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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우연히 과거의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25년 전에 신앙에 관해 쓴 글이 있어 옮겨봤습니다.
대학 3학년때인가,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서 교리반 과정을 거쳐 세례를 받았는데,
좀 미지근하게 살다가 어느날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적인 공격을 받고,
대오각성하여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이때 성령의 은사를 좀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지식의 은사?).
당시 서울대교구 일산성당(주임 최성균 신부,현재 이분은 종로성당 노인 사목 전담하심)에
나가면서 청년들과 함께 했는데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진작하려 이글을 쓴 것 같습니다.(청지기)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985年 6月 25日
全 基 泰 스테파노
글 머리에
“자네 요즈음 왜 성당에 나오질 않나?”
“글쎄, 뭐 나가봐야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없고, 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미사 참례하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너무 무미건조한 것 같아 솔직히 요즘 쉬고 있는 걸세.”
“여보게, 자네 주일 미사 빠트리는 것이 대죄인줄 모르나?”
“알긴 하지. 하지만 나는 말이야 최근 들어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닌지
이것조차 분명히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니 대죄인지 소죄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네.”
독실한 신앙인이 이 대화를 듣게 되면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내용의 대화를 듣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화자 가운데 한 사람은 신앙의 열이 식은 냉담자인 듯 합니다.
사실 교회 내 냉담자가 적지 않은 것이 예삿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통계로 어느 본당이나 주일 미사에 절반가량의 교우들만이 참석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지기주: 이글을 쓴지 25년 됐는데, 요즘은 냉담율이 더 높아져 주일미사 참례비율이 27%선까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들 중에서도 신앙생활은 미사때뿐인 이른바 ‘일요신자’는
또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미사는 참례하되 교회 전례생활에의 참여나 평신도 사도직활동에의 참여는 거의 외면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분들 중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말미암아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은데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면 그런 분들에게는 하느님과 신자 개인과의 관계 정립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신앙의 핵심인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개괄적이나마 약간 언급한 후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외람되이 내 놓을까 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정통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전반에 관한 지식이 일천하여
얼마나 진실하게 쓸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통하여 깨닫고 느낀 점이 한 둘이 아니고 ,
또 새로운 신앙을 얻기 전의 필자와 같은 교우에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뜻에서 필을 든 것이니 빈약한 내용,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믿음이 약해졌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모호해졌다는 말과 서로 통합니다.
이미 예비자교리 시간에 다 배운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격언이 있듯이 하느님의 존재에 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문제로 들어가기로 합시다.
하느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앙인들에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사때마다 사도신경에서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고 고백함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존재문제는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인과관계적 고찰일 것입니다.
만물은 그 생성과 운동에 있어서 앞뒤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생성을 먼저 봅시다.
지금 지구상에는 수십억 인류와 수만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번식을 통하여 종족을 보존합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우리의 존재는 우리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들은 또한 그 윗대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맨 처음의 인류의 원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타-직접적원인부모라고 해도 좋음-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았듯이
그 원조들 역시 타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기 힘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타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계속 연장시켜보면 생명의 근원인 ‘제1의 원인’의 개념까지 도달하는데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제1원인을 통속적으로 ‘神’이라 합니다. 신의 존재를 명확히 실증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이성으로 만물의 자연법칙(因果律)을 적용시켜 신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중세의 스콜라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다음에 만물의 운동과정을 살펴봅시다.
이 역시 치밀한 인과율의 적용을 받습니다.
비행기가 날고 있지만 우연히 혹은 제 멋대로 날고 있지는 않습니다.
날개의 양력으로 수십 톤의 쇠붙이가 가볍게 떠오릅니다.
방향타의 각도에 따라 아주 정확히 방향전환을 합니다.
지구 상공 3만 6천 km에 위성을 얹어 놓으면 그 위성의 궤도속도가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면 마치 정지해 있는 듯 합니다.
인공위성이 지구를 벗어나지 않고 지구둘레를 일정한 주기로 돌 수 있는 것도
위성에서 지구로 향한 구심력 밖으로 향하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번개가 우연히 치는 듯 합니다. 이 역시 따지고 들면 ‘우연’이라는 말을 쓸 수 가 없습니다.
지표상의 전하는 (-)를 띠는데 특히 뾰족하거나 높은 지대에 소밀하게 몰려있고
몇 100m 상공의 적란운은 아래쪽에 강력한 (+)전하를 띠고 있습니다.
(+) (-)전하가 방전을 일으킬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이 되었을 때 번쩍하고 방전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번갯불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적어도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는 ‘우연’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치밀한 자연법칙 혹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우연히 생겼다거나 지구나 기타 천체들도 우연히 생겼고
역사적인 사건도 우연히 발생했다고 한다면
이는 이만 저만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암석을 방사능 측정한 과학자들의 말을 빌면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우주는 어떤 상태였겠습니까?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에 관하여 몇 가지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중 오늘날 유력시되고 있는 설은 「가모브」등에 의해 주도된 우주팽창설 (Big Bang)입니다.
