보자기를 들고 길을 헤매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한 눈에 봐도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무엇인가 든 커다란 보자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 우리 딸네 집을 찾는데 어딘지 모르겠어.”
“주소가 어디인데요?”
“주소를 잊었어. 춘천 어디라고 했는데. 아무리 다녀도 모르겠어.”
을씨년스런 날씨는 딸을 찾으려 길을 헤매는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만큼이나 춥게 느껴졌지요. 할머니가 들고 있는 커다란 보자기에는 딸이 좋아하는 음식과 산나물 등을 잔뜩 넣어 무겁기도 했어요.
“할머니, 우리 가게가 저기 보이는 데인데. 일단 같이 가요? 너누 추워요.”
저는 길을 잃고 헤매는 할머니를 데리고 옷 수선 가게로 들어왔어요. 우선 따뜻한 연탄난로 옆에 할머니를 앉히고, 보글보글 끓는 주전자의 물을 한 잔 드렸지요. 참 고마워했습니다. 너무나 순수하게 고마워하던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찾아가지 않는 할머니한테 어울리는 겨울 겉옷이 있어 드렸습니다.
“할머니 날씨가 많이 차요. 이 옷 입으세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
그만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고마워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더라고요. 나중에 경찰서에 연락해서 딸을 찾았고요. 길을 잃었던 할머니는 무사히 딸집에 갈 수 있었어요.
그러고 며칠이 지난 뒤 그 할머니는 딸과 같이 우리 가게를 찾아왔어요. 그날 할머니가 들고 있던 보따리 속에 있던 과질을 따로 싸서 들고요.
“아기 엄마, 고마워요. 옷이 너무 따뜻해요.”
물론 그 할머니의 딸은 제 옷 수선 가게에 단골이 되었고요. 지금도 가끔 찾아온답니다.
6.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주는 특성과 장점 찾기
① 옷이 날개야
“옷이 날개야.”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말입니다. 떨어진 옷, 해어진 옷, 유행이 지난 옷, 몸에 큰 옷이거나 작은 옷은 입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로 옷이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 때문이지요. 첫인상에 대한 가장 큰 효과가 바로 시각적 이미지에서 비롯하는 것도 다 아실 겁니다. 비록 얼굴에 뼈가 강하게 나타나거나 혐오감을 주는 사람도 옷을 어떻게 입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주 부드럽거나 따뜻한 인상의 사람도 옷에 의해서 그 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기성복은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맞춤옷이나 수선을 통하면 그 사람의 체형에 맞추어서 옷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답니다.
저는 옷 수선을 하면서 늘 손님들께 “날개옷”을 달아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수선한 옷은 그 사람에게 날개옷이 되어서 원하는 곳까지 훨훨 날아 갈 수 있을 겁니다.
② 내 몸에 딱 맞네
크거나 허름한 옷을 가져와서 수선을 부탁하는 손님이 가끔 있지요. 부모님이 입던 옷이나 누나 형이 입던 옷을 가져와서 자기 몸에도 맞고 유행에도 뒤지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못 할 게 없잖아요. 제가 장인인데요. 그러면 손님의 몸 치수를 재고, 옷을 다시 재단을 하고, 박음질을 합니다. 물론 유행을 앞서갈 수도 있지요. 손님만이 입을 수 있는 세상에 유일한 옷을 만드는 겁니다. 멋지잖아요. 그러면 손님은 제가 수선한 옷을 입어보고는 한마디 합니다.
“내 몸에 떡 맞네.”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참 좋아요. 왜냐면 제가 손님에게 뭔가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7. 내가 하는 일의 보람 찾기- 도움과 배려, 가족의 관계
①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아무리 비싼 옷을 수선하는 데도 저에게 오면 같은 값을 받습니다. 옷 수선의 매력이지요. 물론 수선 위치나 재질에 따라 값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선할 옷의 원래 값으로 비용을 매기지는 않지요. 어쩌면 이것이 옷 수선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참 평등하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있으니까요.
② 이웃과 가족에 도움을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요. 그렇게 일이 끝나면 사는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요. 일이 주는 행복이라 할까요. 보람과 행복, 이 단어가 오늘 저를 생활장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쓰고 싶은 곳에 돈을 쓸 수 있어 좋습니다. 많은 돈은 벌 수 없어도 얼마든지 제가 제 힘으로 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불쌍한 이웃에게 적은 돈이나마 도울 수 있고요. 또한 우리 가족들에게 제가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이나마 사 줄 수 있습니다. 가족은 정말 소중하잖아요. 함께 부대끼고 사랑하잖아요.
