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거나 미치거나'는 올해 1월부터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다. 고려시대 황자(皇子)와 공주가 펼치는 사랑을 그린 이 드라마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기다. 미국 시청자들은 매주 월·화요일 드라마가 방영된 후 3시간 이내에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 비키(www.viki.com)에서 'Shine or Go Crazy'라고 번역된 제목에, 영어 자막까지 붙은 '빛나거나 미치거나'를 시청할 수 있다. 전문 작업자가 바로 영문 자막을 붙이고 편집을 시작해도 하루 이상이 걸리는데, 어떻게 3시간 만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전 세계 각지에서 비키에 접속한 온라인 사용자들은 각자 임무를 나눠 동시에 번역 작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미국 사용자가 영어 자막을 삽입하면, 영국 사용자는 문장에 문법상 오류가 없는지 확인한다. 캐나다 사용자는 자막 편집 도구로 드라마 장면과 자막이 일치하는지 대조한다. 이렇게 다국적 드라마광(狂) 100여 명이 힘을 합치면 전문 번역가보다 작업 속도가 빠르고 정확성도 높다.
비키의 태미 남(Tammy Nam) 최고경영자(CEO)는 "비키에서 서비스하는 드라마의 자막은 전문 번역가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한다"며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도 흉내 내지 못하는 비키만의 경쟁력은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에 있다"고 말했다.
다수의 사용자가 모여 하나의 작업·서비스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크라우드 소싱'이 진화하고 있다. 크라우드 소싱은 소수의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방대한 작업을 하는 수단이다. 개미 한 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지만, 수억 마리가 힘을 합치면 사람 키 만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크라우드 소싱'(2013)의 저자인 다렌 브랍함(Daren C. Brabham)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교수는 "크라우드 소싱은 방대하고 난해한 문제를 온라인으로 배분해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부상했다"면서 "복사나 인쇄를 하는 사무편의점이나 물건을 배달하는 물류업체처럼 앞으로는 크라우드 소싱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무소를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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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회원 가입하며 고(古)문서 디지털화 참여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삐뚤삐뚤한 글자를 읽고 정확하게 입력하라는 요구를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악성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동으로 회원 가입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사람의 눈은 비뚤어진 문자를 이해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휘거나 줄이 추가된 문자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었다. 이 기술을 '캡차(CAPTCHA)'라고 부르는데, 전 세계 10만 개가 넘는 사이트에서 활용하고 있다.
캡차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미국 카네기멜런대학교 컴퓨터과학부 부교수 루이스 폰 안(Luis von Ahn)이다. 그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하나 더 보탰다. 비뚤어진 문자들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 따라 쓰도록 한 것이다. 첫 번째 문자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가입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단어는 오래된 문서에서 스캔한 문자들이다. 이 문자를 사람이 읽고 자판으로 쳐서 입력하면 고(古)문서를 디지털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십, 수백만 명이 10초씩 시간을 내면, 방대한 양의 고문서를 짧은 시간에 디지털로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루이스 폰 안은 이 기술을 '리캡차(ReCAPTCHA)'라고 부르고 같은 이름의 회사도 만들었다. 실제로 구글이 오래된 책을 스캔하고 뉴욕타임스가 옛날 신문을 디지털화하는 데 리캡차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 구글은 이 회사를 사들였다. 루이스 폰 안은 대중의 힘을 잠깐 빌려 문제를 해결한 아이디어 덕분에 '크라우드 소싱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2013년 외국어 학습 사이트 '듀오링고(Duolingo)'도 만들었다. 듀오링고는 이용자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앱이나 웹사이트에 광고도 없다. 그런데도 수익을 낸다. 비밀은 이용자들이 학습하는 문장 중에 듀오링고가 번역을 의뢰받은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CNN이 영어 기사를 스페인어로 바꿔달라고 의뢰하면 듀오링고는 스페인어 학습자 중 상위 15%를 대상으로 번역해야 할 영어 기사를 문제로 내준다. 사용자가 영어를 스페인어로 바꾸면서 외국어를 학습하면, 회사는 CNN이 의뢰한 문서를 번역한 것이 된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외국어 학습자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루이스 폰 안은 "많은 학습자가 같은 문장을 번역한 다음 학습자들이 투표를 통해 최고 번역문을 뽑는다"면서 "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번역 품질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대중 동원 수월해져
대규모 크라우드 소싱이 가능해진 것은 인터넷 덕분이었다. 크라우드 소싱의 고전적 사례로 꼽히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나 전 세계에 흩어진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을 동원해 각종 문제 해결법을 알려주는 이노센티브도 인터넷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대중 자원을 활용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GPS(위성항법장치)나 기압 센서, 온도 센서 덕분이다.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내비게이션 앱 웨이즈(Waze)는 사용자들이 앱을 켜놓고 주행하면, 스마트폰의 GPS 기능을 이용해 주행속도 등을 수집·분석해 최적의 경로를 추천해준다. 지도 서비스에 골머리를 앓았던 구글은 2013년 웨이즈를 약 10억달러에 인수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끈 김기사 앱도 마찬가지다. 김기사는 사용자의 스마트폰이 전하는 실시간 교통 정보를 1분 이내에 내비게이션에 반영해 최적의 길을 계속 수정해 안내해준다.
