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幻)이거나 영(影)이거나
공순해
요정이 산다, 벌써 떠났다로 의사당이 논쟁하는 이 나라. 이게 무슨 판타지? 지구상에 아직도 이런 나라가 정말 있다고? 있단다. 그들은 초록색 모자와 재킷을 입은 멋쟁이 요정 레프러칸이 그려진 유리문을 ‘요정 전용’ 출입문이라 하며 출입을 제한한다. 요정들이 사는 숲을 지키기 위해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세우고도 일정을 연기하고 설계도도 변경했다. 산악도로에서 요정들이 길을 잃을까 봐 표지판도 세웠다. 의사당에선 의원들이 클레어 지역의 페어리 숲에서 요정들이 일하는 모습을 봤다고 주장하는 편과 이미 그 숲을 떠났다는 편이 나뉘어 싸웠다. 요정을 진짜 믿는단 말이야, 가 아니라 ‘아직 거기 산다’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로 나뉘어 논쟁을 한다니... 이게 레알 실화?
이 기사와 비교되는 기사 제목은 정치는 유해하고 나는 무력하다…미국 의원 37명 무더기 불출마 선언이다. 미 의원들은 워싱턴 정가의 유해한 정치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의원직 수행으로 희생할 가치가 전혀 없기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워싱턴이 망가졌다는 그들 중엔 13선, 14선 의원들도 있고, 그중 22명은 정치를 아예 접는다고. 이들의 의회 탈출 물결은 미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있다는 경고음이라고 NYT는 보도했다.
그 배경엔 폭력화한 정치 상황이 있지 않을지. 이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파괴적인, 키 큰 노랑머리 전직 대통령으로 해서 촉발됐다. 공격적 투자하듯 폭력을 휘두르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의사당 데모까지 선동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성폭력 소송들을 돈으로 무마하는 그로 해서 미 민주주의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를 흉내낸 후안무치의 폭력이 거리에 횡행해 공정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런 그가 대선 철을 맞아 다시 돌아와 맹활약이다. 그에게 표를 주려 하는 표심엔 어떤 욕망이 묻어 있는 걸까. 청교도 건국 정신은 어디로 가고 오로지 나만 아니면 돼, 하는 그 표심. 정치는 국민에게 판타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JP는 말했거늘. 그는 정치는 예술이라고 한때 젊은이들을 도취시킨 적이 있다. 정치인이 사기꾼이 될 줄 그도 몰랐을까.
이러다 보니 ‘삶은 불안, 정치엔 환멸. 미국 10대 정신건강 후퇴 이유는 SNS’ 같은 기사도 뜬다. NYT는 최근 미국 젊은 층의 정신건강이 이전 세대보다 후퇴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중 예비 유권자인 10대들은 기후변화·낙태·중동에서의 전쟁 등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을 지녔지만 정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낀다고. 또한 12~17세 응답자 중 2/3는 정치권이 젊은 층의 요구와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미래에 부모보다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응답은 절반에 못 미쳤다. 그 주범은 SNS라고. 즉 소셜미디어의 디지털화라고 NYT에 말했단다. 심지어 NYT만 문제 원인을 이리 꼽은 게 아니라, 미 보건복지부도 소셜미디어가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증거가 많다는 우려를 발표하며 더 안전한 SNS를 만들고, 청소년의 SNS 사용 시간은 줄여야 한다, 등의 조치를 권고했단다.
폭력이 오락화돼 OTT를 점령하고, 정가까지 잠식해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온라인 사전 사이트 딕셔너리닷컴이 2023년 올해의 단어로 ‘환각을 느끼다’를 선정했다는 기사가 인상 깊었다. 선정 이유는 인공지능이 언어와 삶의 미래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라 판단됐단다. 사용자의 의도에 반하는 거짓 정보를 생성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제시하는 행위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고. 작년에 비해 이 단어가 85% 더 검색된 것이 그 근거란다.
환각이란 외부 자극 없이 어떤 사물이 있는 것처럼 지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엔 환시, 환청, 환후, 환미 같은 감각이 동원된다. 그동안 우리는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편리한 생활을 가져다주리라는 환상 속에서 그 발전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데 그 환상을 뛰어넘어 환각이라… 환각 옆에는 무분별, 폭력이 나란히 서 있건만. 환각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는 오늘날의 문화는 일정 부분 환멸을 불러온다. 환상, 환각, 환멸… 어쨌거나 삶은 환(幻)이다. 있고도 없음. 그림자처럼 없고도 있음. 근래 양자 역학이 이 의미를 확실히 자리매김해 줬다.
폭력을 환각으로 맞서는 세상, 이왕이면 환멸보단 환상이 낫겠다. 요정이 산다, 떠났다 논쟁하는 나라, 아일랜드식 해법이 필요할 듯싶다. 그들은 문제를 ‘내 말이 맞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해결한단다. 기나긴 식민지 착취를 당하며 기묘한 공감 능력이 생겨, 억울함과 고통에 유달리 민감한 탓이란다. 무수한 침략과 지배당하기로 말하면 한국도 못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