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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사진 이야기 스크랩 사람 가족의 시간여행 담아온 아마추어 사진가, 故 전몽각 선생님
히말라야 추천 0 조회 159 10.02.14 22:3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允美네 집>. 사진의 매력에 빠져든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가족' 구성원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피사체이다. 첫 딸 윤미의 탄생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26년여에 걸친 한 가족의 시간여행을 기록한 사진집이 바로 '允美네 집'이다.

전몽각 선생은 당신 스스로를 그저 취미로 사진을 하고 있을 뿐인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고희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만은 프로의 경지를 넘나든다. 모두 세 번의 전시회와 두 권의 사진집을 상자(上梓)했으니 선생이 사진계에 남긴 족적 또한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대학에서 후학들에게 토목공학을 강의하다 지난 95년 정년퇴임한 후 이젠 아무런 시간 제약 없이 사진에 전념할 수 있게 돼 선생은 요즘 행복하다.

 

"첫 딸 윤미가 세상에 태어난 후 저희 가족에게 일어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한 컷, 한 컷 사진으로 담아놓았었습니다. 평소 그 동안 찍어온 둘째 윤호, 셋째 윤석 등 가족사진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요."

 

아이들이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할 때, 더듬더듬 말을 할 때 선생의 카메라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때로는 밤늦은 귀가 후 잠자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다시 한 컷. 그 어떤 섬세한 예술가라도 연출해 내지 못할 값진 장면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마포의 여덟 평 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따로 암실 만들 공간이 없어 화장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찍는 행위, 거기에서 맛보는 행복감만큼은 아마도 선생에게 있어 최고 절정의 시기이기도 했다.


 

 

                                       전몽각 선생 사진집에서, <코닥소식>


사진집 '允美네 집'은 이제 전몽각 선생 댁의 가보 제1목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인 1971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첫 번째, 그리고 1978년엔 출판문화회관에서 같은 주제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이 첫 작품집에 대해 아쉬움도 없지 않다. 1964년 겨울, 출산의 기미를 느낀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은 선생의 손엔 어김없이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벅찬 순간을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산모 외엔 분만실엘 들어갈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 때문에 선생의 꿈은 좌절돼야 했다. 더욱이 태어나는 아기의 건강에도 좋질 않다는 데에야 감히 감행할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전몽각 선생 사진집에서, <코닥소식>

 

 

'允美네 집'은 '允美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라는 책의 부제처럼 딸의 결혼식 장면으로 대미를 맺는다. 이 마지막 한 컷은 선생의 오랜 사우(寫友)인 강운구 씨가 찍은 것이다. 선생은 결혼식 날, 딸을 데리고 들어갈 때에도 광각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직접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하객들 앞에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아내 때문에 더는 욕심을 내질 못했다.

 

 

선생의 사진 입문 이야기는 대학 학창시절로 거스른다. 사진은 물론 오디오 역시 이미 마니아(선생은 오랜 동안 오디오와 음악 관련 매체들에 칼럼을 써 왔다)의 경지에 들어선 선생의 오늘엔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 앞에서 했던 소박한 다짐 하나가 디딤돌이 됐다.


“대학 때 한 선배가 했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공학계열 지망생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숫자풀이에나 열중하다가 마치 기계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지요.”


시내 한 음악실에서 진행된 그 날 신입생 환영회에선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 과 베토벤 교향곡 '운명' 을 비장한 심정으로 감상해야 했다며 선생은 당시를 회고했다. 유년 시절,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던 선생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그런데 그림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해도 늦질 않다며 부모님은 한사코 공대에 들어가길 희망하셨다고 한다.


대학 시절, 촬영을 다닐 때마다 룸메이트인 친구의 사진기를 빌려 써야 했던 선생에게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마침내 사진기를 품에 안을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오게 된다. 새학기 등록을 하려고 보니 학점이 좋아 장학생으로 선발돼 있었던 것. 선생은 이 사실을 부모님께 숨긴 채 거액의 등록금을 고스란히 사진기 사는 데 들이기로 했다.


“처음으로 온전하게 내 차지가 된 사진기가 롤라이였어요. 내 사진기를 갖게 됐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잠잘 때도 한 이불에서 같이 잤을 정도였지요(웃음).