최근 미국에서 출시된 선샤인(SunShine) 앱은 크라우드 소싱을 이용해 좀 더 정확한 일기예보를 전달해 주는 서비스다. 최신 스마트폰에는 대기압(공기 무게로 발생하는 대기의 압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압계가 들어 있다. 앱 사용자들이 보내는 대기압 정보와 미국 기상청의 정보를 통합하면, 샌프란시스코처럼 골목마다 변덕이 심한 곳의 날씨도 알아맞힐 수 있다.
엘피어스 빙엄(Alpheus Bingham) 이노센티브 창업자는 "연구원을 직접 뽑거나 사람을 파견해 교통 상황을 점검한다면, 기업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엄청날 것"이라면서 "크라우드 소싱은 획기적인 비용 절감 수단"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발달해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있어
1770년대 유럽 궁정에는 터키인 복장을 한 체스 기계가 인기를 끌었다. '메커니컬 터크(Mechanical Turk·기계 터키인)'라고 불리는 이 기계는 수퍼컴퓨터도 아닌데 체스를 잘 뒀다. 사실은 체스를 잘 두는 난쟁이가 이 기계 속에 숨어 있었다.
세계 최대 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체스 기계의 이름을 그대로 따 '메커니컬 터크'라는 서비스를 2005년부터 운영 중이다. 아마존의 메커니컬 터크는 일종의 온라인 작업장이다. 의뢰자가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고 주문하면 전 세계 수백 명의 진짜 사람들이 달라붙어 해결하는 식이다. 아마존은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작업이 따로 있다는 점을 간파했고 '사람이 들어 있는 기계' 메커니컬 터크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아마존 메커니컬 터크에서 온라인으로 일하는 사람을 '터커(Turker)'라고 한다. 시간이 날 때 들어와 일하는 임시 계약직인 이들 터커는 그 수가 전 세계 50만명에 이른다. 이들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2달러이며 아마존은 중개 수수료로 10%를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미국에서 아마존의 메커니컬 터크는 없어서는 안 될 서비스가 됐다.
실리콘밸리의 떠오르는 벤처기업 캡트리시티(Captricity)는 기업이 의뢰한 종이 문서를 페이지당 0.2달러를 받고 디지털 형태로 바꿔주는 회사다. 캡트리시티는 의뢰받은 문서를 아주 잘게 쪼개 메커니컬 터크에 올린다. 터커들이 컴퓨터가 스캔해서는 알 수 없는 글자를 대신 읽고 입력해준다. 이런 작업을 수차례 거치다 보면, 이 회사가 개발한 문서 읽는 알고리즘이 계속 진화하는 것이다.
캡트리시티는 컴퓨터와 크라우드 소싱을 이용한 이 방법이 별도 소프트웨어와 장비가 필요한 광학문자판독(OCR)보다 훨씬 정확하고(정확도 99.9%) 또 저렴하다고 밝혔다.
주목해야 할 것은 크라우드 소싱이 인공지능 기술을 만나 '넥스트 빅 싱(next big thing·세상을 바꿀 차세대 기술)'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은 2013년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사용자 요청을 충족시키는 크라우드 소싱 정보'라는 특허를 받았다.
애플의 '시리(siri)'는 사람이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인공지능 서비스다. 문제는 컴퓨터 알고리즘 개선이나 데이터 입력만으로는 시리의 지능을 진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것.
애플은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크라우드 소싱을 택했다. 애플은 시리가 사용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 전문가나 정보원, 즉 사람이 직접 답변을 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인공지능 개발에 필요한 결정적인 기능을 크라우드 소싱으로 해결한 것이다.
릴리 이라니(Lilly Irani)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주립대(UCSD) 교수는 "개나 고양이 등의 사진을 보고 대상이 누구인지 판별하는 작업은 단순하지만, 컴퓨터가 정확하게 할 수 없어 사람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면서 "자금력이 약한 실리콘밸리 기업 중에는 크라우드 소싱을 이용해 혁신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
대중을 뜻하는 영어 ‘크라우드(crowd)’와 외부 자원 활용을 의미하는 ‘아웃소싱(outsourcing)’을 합친 말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해 콘텐츠를 완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주로 온라인 공간을 통해 이뤄진다. 잡지 와이어드의 에디터인 제프 하우(Jeff Howe)가 2006년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크라우드 소싱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집단의 지식을 합쳐 문제를 푸는 집단 지성, 집단의 창의력을 활용하는 대중 창작, 대중의 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리는 대중 투표, 여러 사람으로부터 소액을 모아 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 펀딩 등이다.
기업이 제품 개발 과정에 크라우드 소싱을 활용하면 적은 비용을 들여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고 제품에 호의적인 잠재 고객도 확보할 수 있다. 소비자가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수집해 신제품 개발에 이용하는 공모전이 크라우드 소싱의 대표적인 사례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일상화하면서 뉴스 제작 과정에 크라우드 소싱을 적용한 ‘크라우드 소싱 저널리즘’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