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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부르시면 따라 가리이다
이홍규•김현숙 가정
1. 내 고향 경남고성읍 율대리 2. 출생 및 가족 배경 3. 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및 입교 4. 기동대 합류 5, 개척교회로 향하다. 6, 누나 777쌍축복식때 암소 판매 7, 문 선명선생 강연집 20만부 각 교구배부 8. 7년간의 철야정성 9. 축복의 은사와 동원 10, 18K 카우스보단 제작 아버님 특별지시 11. 면사포 쌤플 구입차 일본동경 출장 12, 김현숙 가정교회 활동 보고서 13. 천보 입적 완료
1 ,출생
1)
경남고성은 서기42년부터 461년간을 소가야 (小伽耶)도읍지였던 곳이기도하다. 신라(新羅)제35대 경덕왕 16년에 주(州), 군 (郡) 현,(懸) 을 한식(漢式)으로계정할때 고자군(古自 郡), 을 고성군(固成郡) 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3월1일자로 면(面),의 명칭및 구역을 정할때 동읍면(東邑面), 과 서읍면(西邑面)을 병합하면서 가동면의 유동 일부를 병합하여 철성면(鐵城面)라 개칭하고 교사,
덕선, 기월, 서외, 대평, 무량, 우산,송학,죽계, 동외, 성내, 수남,신월,월평, 율대의 15개 리로 개편 하였다. 서기 1918년에 이르러 철성면은 고성면이라 개정하고 서기 1918년에 이르러 철성면은 고성면이라 개칭되고 고성면은 서기 1938년10월1일 자로 고성읍(固城邑)으로 승격되었다.
2)
고성군 하일면에는 공룡이 있었는데 2억3천만년 전 중생대초기에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내었다가 그로부터 1억6500만년간 지구를 지배하였고 백악기가 끝남과 동시에 멸종되었다. 그래도 고성에 5천여점의 다양한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수억년 전에는 공룡의 천국 이었을 산 아래로 펼쳐진 저 넓은 벌판과 해안이 묵묵히 세월의 자취를 안고 자리하고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하면,마치 공룡의 울음소리를 들려오는 듯하다.오래 전 의 세월에 공룡들이 두개의 산을 뛰어다니며 활동했을 것이다.
3)
거류산(巨流山 571.7m)은 한국의 마터호른(알프스 산맥,4,478m)로 불리기도 한다.옛날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다가 밖에 나가보니 산이 하나 걸어가고 있어서 ''게 섯거라. '' 하고 소리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췄다는 산이라 한다. 그리고 가뭄이들어 비가 안 올때는 거류산 무지게 터 주변에 묘를 파면 비가 내렸던곳 이기도 했다.
4)
고성은 무기정 기생 월이 가 있었다. 일본이 15세기 후반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밀사를 보냈는데 당황포의 해변에서 당동,통영만을 둘러 고성읍 수남동 해변을 삼천포를 가려고 하니 해는 이미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고 잠자리를 찿아 무학동 무기정곱사(술집 주인이 곱사였다) 집에서 하룻밤 투숙하게 되었는데 기생월이가 일본 밀사라는것으로 눈치채고 술을 먹이며 끌어안고 짖궂은 아양을 다 떨며 술을 권한후 술에 취해 잠들어을때 밀사의 품속을 뒤져 무명비단보에 다섯겹으로 싼 보자기를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보물이 아니라 먼장래 우리나라를 침략할 하로의 공격 요지를 발견 육로로 도망갈 지도가그려져 있었다. 그것을본 월이는 붓으로 꽉 막힌 부분을 바다 로 연결되는 것처럼 지도를그려넣어 다시 품속으로 넣어 임진왜란 때 도망갈 길을 찿지 못하고 전멸한 일화가 있기도 하다.
