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도
누가복음 17장 1~10절
국제 투명성 기구의 발표를 보면
2014년 우리나라 투명성 지수는 100점 만점에 55점으로 6년 연속 정체·하락하여 175개국 중 43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대상으로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인 26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한국 사회는 서로 신뢰할 수 없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우리나라가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손봉호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1등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1등 한 명 빼 놓고는 모두가 다 불행한 나라 이기 때문.
오늘 본문은 이렇게 불행한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양선이 빠진 자비는 무기력 합니다.
양선이 빠진 자비는 제자의 도가 아닙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우리를 향해 다른 사람을 믿지 마라
저 사람을 밟아야 네가 올라설 수 있다
충동질을 합니다.
개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가까운 곳에 교회가 하나 생겼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하지만
늘 마음에 두려움도 몰려오고 간절함이 몰려옵니다.
가까운 교회에 간판을 세우는 것을 보고
저희 교회에 간판을 따로 세울 수 없기에
더욱 초조하고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와 전도사님이 며칠 동안 작업을 해서
유리창 안쪽에 LED등을 설치해서 밤에도 교회 이름이
비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겠습니다.
마음은
이 땅에 주의 복음이 흐르기를 기도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가까운 교회 혹은 다른 사람이 부흥하고 잘되는 것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달리 행동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삼가야 할 일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자비와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살펴봐야 합니다.
자비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5번째 열매입니다.
자비는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라는 단어로서
유용함, 적절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비는 물건에 쓰일 때 = 탁월함이라는 뜻으로
사람에 쓰일 때 = 선함, 순전함, 친절함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자비 = 1) 한마디로 친절한 성품
2)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
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제자는 자비에 머물러서는 않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선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6번째 열매로서
아가도수네 라는 단어입니다.
직역을 하면 선한 행동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양선은 그 자비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도의 핵심은
양선이 빠진 자비는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선한 동기는 있지만 행함으로 연결되지 하는 제자의 모습은
오히려 적은 자를 실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비가 없는 양선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저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자가 아닙니다.
제자는 사도와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가르치는 자이고 영향력이 있는 자였습니다.
고전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자비의 마음이 있는가?
제자로서 양선의 행동이 있는가?
스스로 넘어지지 않고
적은 자를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자비의 마음과 양선의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더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둘째 제자는 믿음을 더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에게
진정한 믿음은 양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더하고 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생명이기에 있든지 없든지입니다.
흔히 믿음을 수치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 있다고 수치화하려 합니다.
혹은 믿음을 개량화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많고 큰 것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 죽은나무 = 전기가 흐르지 않음 = 생명X
산 나무 = 전기가 흐름 = 생명O
이처럼 과학자들=생명O=전기흐름
생명은 크기와 질량과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며 번식하고 자라납니다.
저희 집에 정수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가지고 집에가서
그것으로 식수를 하고 있습니다.
페티병으로 매일 받아가는데
어느 날 뉴스에 보니까 페티병을 깨끗이 소독하지 않으면
유해한 세균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번식한다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더하고 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도 생명이기에 죄가 있으면 사마입니다.
조금 죄가 있으면 죽지 않고
많이 죄가 있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죄는 생명이기에
죄가 우리 안에 있으며 반드시 죽게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금요 기도회에서 붉은 암송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죄인인 우리에게 신속하게 속죄하기 위해서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리라
죄는 생명이기 때문에 지금 죽이지 않으면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자라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믿음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나님이 역사하는 믿음은 더하는 믿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내 안에 이 생명이 있는가?
나는 양선이 빠진 자비의 마음만 있지 않은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