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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할줄 모르는 바보
옛글을 활용하는 '용사用事'에 대해 이병한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⁸⁸ '용사'라는 표현을 '모방'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첫째, 용사를 위한 용사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작품의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되지 않거나 현학하는 자세로 용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구마다 내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는 '전고를 늘어놓은 것이나 '죽은 시체를 쌓아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억지로 용사를 하여서는 안 된다. 용사에 있어서는 '자기화'가 중요하다. "누에가 뽕잎을 먹되 토해내는 것은 비단실이지 뽕잎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이 용사를 빌어 활용하되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처럼 정태情態를 모두 드러내어야 한다.
째, 용사를 융화시켜 매끄럽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용한 전고와 상황이 전체 작품의 예술 형상과 완전히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이는‘물 속에 소금을 넣어 그 물을 마셔봐야 비로소 짠맛을 알게 되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주역』에서는 ”궁하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통하게 되며, 통하면 오래갈 수 있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고 했다. 우리의 연암 박지원도 소위 법고法古' 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게 병이고, '창신創新한다는 사람은 정상적인 법도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이라면서 '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 하면서도 얼마든지 소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대에 와서도 시 창작에 대한 고민은 모방에 대한 고민과 궤를 같이 한다. 모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령 모방을 한다면 어디까지 모방하고, 무엇을 모방하며, 언제까지 모방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모방의 형태를 한 번 살펴보자. 우선, 전범이 되는 시인이나 시적 경향을 추종하는 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주제와 소재를 비롯한 시의 내용을 답습하는 일, 운율이나 언어 사용 기법 등 형식을 답습하는 일, 그리고 구체적인 문장이나 어휘 표현을 베껴 도용하는 일이 모두 모방의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다가 창작자 자신이 자신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동어반복하는 일도 일종의 자기모방에 해당한다.
모방의 정도가 도를 넘을 때 흔히 표절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모방의 범위와 방식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풍자와 익살을 목적으로 특정한 작품의 내용이나 기법을 모방하는 패러디parody에서부터 혼성모방pastiche⁸⁹까지 '재창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모방 방식이 창작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모방의 정도를 결정하기 전에는 표절 여부에 선을 긋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을산山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江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苦惱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盞은 마시고, 한 잔盞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山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의 「산문山門」에 기대어 전문이다.⁹⁰ 누이의 죽음이라는 극한의 슬픔을 내용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시 전편에 흐르는 역동적인 어투로 인해 전통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주는 시다. 이 작품이 내뿜는 어조와 운율과 어휘와 호흡의 아름다움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제목마저 유사한 아래 작품 「풀잎에 누워」를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작으로 뽑혔다. 그러나 곧 표절로 판명이 나서 당선이 취소되고 말았다.
햇살이여
연초록 잎새에 누운
내 벌거벗은 목숨을
오래오래 눈여겨 보는가
맑고 찬 알몸 오히려 부셔 눈물 나고
알몸 한 오라기 가닥가닥 벗기면
풀빛 고운 하늘이 숨 쉬던 것을,
그 하늘의 갈피마다 일어서던 바람들
햇살로 살아서 퉁겨 오르던 것을,
더러는 바람 속에 불려가
신음 하나 흘림이 없이 죽어가던 것을
그래도 꽃 그리메 한결 곱게
연지 곤지 찍어 가꾸던 것을
햇살이여, 지금도 눈여겨 보는가
연초록 잎새에 몸져눕던
그 맑고 찬 알몸들을
퉁퉁 불은 바람들이
뚝딱뚝딱 가슴에 못을 치며 가는 걸
벗기면 벗길수록 더욱 무거운 내 알몸
비어 가는 것은 더욱 차고 출렁거리고
이윽고 잎새마다 살아서 빛을 퉁기는
물방울로 아아, 탄생하는 것을
햇살이여, 아는가
연초록 잎새마다 몸져눕던
알몸 가닥가닥 그 한 오라기까지
지금 그대 눈 그리메에 살아있음을.
김춘수는 모방을 일삼는 사람들을 아류라는 말로 평가절하한다. 아류란 스타일과 소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어떤 시인의 뒤만 따라다니며 남이 입다가 낡아서 벗어던진 헌옷만을 주워 헐값으로 팔아서 퍼뜨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박성을 통박하면서도 그는 습작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모방하게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습작이란 남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작업이므로 남의 아류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⁹¹
이쯤에서 당신은 작은 답을 구하기 바란다. 혼자 써놓고 혼자 보는 시라면, 그걸 습작이라 한다면, 남의 옷을 입고 자신의 옷이라고 우기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모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서 시적 영감이 번개 치듯 심장으로 날아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그보다는 차라리 흠모하는 시인의 시를 한 줄이라도 더 읽어라. 시험을 대비하는 공부도 하지 않고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마라. 남의 것을 훔쳐보는 행위는 부도덕한 짓이지만 훔쳐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답안지 쓰기를 포기한 사람은 바보다. 당신은 모방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지 마라.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고 하면/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이 땅의 논리”(정희성, 「아버님 말씀」)대로 말한다면 당신에게 모방을 하라고 하면 도둑질을 하라는 것이 되고, 당신에게 새로이 창조하라 하면 구차한 표현을 일삼으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모방을 배워라. 모방을 배우면서 모방을 괴로워하라. 모방을 괴로워할 줄 아는 창조자가 되라. 모방의 단물 쓴물까지 다 빨아들인 뒤에, 자신의 목소리를 가까스로 낼 수 있을 때, 그때 가서 모방의 괴로움을 벗어던지고 즐거운 창조자가 되라. 모든 앞선 문장과 모든 스승과 모든 선배는 당신이 밟고 가라고 저만큼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징검돌 삼아 그들을 밟고 뚜벅뚜벅 걸어가라. 시인은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이 구성할 임무를 타고난 사람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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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병한 편저, 『중국 고전 시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3, 180쪽.
89 패스티쉬라는 개념은 패러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희극적인 불일치의 느낌은 수반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만큼 패스티쉬는 별스러울 정도로 포스트모던한 종류의 '무표정한 패러디' 이다. (조셉 칠더즈. 게리 헨치 엮음,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황종연 옮김, 문학동네, 1999, 320쪽.)
90 송수권, 『지리산 삐꾹새』, 미래사, 1991, 12~13쪽.
91 김준수, 앞의 책, 114~117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써라」중에서
2025.2.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