5)
나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효령대군17세 16대손이갑룡(본명 이경의) 19대손 처사가 돌탑을 쌓아 탑사절을 세우심, 소 백산맥 노령산맥의 펼쳐있는 해발300m위치에 세운 이 탑사 절은 진안군 북쪽으로 금강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섬진강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연결 되어 있다. 진안 지방 여덟가지 뛰어난 경지를묶어 월랑팔경 이라 부르고 있다. 이갑룡 처사는 1860년대에 출생하시어 1954년 임종하 시기까지 그가운데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전봉준이 처형되는등 어둡고 혼탁한 때에 세상에 태어나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시어 백성을 구하고자 구국이념으로 기도와 정성으로 수행 하시다 수도의 길을 걸으신 도인 이셨다. 16세때 부친을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하다 산에 영험한 가운데 감명받아 백두에서 한라까지 전국명산을 찿아 다니며 3.7 기도회도 갖기도 하셨답니다. 처사는 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러 온 사람이다 라고 하시면서 굳게 믿고 기도정성에 정진하시다.하루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입산하여 기도드릴때 혼몽중에 두산새가 꿈에보여 그이후 마이산을 찿아가보니 그 기이한 산세가 꿈에 보았던 그곳과 맞아 떨어져 그곳에 자리잡아 수행을 시작 정성을 쌓았더니 그때나이 25세 였다고 했다.
진안에서 임실쪽으로4km가면 독특한 2봉우리가 있는데 두개가 말의 귀처럼 쫑끗하게 마주솟아있기 때문 마이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했다. 매일 탑사 이절에서 스님들이 불가의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 정한수 그릇에 매일밤 물을채워 넣는데 신기하게도 그 정한수 그릇이 얼때 몇몇개의 역 고드름 이 피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30년동안 쌓아올린 수백개의 돌탑이 있는데 이돌탑은 신기하게도 강한 비바람이 나 태풍이 불어도 100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돌은 순수 돌이고 접착졔도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쓰러지지 않느냐고 했더니 도 에가까운 정성과 혼이 들어있었기에 그렇다고 했었다.
고성 읍에서 2km쯤 통영 방향으로 말티고개를 넘어서면 우리동리 율대리가 보인다. 고성교회는 1960년 초에 개척교회가 생긴후 많은 지도자가 거쳐 가셨고 특히 조우억만 (전 유광열 협회 문화부장 장인)께서 고성 복귀에 많은 협조를 해 주셨다. 특히 내가 상리교회를 개척할 당시 일본에서 목수까지 동원 하시어 토지를 매입 성전을 건축해 주시기도 하셨다.
2, 출생및 가족 배경
나는 1954년 고성 율대리 5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3녀 중 누나 둘을 두고서 장남 으로 태어 났다. 아버님께서는 건축일을 하셨고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어머니 건강을 위해 많은 봉사 일을 많이 해 오셨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절간에 가서 놀기도 좋아 하였으며, 방학이 되면 사찰 근방에서 도라지를 비롯하여 각종 약초를 캤다. 산 짐승도 쫓아다니고 굉장히 활동력이 많은 소년이었다. 자연인 청소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일이다. 동네 앞 마당에 나가 친구들과 숨바꼭질 놀이도 하고 잼 있게 놀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가고 나는 바로 옆 개울 아래서 세수도 하고 논 고동도 줍고 하였는데 그 옆 짚동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순시간에 옆에 세워진 짚동들이 한줄몽땅 7동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나는 무서워서 놀라 도망 갔는데 주변 사람들이 내가 불을 지르고 도망 갔다고 이야기를 해 짚을 모두 물어 달라고 짚동 주인이 매일 같이 찿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배상해 달라고 난리를 쳤다. 한달도 아니고 1년이상 우리집 마당에 와서 고함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그 이후 어머니는 속병이 나 매일 머리에 수건을 두러고 누워 계셨다. 그모습을 본 아버지는 절에가셔서 봉사 일을 하시고 돌아 오셔서 천리교나 약방이나 어느곳에 가서 치료를 하려고 하였으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후 고성 대한천리교가 신축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는 천리교에 나가 2년이상 봉사를 하시고 나는 어머니와 천리교를 매일 세벽 나가면서 악한 것을 제거하고 도와 주셔요 천리왕님 미시요를 외우며 기도를 했었다. 탐내는 맘을 버리자, 욕심있는 맘을 버리자, 분노 하는 맘을 버리자,등
천리교회에서 하는 식대로 하며 1년이상 다녔다.
이후 어머니 병은 조금씩 좋아졌고 나는 어떻게 하면 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릴까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중 2학년때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그 당시 매형 되시는 분은 화가였다.극장 포스터도 그렸고 군청이나 관공서 벽에 당신은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 그림도 그렸다. 그 이후 큰 누나는 그 화가 한테 정이들어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매형집 바로 앞에 양옥집에 있었는데 그 집이 고성 통일교회였다.