이 설은 원시우주는 모든 원소가 어느 한 곳에 응집되어 있었는데 대폭발로 인하여 그것이 흩어졌으며
폭발하는 과정에서 천체들이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일정한 법칙 하에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맨 처음의 응집상태를 우리는 또 생각해봐야합니다.
그 처음상태의 원인은?
그리고 더욱 더 오묘한 사실은 처음에 대폭발을 일으킨 우주가 초고온먼지상태로 되어,
서서히 현재의 천체로 생성되는 과정과 그 운행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폭발했다면 왜 제멋대로 비산하지 않고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서로서로 의지하며 정교하게 운행되는가? 라는 점입니다.
우리 태양계만 하더라도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행성과 수십 개의 위성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만유인력의 법칙 하에 질서정연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계와 같은 그룹이 수천 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주과학에 의하면 우주천체의 별은 1조의 1000억 배나 된다고 합니다.
또 그 수많은 별들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천체운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 호를 건조하는데 수만 명의 과학자가 동원되고
인간의 모든 능력을 쏟아 넣어야하는데
저렇게 거대한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배열하고 운행시키는 그 무엇의 위대한 능력가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가톨릭신앙은 자연과학과 다투지 않습니다.
정확한 검증을 거친 자연과학은 하나도 빠짐없이 수용합니다.
그 까닭은 자연계의 온갖 법칙 자체는 인간이 발견해 내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며
그것은 절대자의 섭리의 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처음의 지구는 오늘날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금성과 같이 삭막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차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각종식물과 동물들이 번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화석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공룡의 시대도 있었고
오늘날의 인류 이전에도 인류와 비슷한 뻬이찡 원인, 네안테르탈인, 자바원인 등의 화석과 유골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라는 근거는 아직 아무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앙은 이른바 진화론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처음의 지구와 오늘날의 지구를 비교한다면 생물의 종류와 수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나지만
일정한 자연법칙 하에 진행되는 것이고
어느 한 종류의 생물로부터 약간씩 달라진 별종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크게 보아 절대자의 오묘한 섭리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인과관계 측면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해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는 필연적으로 인과율이 적용되고
인과율의 시발점에는 제1원인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존자(自存者) 즉, 神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오묘한 우주의 대 법칙을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적 접근입니다.
이것은 절대자가 직접 인간에게 나타나거나 계시를 하여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 스스로가 이성에 의하여 신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임에 비하여
두 번째는 하느님이 먼저 인간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려주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를 자연종교라 하고 후자를 계시종교라 합니다.
자연종교에서는 신의 속성과 본질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인격신인지 비인격신인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알아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계시종교에서는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면서 속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지전능 한다든가, 인간 이상의 감정을 풍부히 한다든가 등입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구체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즉 하느님이 인간과 사물을 창조하였는데 인간은 창조이념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시대로 살면 어떤 보상을 받고 그 이념에 어긋나게 살면 응단의 처분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동양에서는 자연종교만 있었고 계시종교는 없었습니다.
유가에서도 ‘天’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 天은 우주의 근원적인 대법칙을 뜻하였습니다.
인간과 우주의 대질서가 합하여 질 때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천수백년에 걸쳐서 절대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여러 가지 계시를 내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10계명이고 그 내용은 인간의 삶의 목적과 규준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되 그 창조주를 알아 모시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현세에 있어서도 절대자의 도움을 받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징벌을 면키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느님은 구원자를 내려 보낼 것이라고 악속 하셨습니다.(계시의 기록이 구약)
그 약속의 실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믿는데 주저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여
자신이 인간과 다름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서서히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그를 시기하던 당시의 세력가들에 의해 인간적인 면으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죽은지 3일후에 발생하였습니다.
부활한 뒤로부터는 사람들은 더욱 더 그가 신임을 믿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편의상 맨 처음 신앙입문시절로 되돌아가서 출발합시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찾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느님인가?
(2) 그분이 하느님이라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첫째 질문은 신앙인에 대해서 한다면 우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을 풀기 위한 전제 조건적 질문이므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네 분을 손꼽아 보아라 하면 대게 석가공자소크라테스예수를 듭니다.
석가는 진정한 구도자였습니다.
어느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의 불행한 모습을 보게 되자 그것을 구해보려고 도를 닦았으나
어디까지나 그는 한 겸손한 인간으로서 진리를 구하고자한 수도자였습니다.
