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일산에서의 한잔 술과
밤 늦게 상암으로 가서 여수의 횟거리로 흐릿하게 취해간 기억은
아침에 일산-파주-문산을 거치며
한많은 임진강을 타고 가면서
다시 되살아났다.
감악산(675m)은 한북정맥의 한강봉과 지맥을 이루고 있고
개성 송악산, 안양 관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에 속하는 명산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검은빛과 푸른빛을 함께 띤다 하여 감색 바위산,
즉 감악산으로 불렸다.
감악은 휴전선에 인접하여 그 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인 관계로
그 명성과는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는데
몇 년 전부터 통제가 완화되면서 등산객들이 찾기 시작했다.
이로는 어머니가 고향에서 오신다하고
몸짱은 오늘 가게 근무라 하여
단미와 둘이서 들머리인 범륜사로 들어왔지만
그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범륜사에서 서남쪽 500m 떨어진 휴게소 마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로를 길게 잡으면 완만해 지는 법이라
편안한 산길, 호젓한 산길로 여유있게 고도를 높인다.
단미는 예전의 만델라를 닮았나?
옆에서 같이 가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옆에서 일을 도와준다.
만델라가 없어진 요즘에는 그녀가 최상의 파트너이다.
경주에서 고생했던 화분증은 감악에서는 증세가 하나도 없다.
아마 경주와 파주의 식물 생태계가 다른 모양이다.
원래 경기의 산들은 맑고 물이 깨끗하며 공기가 맛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기가 가장 맛있는 산이 포천 운악산이랬던가?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을 오르다 보니
곳곳에 토치카와 방공호가 조성되어 있어
분단의 한은 세월이 흘러도 그 흔적을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방공호 사이를 연결하는 삐삐선은 산 전체를 메워
민족의 평화공존의 꿈은 아직도 요원한가?
아침에 단미의 친정에서 대접 받았던
서대, 왕칼치, 양태탕, 새우무침, 갓김치에 넋을 잃어
두 그릇이나 때렸던 이 배가 꺼지지 않고 더부룩해
산에 오르는 내내 죽을 지경이지만
시간이 약이라 이제는 서서히 꺼지기 시작한다.
까지봉에 오르면 많은 암봉들이 어섯어섯 늘어서 있는데
멀리서 보면 역시 이름 그래도 까치의 형상이다.
그리고 바로 올려다 보이는 정상 주변에는
팔각정과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한여름의 날씨에 정상에 올라 보니 주변의 조망이 훤하다.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과 멀리 보이는 판문점, 그리고 개성의 송악산
예전 같으면 긴장감이 팽팽했을 상황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긴장 완화가 뚜렷하다.
우리 문둥이들이 지극히 싫어했던 김대중,
그의 햇볕정책은 나름대로 지금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상에는 삼국시대의 큰 비가 서 있는데
아쉽게도 문자가 완전히 마멸되어 그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데
학계에서는 그 형태로 봐서 진흥왕 순수비라고 추측하고
또 일각에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곳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출세를 했고 그 제사가 이곳에 모셔졌다고 하여
설인귀 사적비라고도 하는데, 아직도 사학계에서는 연구의 대상이다.
경주까지 내려가야 하므로 서둘러 동편 임꺽정봉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안부에서 우측으로 꺾어 범륜사 방면으로 내려온다.
감악은 이 코스에서 악산의 진면목을 보이는데
수 많은 바위를 헤치고 가파른 길을 급하게 내려온다.
감악은 그 지형으로 보아 시대를 막론하고 전략적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는지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6.25전쟁 때도 격전지여서
아래 계곡에는 영국군 전적비가 있고
감악산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의열간 전적비도 있으며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도 이곳 양주 출신으로 감악과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파트너 단미와 산 전체를 도는데 겨우 2시간 반만 걸려
우리는 쉽게 산행을 끝내고 왔던 길과는 반대쪽으로 차를 달려
파주-양주-의정부-토평-판교-중부고속도로를 내리 달려
환할 때에 경주에 도착한다.
중간에 곤지암의 그 맛있는 소머리국밥이 생각났지만
왕창 먹어댔던 여수산 해산물의 여파가 여전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입맛을 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