그 집이 고성통일교회 건물이었다. 누나는 시집가서 1주일에 만에 전도가 되었고(당시 지역장 윤덕명777가정) 나에게도 통일교회 입교를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절에 나가시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 이후 몇 번이고 나에게 독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누나를 원망 했었다.이후 1년이 지났다. 여름방학때 한번만 다녀 오라는 부탁이었다. 거절을 하다 놀러 간다 치고 마산 지구 수련회에 가기로 했었다. 5명의 성화학생이 가게 되었는데 고성에서 마산 월남동까지 걸어서 가게 되었다. 11시간을 걸어 마산 지구본부에 무사히 도착했다.
3.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및 입교
1969,여름 방학때 누나가 꼭 한번만 수련회에 참석 하라는 부탁을 받고 마산에서 진행되는 경남 제1회 수련회에 참석 하게 되어었다. 고성에서 마산까지 거리는 44K 인데 심재후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걸어서 5명이 수련회에 참석 하게 되었다. 세찬 바람이 씽씽 불기는 하였으나 아랑곳 없이 고성에서 재를 넘고 넘어 마산 월남동에 도착하니 모두 기진맥진 하였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먼저 배를 채우고 강당에 입실했다.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첫날 세 번째 강의 시간이었는데 난 권우삼 강사님의 메시아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강의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기독교 신앙 하면서 배워왔던 신앙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예수님의 강림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접할 수가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의문점으로 생각해 왔던 내용들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웅변 대회가 있었고 원리 강의 대회도 있었다, 난 참여는 못했지만 젊은 학생들의 살아 있는 눈빛을 보면서 희망이 보였다. 겨울 방학때도 수련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땐 문선명 선생님을 처음으로 뵙는 시간까지 만들어져서 넘 기뻤고 행복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와 기도와 정성으로 이어갔다. 3개월동안 정성을 드렸다. 그리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문선명 선생님께서 강의 하시는 장면을 보고 감짝 놀랬다. 말씀중에 불을 품어 내는 듯 전해 주시는 말씀이 나의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정말 꿈속에서 받은 그 은혜는 나의뼈속 깊이 파고 들었다. 나는 교회에 가서 입회원서를 써내고 1969,11.13일 정식으로 협회원이 되었다.
수련회를 무사히 끝낸 이후 나는원리 공부를 꾸준히 해 나가면서 김종옥씨가 누나로부터 전도 되었는데 예화 산탄 공기총을 한정 샀다. 시간 나는대로 둘이 산이나 들을 다니면서 참새나 비둘기를 잡았는데 난 비둘기는 먹지 않고 참새는 탕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었다.그러던 중 고1학년때 여름 방학때 7일 금식을 했는데 그 맛나는 새 구워먹는 냄새를 맡을 때 군침이 나오기도 했었다. 성화학생 회장이 된 이후 사업활동도 동참하게 되었고 성미 사업을 해 전투경찰 위문도 가게 되었는데 봉사 활동이 더해지면서 관내 경찰서에서 표창장도 보내 오곤 했었는데 그 당시 학교 윤리선생의 극심한 반대로 나는 늘 마음의 고통을 받기도 했었다.
4.기동대 합류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전 73년 9월 경남 기동대에 합류했다.가는 곳곳마다 반겨 주는자 없었지만 그 당시 남북한 대치상황이 점점 고조 되면서 무엇보다 국민 사상교육이 필요한 때라 학업도 중단하고 나선 것이다. 동리를 지나다 보면 북한 선전물 삐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이 널려 있었고 국민들의 마음도 공황 상태 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우리 기동대는 영하의 추위도 무릅쓰고 주민 한분 한분을 교육 시키며 개몽 운동에 나섰다.
