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 저 이제 안 울 거에요!”
“수녀님, 제가 친하게 지내는 젊은 교수님이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인데 세례에 관심 있어 하세요. 혹시 방문 가능할까요?” 본당 모니카 자매님의 전화였다. 그분을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안타까움에 울어버리고 싶었다. 사십 대 초반 너무 젊은 나이와 한없이 선해 보이는 모습에, “하느님 왜요?”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다.
나도 적극 세례를 권유했다. 그런데 주소지가 다른 성당 관할구역이라 해당 성당과 수녀님을 찾아 소개해드리고 나는 기도 안에서 쾌유를 빌며 아주 드물게 만났다. 성실하게 교리를 받고 교수님은 아우구스티노, 부인은 카타리나, 두 남매와 더해 4인 가족이 모두 영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폐암은 기침하는 것도 때론 숨을 쉬는 것마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다는데 그분은 정말 초인적인 모습으로 투병에 임했다. 그렇게 일 년 반, 마지막이 된 그 해, 오월의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 세상을 수놓을 때, 그분은 그 꽃들보다 더 환하게 웃으신 뒤 총총 하느님께로 떠나가셨다. 장례미사 전후, 젊은 자매님 그리고 한참 양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 두 남매와 남은 인생살이를 어떻게 살아내실지 장례미사를 하면서 나도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사별의 고통은 적어도 삼 년 이상 간다고 들었다. 그런데 반년도 채 안 된 어느 날 자매님이 말했다. “수녀님 저 이제 안 울 거예요” 말보다 눈이 먼저 묻고 있는 나를 향해 그분이 말했다. “수녀님 제가 왜 우는지 알아버렸어요. 남편이 얼마나 살고 싶어 했고, 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투병 생활을 했는지 내가 옆에서 다 보았는데. 그렇게 떠난 사람을 안쓰럽고 그리워 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 인생 자녀들과 어떻게 사나 내 연민과 걱정에 빠져 울고 있더라구요. 이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 사람에게 정말 미안해서 이제 안 울거예요” ‘아! 젊은 자매님 통찰이 이렇게 탁월하다니... 이 분은, 이 자녀들은 앞으로 잘 되겠다. 성공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건강하게 사시겠다.’라는 확신이 왔다. 자매님은 눈물 대신 열정과 투신을 선택했다. 늦게 만난 하느님의 손을 꼭 잡고 놓치 않았으며, 심리 상담공부를 시작하더니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상담사로 맹활약중이다. 그 어린 자녀들도 남 부럽지 않게 잘 되었다.
이즈음 나이를 좀 드니 주변에서 병고와 귀천 소식이 많이 들려 온다. 자신의 인생과 신앙 길에 너무나 큰 영향력을 주고받던 부모,배우자,자녀,친지,친구와 헤어지고 떠나보내는 상실의 아픔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형용할 길이 없다. 또한 그 슬픔과 고통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런 현상이고 감정이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슬픔과 고통의 소용돌이를 빠져 나오지 않으면 그 자신만 더 힘들고 아프고 상한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성사聖事’라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교회가 가르쳐 준 이 숭고하고 장엄한 의미에 압도되었다. 인생의 생노병사가 하느님이 주신 선물 성사聖事다. 하느님이 주시고 하느님이 거두워가신다. 주실 때도 고맙고 거두워 가실 때도 겸허하고 고맙지 않을 까닭이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가버린 날들보다 짧아진 남은 날들이다. 그마져 이 날들도 속속 화살처럼 시위를 떠나 사라지고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남은 날을 슬픔과 고통으로 탕진하지 말고 알뜰살뜰 챙기며 살 일이다. 앞서 떠나가신 분들도 남은 분들을 향해 그렇게 살아가길 오매불망 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첫댓글 오늘은 나 내일은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