선생의 본격적인 사진공부는 대학 졸업 후 시작됐다. 당시 사진에 대한 열정을 사르던 사람들이 모이던 '현대사진 연구회' 와 '살롱 아루스' 에서 사진의 기본기법을 익혔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사진 잡지들을 정기 구독하며 모자라는 부분들을 채워 나갔다.


“제 사진에 대한 주관을 뿌리내리게 한 이는 당시 '포퓰러 포토그라피' 고정 칼럼을 쓰던 부르스 다운즈라는 평론가였습니다. 그 분은 늘 사진기는 그림을 표현하는 붓과 다른 만큼 다른 기존 예술매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기능들을 잘 살려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려주곤 했었지요.”


선생의 사진기는 언제나 '인간적인 사진, 사람 냄새 물씬 묻어나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 번째 사진작업 '윤미네 집'이 그러했고, 두 번째 사진집 '서울'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엔 선생이 거리에서 만났던 우리 이웃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 그리고 산과 강의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무엇보다 선생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으로 포착돼 있다.

 

그래서일까? 선생의 서재(이 서재에선 그림 같은 관악산 자락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켠, 책상 위엔 아직도 파란 잉크병이 제자리를 굳게 지킨다. 늘 모자란 시간 때문에 워드프로세서를 따로 익힐 기회가 적었던 탓도 있지만, 만년필로 한 획씩 그어 정성을 쏟는 글쓰기를 선생은 아직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전몽각 선생 사진집 <서울>에서, <코닥소식>

 

 “두 번째 사진집은 20세기말의 서울을 담고 싶었습니다. 먼저 제가 사는 동네의 이웃부터 찍기 시작했지요. 19세기 광화문 네거리를 다니던 달구지 사진의 향수처럼, 제가 찍은 ‘서울’이 다시 한 세기가 흐른 뒤에도 기록적인 면에서 가치를 가질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선생은 현재 ‘서울’의 연장선상에 있는 다음 작품집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선생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러 본 재외 한국인 2세들의 간곡한 편지를 받은 이후부터다. 외국에서 살아가면서 아버지 나라의 역사와 거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그네들의 간청은 사진집의 내용을 ‘서울’ 뿐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로 확대해 달라는 주문이다.

 

“‘서울’만 찍는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 전체를 찍는다면 앞으로 십 년 이상은 족히 걸릴 테지요. 이젠 예전 같지 않은 체력도 문제지만, 점점 무디어지는 감각이 더 걱정입니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과 여력이 닿는 데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우선 서울에서 가까운 곳, 강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 여행에는 승용차를 손수 운전하며 선생의 발이 돼 주는 아내 이문강 여사가 동행한다. 결혼 초,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도 사진재료만은 늘 풍성하게 준비해 두던 아내. 요즘도 선생이 촬영한 필름들을 정리, 스캔하고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들은 모두 이 여사 몫이다.

사진기를 둘러멘 채 강화도 어느 한적한 길모퉁이를 달리고 있을 전몽각 선생 부부의 여정이 내내 건강하시기를…….

 

 

<코닥소식> 2001년 봄호

 

*** 이 인터뷰는 7년 전, 관악산 자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남현동, 선생님 댁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브람스였는지, 바흐였는지, 지금 곡목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전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조용하게 음악을 틀어놓으신 채, 

음악 애호가로서 살아오신 행복한 이야기도 들려주셨더랬지요. 

재료를 구해 손수 만드셨다던,

고가 브랜드의 스피커 못지 않은 소리를 들려준다며 자랑하시던 스피커 앞에서,

마냥 행복해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틈틈이 써서 책으로 엮으셨다는 에세이집 <토목공학 雜記>를 그때 제게 선물로 주셨었지요.

7년 전 써놓았던 이 인터뷰 글을 이번에 다시 들춰보면서 확인해 보니

선생님께서는 2년 전에 고인이 되셨더군요. 

뒤늦게나마 故 전몽각 선생님 가족분들께 삼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8년 8월 30일 아침에,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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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2.14 22:35

    첫댓글 편안한 명절 보내구 계신지요? 오늘두 우리 <막내>는 직장(?)에서 근무중이어서 위로 방문 다녀왔답니다... ㅋㅋ. 따뜻하고 뭉클해지는 사진집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 작성자 10.02.14 23:50

    사진집을 구해보려는 여러 사람들의 요구에 이번에 재판이 출간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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