43명의 대원들을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 사나이 오늘은 북한동 내일은 몽고 흐르고 또 흐르는 ~“ 경상도 굳센바람 가슴에 안고 여기가 남 아의 싸움 터라고 외치며 또 외치면서 경남 전지역을 누볐다. 그러던 중 지리산 정상에 올라 정성을 드리며 참 부모님 만세를 부르며 외치고 또 외쳤다. 모두가 산 증인이 되자고 김관해 대장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오르고 내리는 길 순탄 하지는 않았다 칡 넝쿨이 많아 길을 잘못 들어 갔다가 한참동안 헤메다 오는 대원도 있었다. 그 광경을 보시고 기동 대장님께서는 이 많은 세상길이 있는데 진리의 길을 찿지 못하면 중심을 잃게 되고 파멸 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 꼭 중심과 하나되어 나가자고 말씀 하시기도 하셨다. 다행 스러운 것은 43명 모두가 한명의 낙오자 없이 수료 할수 있었던 것이 다행 이었다.
5. 개척교회로 향하다.
74년6월 기동대를 수료하고 밀양군 단장면의 개척 교회로 향했다. 가는 곳곳마다 기도정성은 이어졌다. 밀양 단장면 단장리 동리 제일 꼭대기에 단칸방 월세를 얻어 놓고 피눈물 나는 정성과 기도로 이어가며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쌀이 없을때는 굶기도 했었고 그것도 힘들때는 버스를 3시간 이상타고 고성 집에와 부모 몰래 쌀을 담아 가기도 했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기 시작한지 1년 만에 믿음의 자녀인 딸(조영순)을 찾았다. 지난후에 어떻게 뜻길을 따라 왔나 이야기 했더니 아빠가 그러니까 나 그때 하신 말씀이 기차를 타려면 줄을 서지 않으면 탈수 없다고 아빠가 몇 번이고 강조 했다고 했다.
75년도에 입회원서를 쓰고 마음의 결심을 갖었다고 했다. 그 이후 믿음의 달 (영순) 딸집에 매일같이 방문했었고 직장을 옮겨 언양면 삼성전관에 근무할땐 일주일 한번씩 찿아가서 말씀을 전했고 불의의 사고로 영순씨가 얼굴에 화상을 당했을땐 나도 기절하여 온 종일 밥을 먹지 못하고 방 안에서 뒹굴었다. 몸은 차쯤 차쯤 회복세를 보이고 할때 때 나는 김해 교회로 이동했다. 그 이후 영순씨는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시간을 만들어 1년에 부산 교구에 가서 7일수련을 3차례 받았다 했고 82년 6천쌍 일한가정 축복을 받고 일본 구마모토 소속으로 헌신 생활을 했으며 약15년간 지구 한국부인회 회장직을 역임 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평화연합 UPF 차장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한일 가정에 무슨일이 생기면 달려 간다고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할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아빠의 기도와 정성에 감동되어 여기까지 남아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6. 누나 777쌍 축복식때 암소 판매
누나가 777가정 축복을 받을당시 축복비가 모자라서 집에 기러던 큰 암소를 팔게 되었는데 내가 소 여물을 주고 소 마구칸에 청소를 했는데 소가 팔려 갈 것을 미리 알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벌써 우리식구들의 말을듣고 알아 차린모양 이었다. 어린송아지부터 키운 소 인데 누나 결혼비가 부족해서 팔게 되었는데 가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소도 영물이구나 하는 느낌 마져 들었다. 등을 솔로 긁어 주면서 더 친해 보려고 했지만 넘 힘 없이 앉았다 일어 났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당시는 돈이 필요할땐 소 돼지등 동물을 팔던지 아니면 토지를 팔아 결혼비를 마련 했는데 우리집은 소를 팔아 결혼 축복비를 마련했다.
7. 문선명 선생 강연선집 20만부 지방 각 교구 배부
80년 4월 강연 선집 20만부를 직접 배부 하게 되었다. 그당시 성화사에 근무 하던때라 성남 대한교과서에서 강연선집 20만권을 인쇄 하게 되었는데 나는 1주일 정도 대한교과서에가서 인쇄도 지켜봤고 책이 나올 때 박스로 포장을 해서 각 교회로 발송 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2.5톤 화물 터럭에 싣어 부산 광주등 각 교구를 돌면서 배송을 완료했다. 비록 피곤하고 힘은 들었지만 아버님 강연집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나는 자부한다. 내려 가다가 운전기사가 약간 졸기라도 하면 휴게소를 들려 커피를 먼저 뽑아와서 전해주고 안전 운전을 해 달라 하며 부탁을 몇 번이고 강조 하기도 했었다. 이틀동안 모두 배부하고 서울에 올라오니 내 몸은 넘 피곤해서 10시간 이상 잠자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었다.
