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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21대 영조, 사도세자의 사건,,
| > 사도세자 사건, >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 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 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 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 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영조의 업적,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술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 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탈세를 방지했다. 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이정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 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 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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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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