또 저를 좋아하는 친구와 이웃에게 제 재주를 기꺼이 나눠줄 수 있어 좋습니다. 수선은 물론이고 수선하는 방법을 알려줄 때 참 기분이 좋습니다.
8. 이웃과의 훈훈한 정 나누기
① 이웃사촌
“소양로 옷 수선”은 제 개인의 가게이기도하지만, 소양로 공동체의 가게이기도 합니다. 제 혼자 소양로에 있었다면 얼마나 싸늘했겠어요. 이웃이 있기에 저도 있습니다. 그렇듯 제 가게도 이웃 가게가 있어서 지금껏 버틸 수 있었지요. 비록 하는 일은 다르지만 참 좋은 이웃들입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보고,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웃의 어느 누가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렇게 우리는 친 형제자매처럼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대소사를 함께 하고, 자신의 재주와 기량을 맘껏 나누며 삽니다.
이웃은 좋은 면만 보이고, 서로 칭찬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헐뜯는 장면은 우리의 이웃과는 거리가 멉니다.
② 마을을 가꿀 수 있는 공동체
얼마 전 마을을 가꾸면 나와 이웃이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 대구의 ‘근대로 거리’, 부산의 ‘감천마을’, 군산의 ‘근대문화유산거리’,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말입니다. 모두 우리가 살아온 멀지 않은 뒤안길을 부각한 것이지요.
또 문경새재의 ‘과거길’, 제주의 ‘올레길’도 우리가 살아온 멀지 않은 삶의 언저리들입니다. 좀 더 느리게 근대화를 맞이한 마을이고 길입니다. 옛 것을 지나 간 유물로 취급해서 버리지 않고 아름답게 꾸민 결과물입니다. 기억을 되살려 과거로 여행을 한 것이지요. 시공세계를 만든 것입니다. 3차원의 시공에 4차원의 시간을 끌어오면 쉽게 이루어지는 광경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이동을 하면 됩니다.
저는 그래서 소양로의 과거로 여행을 해 보았습니다. 그 여행의 중심지는 바로 제 일이었고, 제가 살았던 추억이었습니다. 저를 더욱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었어요. 소양로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함께하면 정말 멋진 마을이 될 겁니다. 우리 일이 빛을 보게 되지요. 우리 일이 자랑스럽고, 우리 일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고, 소양로의 썰렁한 거리에는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고 활기가 넘치는 거리로 바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이웃이 함께 하면 대한민국이 함께하는 소양로가 될 것입니다.
9.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 장인으로서의 긍지
① 나는 장인이야
“나는 장인(匠人)이야.”
“장인이기 때문에 명품을 만들 수 있어.”
저는 이렇게 제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제가 수선한 모든 옷은 제 손끝으로 만든 명품이니까요. 누가 뭐래도 최고의 생활장인이 만든 명품입니다. 어쩌면 제 스스로 최면(催眠)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게 최면이라면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존귀하게 생각해야 남이 나를 존귀하게 여긴단다.”
제 어머니가 나와 형제들에게 들려주던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면 남도 나를 천하게 여긴다는 말이잖아요. 이 세상 누구나 자신의 삶이 천하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천한 존재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지요. 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높여주는 그런 사회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어느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먼 옛날로 돌아가서 그때의 계급사회를 말하면 안 됩니다. 백 년 전 딴따라가 이제는 최고의 인기인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연기 잘 하는 인기인으로 안방극장에서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돼 있잖아요. 바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배경에는 스스로를 딴따라에서 연예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생활했기 때문이지요.
어디 딴따라뿐인가요. 장삿꾼과 공장이라고 천하게 여기던 그들이 이제는 사업가로 발명가로 기능인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세월은 변합니다. 세월이 변하듯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게 돼 있습니다.
10.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어- 최고임을 나타내는 말
① 옷 수선, 난 당신에게 날개옷을 줄 수 있어요. 내가 수선한 옷을 입고 그이를 만나러 가보세요. 꼭 소원이 이뤄집니다. 마법의 옷 수선 집.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② 옷- 옷이 날개야
수- 수선은 나에게로
선- 선녀로 만들어 줄게
11. 나와 나의 일을 한 마디(줄)로 나타낸다면 –간판에 붙일 문구
(모든 스토리텔링은 디자인이 결정합니다. 간판과 글자를 꾸미세요.)
① 선녀를 찾으러 하늘로 가지 않을래요. 날개옷을 달아드립니다.
- <선녀와 나무꾼>설화
② 나비처럼 훨훨, 당신의 꿈을 이뤄줄 그 옷 수선 집
-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③ 설빔, 추석빔, 단오빔, 엄마가 만들어준 추억의 때때옷.
- 명절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