8. 7년간의 철야기도 정성
1979년 봄 부터 본부 교회에서 김재산 권사님과 함께 정성을 드려오다 7년간 정성을 모우기로 서로 약속하고 계속 기도 정성으로 이어갔다. 조건은 참부모님 신변을 지키는 기도와 공산권 국가복귀를 위한 기도 하루속히 하늘이 원하시는 이상세계를 만들어 드겠다는 마음으로로 진행됬다. 매일 매일 드리는 기도는 눈물로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이어갔다. 기도를 하다보니 영적인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되면서 예배때 주변 사람들의 심정도 드려다 볼수 있을만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이 어렴풋이 체험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김재산 권사님과 응답을 받아 산기도를 향했다. 아버님 댄버리 수감 일정이 발표되고 댄버리로 향하시던 그날도 정성을 모아 나갔으며 청파동2가9의1 신용일 본부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권사님 몇분들과 함께 우이동 산기도를 향했다. 새벽에 가랑비를 맞아가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기도의 눈물이 범벅이 되어 간절함이 더더욱 가슴을 뚫고 나오는 느낌 마져 들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야 내려오게 되었다. 7년 기도 정성은 뼈 살을 녹여 내는 심정으로 임했다. 통일동산에서는7수 탕감행사 인물을 대신해 제물을 쪼개어 선악을 분립시키며 4수 탕감행사도 겸하여 해가며 진행했다. 문막의 미륵산 가평 천마산 우이동 화계사 바위 아래서 땀과 범벅이 된 기도의 정성은 먼저가시어 영계에 계신 김재산 권사님도 영원히 잊지못할 기억으로 길이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해 보게 된다.
기도 하는 기간동안 시련도 많았다. 여성들이 나체로 누워 있는데 그곳 가운데를 나체로 지나가라고 했다. 사랑의 심판길을 통과 하라는 길이 기도 했었다. 그 순간 나는 정력을 머리로 끌어 당기는 마력의 기법을 이용했다. 그 이후 일본 식구 가운데서 원리의 뜻은 따라 가야만 하는데 성적인 유혹을 도저희 이겨낼 수 없어 이겨 내기란 넘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식구들을 편지로 받아 기도하며 고민 하기 시작했다. 그이후 하늘 부모님께 매일120회 경배하고 뜻을 위해 헌신을 다하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유혹과 질병을 위해 기도 하라고 전했다. 그대로 했더니 모든 것이120일 기도후 모두 사라졌다고 전했다. 그 편지는 한일가정과 저 지인을 통해 번역받고 설명 해 주면서 알게 되었는데 기도의 힘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노력하는 만큼이나 하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되었다.
9. 축복의 은사와 동원
1982년10월14일, 드디어6000 쌍 축복을 받았다. 구리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서 오전 내내 기다리며 나의 대상자를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서 있는데, 어느 여성이 화장실에 갔다가 바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참아버님께서는 그여성을 가리키며“너 나와!”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하시면서“같이 나가서 만나보라.”고 하셨다. 나가서 집사람을 만나고 보니 어젯밤 꿈에서 본 얼굴과 똑 같았다.
축복가정을 맺어주시는 기준으로 보면,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로써 참부모님께서 의도적으로 영남 호남 지역 출신을 부부로 맺어주신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가정도 그것에 포함되었다. 또 한국과 일본 사이의 원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두 나라 식구를 국제축복가정으로 맺어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만남은 영•호남 만남이었다. 앞으로 2세3세에 가서는 영•호남도 하나가 되어서 남북통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하늘이 원하시고 이상하셨던 평화이상세계를 지상 인류와 천상 영인들이 합심하여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육친의 부모님께도 열심히 효도하여서6500쌍 기성축복을 받게 했다. 처음에는 세상의 소문에 영향을 받아서 축복에 대해 동의하지 않던 부모님께서도 우리 부부가 사는 모습을 보시고 감동을 받으셔서 축복가정이 되는것에 적극적이셨다. 우리가 전도활동을 하면서 일반인을 전도대상으로 전제하지만,사실은 가족친지들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복을 가족친지들에게 먼저 베풀고, 차츰 이웃과 사회로 향해야 활 것이다. 그것이 복귀섭리의 원칙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싶다.
