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공의 사유와 여래의 사실
공의 사유는 불교 벗어나 검토된 적 없어
여래는 개념화가 안 되는 존재론적 세계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마음의 거울 밝아서 아무 것도 걸림이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사바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여기서 잠깐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을 말하련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가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만을 사유한 역사라고 하여 서양철학을 비판하였다.
흔히 이 말을 철학교수들은 자주 말하나,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동양철학도 기실 하이데거의 풍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다 존재를 쉽게 말하나,
기실 존재가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아서 존재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된다.
모든 철학은 다 존재 대신에 존재자를 언급하기에
하이데거의 말처럼 동서철학이 거의 다 존재의 사유 대신에
존재자라는 어떤 명사를 사유하고 언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존재론적 사유의 망각이고 오직 존재자적인 사유를 그 대신 등장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사유는 곧 공의 사유인데,
이 공의 사유는 그동안 불교를 벗어나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검토되어 본 적이 없었다.
불교 이외에는 다 공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오직 존재를 존재자로서 읽어 왔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읽어야 한다.
공의 사유가 곧 존재론적 사유다.
존재론적 사유는 하늘, 땅, 구름, 해와 달 등을 사유하는
명사적인 존재자적인 사유와 판이하게 다르다.
존재자적인 사유는 개념적인 사유고,
대상이 있는 사유이므로 누구든지 그 의미를 쉽게 간파한다.
그러나 존재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존재론적 사유는
존재가 어떤 대상이 아니므로
무엇을 규정하는 알음알이를 찾는 그런 대상적 물음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존재의 사유를 공의 사유라고 말한다.
여래는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며,
그래서 전혀 개념화가 안 되는 존재론적 세계를 뜻하므로
그냥 여여하게 그대로 사실을 밝히고 기술할 뿐이다.
한국어에는 모든 주격명사를 존칭으로 만드는 ‘님’이라는 접미형이 있어서
사실관계의 명사를 주관적 애정관계의 명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어서
부처님으로 부르나, 한자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그냥 불(佛)이라 부른다.
이 불(佛)은 법(法)의 개념처럼 단순한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이 세상의 법(法)이 곧 불(佛)이다.
우리가 한국어에서처럼 ‘님’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부처는 세상의 여여한 법이고 사실을 말한다.
그 사실은 모양도 없고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닌 여여한 존재방식을 일컫는다.
그 존재가 부처고, 그 부처는 모양(相)도 없고(無相) 공(空)도 없고(無空),
공 아님도 없는(無不空) 그런 여래(如來)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여래의 사실이 곧 바로 부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인격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연의 줄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인연의 줄에 의하여 그와 같이 오게 되었다.
인연의 줄에 의하여 오게 된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흔히 말하는 자생(自生)일 수 없다.
모든 존재방식이 다 연생(緣生)이므로 인연을 통하지 않고
이 세상에 오는 법이 없다.
불법은 이 세상의 존재방식과 같다.
부처는 이 세상의 존재방식을 깨친 석가모니라는 분이다.
그 분이 깨친 이 세상의 법이 불법이다. 불법은 이 세상의 여여한 사실을 가리킨다.
여여한 사실은 내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소유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어리석은 의식이 아니라,
이 세상의 필연성을 여여하게 알고 그대로 놓아두는
비소유의 마음이 불자의 마음임을 안다.
2012. 09. 17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