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한성백제박물관>을 공식적으로 두 번째 방문했습니다.
지난 해 10월, '백제 생활문화의 재발견'을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회원으로 처음 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서울시가 마련한 ‘미리보는 한성백제박물관’ 초대에 응하니 합해서 두번째 방문이 됩니다. ^^^
그러나 남2문 옆, 소마미술관 뒤에 있는 한성백제역사관은 나의 운동과 산책과 조각해설 코스에 속하니까,
공사 시작 때부터 개관을 앞둔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는 날마다 지나다니는 아주 친숙한 곳입니다.
사실 여기 공사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조각작품 <빛의 파종>이 다른 곳(소마미술관 뒤)으로 옮겨지고,
내가 좋아했던 키 큰 나무가 베어지고 (망월봉 옆에 있는 큰나무보다 더 컸습니다.) 해서 처음에는 반감[反感]까지
가질 정도로 못마땅했습니다.
더욱이 소마미술관 뒤 넓은 잔디밭 <대초원>에 서면,
남쪽 하늘을 가리는 역사관의 지상 2층 건물이 너무 답답해, 올림픽공원의 경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높이를 낮춰 짓겠다던 약속을 깬 것이 아닌가, 또 주민들이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의심도 자주 했습니다.
* 건물 모양이 배 같습니까 ?
<한성백제박물관>은 내년 4월 개관을 앞둔 지하 3층 지상 2층의 건물로 백제 관련 국내 최대 규모의 박물관입니다.
전시실은 3개,
서울의 선사문화와 백제의 건국이야기 , 한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이 각축을 벌인 역사가 주제가 됩니다.
물론 유물과 체험, 디지털 영상 등을 배치하고, 풍납토성, 석촌동고분군과 함께 백제문화벨트를 조성할 예정입니다.
백제의 역사는 조선 518년의 역사보다 보다 훨씬 긴 678년간,
그 중에서 493년 동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 이 곳 송파가 백제의 서울이자 중심인데,
한국 사람들은 한[限]이 많아 그런지 망국의 역사가 있는 충남 부여만 백제의 서울인 양 착각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해마다 송파구청에서 주관하는 <한성백제문화제>가 열리고 있지만,
500년 한성백제의 역사는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데, 한성백제역사관이 그 막중한 역할을 맡겠다고 하니 기대감이 자못 큽니다.
박물관 옥상은 몽촌토성 길을 형상화 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벽은 풍납토성의 축조방식인 판축법을 응용하여 '슬레이트 패널'(*점토가 수억년 동안 압력에 눌려서 만들어진 돌인 철평석을 켜켜이 쌓아 만든 천연석 석재) 로 풍납토성 성벽을 재현했는데,
건물의 전체 모양은 '해양왕국 백제'를 상징하는 선박과 같은 형체입니다.
건물 위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공간을 선박의 연돌(굴뚝) 모양으로 만든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리보는 한성백제박물관’ 입구는 백제를 상징하는 칠지도와 청동초두, 세발토기 등의 유물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네 평 정도의 전시실 사방 벽에 백제와 관련한 역사들이 손님을 맞이합니다.
앞서 다녀간 손님들이 작은 메모지에 인삿말을 써서 붙여 놓았는데, "독도는 우리 땅 !!" 도 있었습니다. ^^^
그리고 가운데에 놓인 유리상자 속에는 석촌동에서 10여명의 백제인들이 적석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놓았습니다.
무덤 속을 흙으로 채우는 것을 보니 고구려식 3호분은 아닐 테고, 백제식 4호분 아니면 2호분이겠지,
얕은 지식 꺼내 들고 혼자 웃으니 재미 있습니다. ^^^
안내 팸플랫에 있는 글대로,
사방 벽은 2000년 서울 역사의 기반인 선사문화부터 한강과 황해를 무대로 동아시아 의 허브 역할을 한 한성백제의 문화,
백제에 이어 한강을 차지한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그림과 설명이 역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물 ‘위례를 바라보다’는 2천 년 전, 온조와 비류, 어머니 소서노가 북쪽 고구려에서 한강 유역에 내려와 풍납토성
일대에 자리 잡기까지의 힘든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백제를 찾아서’는 오랜 시간 땅속에 묻힌 백제의 초기500년 수도가 서울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었음을 밝히려 애쓴 흔적을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로 담아서 알기 쉽고 흥미로운 역사로 재현해서 이해가 쉬웠습니다.
* 쇠부뚜막 진열창 앞에 누가 서 있네요. ^^^
2개의 작은 진열장에는 내년 개관 후 전시할 고대 유물의 일부를 먼저 선보였습니다
‘백제의 장신구’ 코너(6점)는 백제 한성도읍기의 귀족들이 쓰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을 전시했습니다.
관(冠)은 공주나 부여에서 출토된 것과 달리 고깔이 있고 용(龍)도 새겨져 있어 금빛이 아름다웠습니다.
신발은 달개는 없고 바닥에 스파이크만 박혀있는데,
장식은 화려하지 않지만 빈공간 없이 복잡한 문양을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라는 설명입니다.
‘계획도시 한성의 생활문화’ 코너(10점)에서는 그동안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내용을 토기, 쇠 부뚜막, 용봉문환두대도 등의 유물과 함께 소개했는데, 토기 3점은 그동안 시민들로부터 받은 기증 받은 유물 중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쇠부뚜막을 보니까 작년 학술대회 때, 백제인들이 독[毒]이 위험한 복어도 먹을만큼 미식가였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금동관모와 신발은 머리에 쓰거나 발에 신을 수 없지만,
목 짧은 단지에 물을 담아와, 쇠로 만든 부뚜막에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복매운탕을 끓여 먹으면 백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오늘은 직접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 국내성(평양)에서 태어나 백제 한성 땅에서 오래 살고 있는 나는 분명 백제인이 틀림 없습니다. ^^^
역사박물관 앞 너른 마당에는 내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별명을 붙인 조각작품 <증인 Ⅲ>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조각가 알로이스 뒤바크의 작품입니다.
키 큰 금고 위에 놓인 작고 두꺼운 금고들,
점점 한쪽 부분이 깎여져 나가고, 캐비넷처럼 생긴 금고들은 문이 열리고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백제를 상징하는 작품 같아 어쩐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합니다.
뒤바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 열린 육면체는 금고를 나타내는데, 이 금고는 작가가 미리 설정한 어떤 기능이 없다.
누군가 그 금고에 무엇을 넣었거나, 관람자가 거기에 그 무엇을 넣을 수 있다. ”
한성백제의 귀한 역사를 다시 찾아 저 텅 빈 금고를 채우려고 <한성백제역사관>이 곧 문을 엽니다. ***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석촌동 고분군 김미경이예요^^
여기 한성백제박물관이 제가 근무하는 곳입니다. 아직 개관준비중이라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대학교 졸업하고 미술관 다닌 경력과 교육프로그램 개발 경력이 있었고 대학원 석사논문이 박물관논문을 써서 이곳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박물관과의 인연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렸을때부터 교직의 꿈을 갖고 있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교육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임용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 행복합니다. ^^
선생님 글을 읽었는데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본받고 싶습니다.
어제 전화 고맙습니다. 좋은 인연이 닿아 함께 공부하는 기쁨 계속되겠지요. 배움은 끝이 없고, 배울수록 더 부족함을 느끼니 큰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