참부모님께서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고 지시하신 것도 당신이 사탄과 싸워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신 복을 축복가정과 친인척들에게 먼저 연결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천일국은 축복가정의 확대로써 실현된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축복가정 및 그들의 친인척이 축복가정이 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참부모님을 따라서 고통과 고난을 동행한 축복가정들은 그들이 가족이나 인척들에게 복을 베풀어주는 자격이 있고 또 사명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갖고 오신 복을 제자들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라셨다. 이방 여인이 자기 자식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당신의 복을 이방인이 먼저 받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4천년 동안 하늘부모님께서 준비해 오신 선민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복을 받는 민족이 되어야 하였다.
나는 육친의 부모를 축복가정으로 세움으로써 하늘 앞에 일차적인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는 안도감을 가졌다.
“종족적 메시아의 입장은 제2의 참부모의 입장으로 예수의 입장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부여받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과도 이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왜 종족적 메시아로서 책임분담을 다해야 하는가? 첫째 이유는, 여러분의 부모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제1의 아담의 입장이고, 여러분은 제2의 아담의 입장에 있습니다. 부모를 복귀하여, 재창조하여 아담의 사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강제로라도 형제들을 축복해 줘야 돼요. 가정을 해결하면 다 나라도 되는 거예요. 우리만의 특권이에요.” (《말씀선집》 제506권, 67~69쪽)
축복이후 동원 명령이 내려졌을 때 나와 아내는 부안 친정으로 향했다. 논두렁에는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일 때쯤이었다. 애들 세 명을 친정에 보내 놓고 혼자 서울로 이동을 하려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생이별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이산가족의 심정이 어떤지를 우리는 체험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부안에 두고서 서외리 들판을 지나오면서 몇번이고 몇번이고 뒤로 돌아보며 서울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큰아들과 두 딸은 부안 외가에서 종족 복귀에 함께 동참한 것이 되었다.
경남 고성은 제1의 나의 고향이지만 부안은 제2의 나의 고향이다. 내가 살아 있는동안 고성 갔던날 보다 부안 갔던 날이 더 많은가 싶기도 하다.
10. 18K 카우스보단 70세트 제작 아버님 특별지시
91년도 화협에 근무하던 때 세계 정상 희의를 5일 앞두고18K 금으로 카우스보단을 70세트 만드라는 특명이 내리졌다. 나는 화협에서 현금 수천만원을 들고 명동을 향했다. 신세계백화점 건너 코스모스백화점 앞 빌딩에 올라가서 순금350돈정도를 구매해 저 지인 보석전문가 에게 연락을 취해 5일 안에 세공을 할수 있겠느냐고 여줘었다. 협회에서는 5일안에 만들어 내라고 하셨다. 도저희 안되는데 5일동안 철야작업을 하면 해 낼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또 협회와 상의해 금액을 떠나 꼭 만들어 내라고만 했었다. 세공 장소는 여의도, 매일 매일 찿아 가며 그 기간내에 완성 되기만을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 신경쓸수도 없었고 아버님 지시로 행사 시작 전까지 꼭 만들어 오라고 명하셨다.
나는 기도 하면서 매달렸다. 꼭 실수 없이 그 시간안에 18K 카우스보단 70개가 잘 완성 되기만을 기다렸다. 자다가 일어 나면 그 시간 맟출수 있을까 꿈에서도 간절히 비는 나의 모습만 보였다. 행사 날짜는 내일인데 저녁 8시가 되어도 물건은 도착하질 않았다.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밤 9시가 넘어서야 물건이 도착했다. 도착 하자마자 대기한 차로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도 마냥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물건을 건네 주고 돌아 오니 나에게는 신경을 쓰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5일동안 벼락같은 일을 해 낸 셈이다.
11 . 면사포 쌤플을 구하기 위해 일본 동경 출장
92년도 9월 그당시 화협에 근무 할 때였다. 화협에 특수 영업부에 근무 하면서 용산 세계일보사내 국제수련원매장에 관리자로 근무했었다. 그때 축복가정 축복을 준비 하면서 신부 면사포를 준비하는 과정에 그 쌤플을 일본 메지로에 있는 마자프랜드를 찿아가 쌤플을 갖어 왔어야만 했었다. 그때 나는 출장으로 일본 동경 중심지 에서 전철로 40분거리 메지로에가서 샘플을 받고 숙소를 정해 찿았는데 그곳은 적은 도시라 호텔은 보이지 않고 해서 여관으로 찿아 들어 갔다. 객실은 다다미 방 그리고 불은 호롱 불이었다. 요금은 1박하는데 8,000엔 오랫만에 다다미 방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잠도 오지 않아 새벽 일찍 4시쯤 일어나 시내로 나가 봤다. 청소하는 분도 만 나게 되었고 일찍 출근 하는 분들도 접하게 되었는데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깨끗했다. 거리에는 낙엽정도 휘날리지 휴지나 다른 담배 꽁초등은 찿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이것이 일본의 생활 습관인 것을 보고 나 스스로 놀라하며 감동 받았다.
낮에는 그동안 사진만 보고 기도해 주던 식구들을 시부야 본부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10시쯤 되니 30여분 찿아 왔었다. 그 동안 사진만 보고 기도 해 줬는데도 사업이 잘 안되는분 남 녀 간의 고민이 있었던분 성적으로 참치 못해 고통 받던 식구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좋아 졌다고 했었다. 교회에와 교회관리자의 허락을 받고 1시간 정도 기도 하고 간다고 했었는데 2시간이 넘도록 함께 기도 정성을 끝내고 1차 2차 때는 일본 팀 기도실에서 잤는데 이번엔 나 업무와 연결 되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만날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생 하는 일본 식구들을 보면서 모든 식구님들이 질병없이 마음의 상처없이 잘 되어지기 만을 기도 하고 돌아 왔다.
12. 가정교회 활동보고서
김현숙
그당시 남편이 공덕1동 가정교회장으로 임명받아 저도 함께 동참했다.1985년 10월1일 10시 청파동 본부교회 대 성전에서 가나안 정착을 위한 총동원 출전식을 갖고 오후엔 임지를 향해 출발 하기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는가 하며 다른 식구님 한분도 다쳐 병원에 입원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을 보게 될 때 사탄이 동원 첫날부터 방해하는 역사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낌마져 들었다. 집에와 간단한 출발 기도를 하고 점심도 먹기전에 가정교회 구역을 확인하기 위해 임지를 향했다. 몇군데 다니다가 먼저 구역을 파악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찿아 갔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 했다. 비를 맞으며 공덕1동 동 사무소에 들어가 먼저 통일교인임을 밝히고 공덕동 봉사 계획을 세워 구역을 선정하기 위해 왔다고 하며 동 직원의 협조와 구역을 파악하기 위해 왔다 전하고 지도를 한 장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동 사무소에는 관내 지도 한장밖에 없다고 하시며 필요하면 구청앞에(지적도)라는 곳에 가서 구하라고 했다. 40분가량 버스를 타고 가 용산구청 앞에 내려 지적도란 점포에 갔더니 그날따라 휴일이라 문은 잠겨 있었다. 아빠랑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다시 찿아가서 지도를 구했고 걸어 오면서 기도하며 다짐했다. 초창기 아버님께서는 부산 범내골 성지에서 세계를 가슴에 품어시고 기도하셨던 그심정을 생각하며 지금 출발하는 이 가정교회로 큰 사료를 만들어 승리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하며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다음날은 공덕 1,2,3,4동 모두를 돌면서 기도하게 되었다. 가는곳곳마다 문앞에서 기도를 했을 때 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음날 방문때도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 만리동시장 배문고등학교 근처 어느분이 짐을 차에서 내리는데 할머니가 넘 힘 들어보여 좀 아빠랑 도와 드리고 싶었다. 짐을 서로 지켜가며 조금씩 조금씩 옮겨 다 옮겨 주었더니 넘 좋아 하셨다. 방 안쪽까지 옮겨 드리고 나오려고 하는 순간 옆방에 아가씨 소리가 나 잠시 노크하였더니 들어오라해서 들어가 어떻게 이 집에 오셨나 하여서 할머니 짐이 많아 좀 도와준 것 뿐이라고 했더니 세상에 이런분이 다 있나 하면서 먹는것도 내 주었고 잠시후부터 말씀을 전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첫 방문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다음 날도 아침일찍 그 집 앞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눈물이 주르럭 흘려 내렸다. 그 이후로 그 집을 중심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고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대문앞에서 정성을 드리고 남편을 시내나가 전단지에 찍을 고무인을 맞추고 새소망 전단지에는 남편과 함께 고무인을 찍어가며 12월달 출산인데도 불구하고 열심을 다했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만일 아들 낳게되면 이공덕으로 이름 지을까 이야기 하기도 했었다.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날땐 남편 밥만 차려놓고 가가호를 찿아가서 기도하고 돌아와서 식사를 하면 마음이 편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 앞에 전단지를 배부하고 일요일은 가정교회 총 활동일로 정해놓고 예배만 끝나면 내 구역으로 달려갔다. 아침 저녁으로 매일같이 주민들을 만나기 때문 공덕동에 거주 하는 분들은 인사를 하게되면 인사를 받으며 한츰 한츰 가까워 지고 있었다. 처음 방문때는 개도 요란하게 짖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개도 조용해 졌고 꼬리치며 반가워 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마음도 흐뭇했다. 방문하여 만나는 주민중 아버님을 잘 아시는 분도 계셨다. 미국에 있을 때 만찬 장에 참석하신 분도 계셨다. 임신 9개월째가 되던 어느날 이젠 언덕위를 오르는 것도 좀 힘드는 느낌 마져 들었다.그래도 결코 포기 할 수는 없었다. 항상 참 어머님을 생각했고 여성은 강하다는 것을 내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힘들땐 남편과 힘을 모아 교회로 한분씩 초대 하기도 했었다. 남편은 신 본부교회에서 4년째 철야정성 드리고 있고 이 정성 터 위에 이젠 실체적으로 활동만 하면 분명 하늘이 역사 하시리라 간절히 빌어 보기도 했었다. 이젠 방문을 하게 되면 지도를 보고 여기 방문한 번지에 체크를 하고 방문 카드도 만들어 이 집에 몇식구 어느분이 살고 있는지 까지 꼼꼼히 기록하며 해 나가니 이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방문 기록 카드만 보면 쉽게 알수있게 만들어 놓고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대문에 자그막게 넘버 표시를 해 쉽게 그 집을 파악할수 있게 만들어 놓고 진행해 나갔다. 그 넘버되로 노트에 넘버 원(1) 하면 이름, 주소, 가족관계등 상담후 세밀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때 주위 사람이 지나가면 쓰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지나간 후 계속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집안으로 노크 하고 들어 가서 말씀을 전하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 났다. 어느집에 갔더니 젊은 여학생 2명이 문을 반쯤 열고 누구냐고 묻게 되었을 때 용기내어 사실은 교회에서 왔는데 이야기 하고 싶어 방문 하게 되었다고 하니 일단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 갔더니 어머니가 절에 나간다며 하며 저도 당연히 절에 나간다고 했다.그러나 난 포기 하질 않았다. 절에 나가시더라도 일년에 몇 번 가느냐고 물었더니 4월 초팔월 1번 나간다고 했다. 그래요 하며 대화로 시작 시간 가는줄 모르고 2시간 넘도록 말씀을 이어갔다. 어제 방문차 종일 걸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 했다. 아빠차로 병원에 갈려고 나섰다. 청파 초등학교 후문쪽으로 50m내려갔는데 학교 통학 도우미 아주머니 들이 길을 막았다. 다른 길을 가라고 했다. 조금후 양수가 터져 나오는거 같았는데 절대로 못가게 막아섰다. 10분이상 씨름하다 다른 길로 방향을 틀어 서대문 적십자병원 으로 향했다. 도착 한지1시간쯤 지났을까 진통후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아기는 잘 순산 되었다고 간호사가 이야기 했다. 조금후 만나 보니 아들 이었다.
천보가정 입적 완료
우리 가정은 9가정이 축복을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 기성6500쌍, 큰 누나 기성1800가정, 작은 누나 777쌍가정, 나 6000가정, 동생 6500일한가정, 아들 이복우 2세 절대축복가정 가화딸도 2세 절대 축복가정, 가진딸도 2세 절대축복가정, 가원 딸도 2세 일한절대 축복가정, 모두 9가정이다.
천보가정은 4가정이다. 큰 누나 이영선가정, 작은 누나 이선숙가정, 동생 이두혜가정, 딸 이가진가정, 나는 천력2년에 천일국 주인상을 받았다,
앞으로 가족과 계속 소통하며 하늘이 부르시면 어디던지 달려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