공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진리탐구에 일평생을 바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거짓과 교만을 멀리하고 진리를 터득하려고 무진 애 썼으며
후세 사람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진리 자체 일수 있습니까?
석가도 공자도 진리를 얻기 위하여 한 평생 애써 왔지만
자기 스스로가 그릇됨 없는 진리라고 감히 이야기 하지 못하였습니다.
‘생명이다’라는 말은 생명의 근원(요한 5,26)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모든 생명체를 탄생시키게 하는 ‘제1원인’ 즉, 창조주라는 말이 아닙니까?
사람이 감히 스스로 창조주인 神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거짓말로 자기가 하느님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이 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를 믿어왔던 수10억의 사람들은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쟁이에게 속아서 목숨까지 바치며 거짓말을 지상 최대의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가 거짓말을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인간들이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적인 상황으로 봐서 진리라는 사실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만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류가 경험해온 바에 의하면 거짓은 일시적으로 혹은 소수사람들에게 먹혀듣지 모르나
그렇게 장기간(2000년)동안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지는 못합니다.
어떤 압제자가 국민을 속여 진실을 은폐하고 쉬쉬해도 그가 죽고 나면 금세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러할 진대 어떻게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들은 하느님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이라고 믿기만 하면 되느냐 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내려오셔서 직접적으로 여러 가지 계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는 하느님이고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관계라는 말 속에는 대개 의무와 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속에는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자식은 일정한 한도 내에서 부모의 친권에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부와의 관계,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 등도 매 한가지 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정한 권리 의무로 서로 얽매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인간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아닙니까?
속된 표현으로는 주종관계 입니다.
종은 마땅히 주인의 말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의 ‘주인과 종’관계는 흔히 인간세계에서 보여지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과거의 종은 노비나 노예였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종래의 신분관계를 떠나서 계약관계로 이행하였습니다.
경영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에서 서로의 이해타산이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끼리의 관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첫째,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인데 비하여
신과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이고,
둘째, 이 때문에 이해타산과 같은 세속적인 동기가 없으며
‘사랑’과 같은 고치원적인 가치가 양자를 맺어주는 중요한 끈이 됩니다.
셋째, 일방적인 관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에 상응한 보상을 내려주고 반대로 명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는 것뿐이지,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인간이 그에 따라서 어떤 응답을 한다는 것과 같은
반대사정은 없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무신론자들의 입장)매우 형평에 어긋난다고 하기 쉬우나,
온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의 전지전능함과 공평무사함과 대자 대비함 및
인간에 대한 여러 명령들이 오로지 인간사회의 윤리적 질서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결코 일방적인 관계가 그릇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게다가 인간의 불완전함도 고려)
위에서 열거한 하느님의 속성들은 구약시대에는 계시를 통해서(구약성경),
신약시대에는 직접 행동을 취하심으로 인간들에게 알려졌습니다(신약성경).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었습니다.
잘라 말해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현세, 내세에서),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와 성전(교회의 가르침)가운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하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경배 드리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이스라엘민족을 선택하셔서 계약을 맺고
인간이 그것을 지키면 많은 은총을 내리고, 어기면 징벌을 내렸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의 판단능력으로는 어떠한 재앙이 하느님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인지 밝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편 그러한 가운데서 뚜렷이 밝혀낼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경우는
그 결과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의 하느님의 절대명령은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로마 13,9)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 13,10)
즉,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가정불화를 야기 시키지 않습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하여 감옥에 가는 일이 없습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고 잘 양육시키는 가정에서 가출 청소년이 생기지 않고 그런 가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가 줄어들 것입니다.
근로자를 사랑하는 사용자는 근로자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게 되어 적정임금을 보장하고
작업장의 환경을 개선하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몰고 가서 자신의 이욕만 채우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이행하여 이웃사랑을 끊이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얼마나 살기 좋겠습니까?
이러한 추측은 우리의 경험상 어렵지 않게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면 현세에서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는 우리 개인과 사회에 큰 암흑과 재앙을 가져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미움과 질시, 증오, 싸움, 파괴, 살육, 비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잘 대변해 줍니다.
이 경우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금이 가거나, 옳지 못한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원래의 권리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위반하면 ‘관계’가 무너집니다.
부모가 부모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정을 팽개치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외형적으로는 몰라도 사실상 와해됩니다.
친구를 불신하고 모함하면 친구관계에 금이 갑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비정상적인 관계로 되면 반드시 모순과 부조리가 따르고 인간에게는 불안과 슬픔이 따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태초의 인간들은 오만에 빠져 결국 하느님과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딱하게 여긴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관계를 다시 정립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다행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3,22)
그런데 여기서의 믿음은 그리스도(절대자)의 존재만 믿는 좁은 뜻의 믿음이 아니고 ,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믿고 실천하는 넓은 의미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근거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와 같이 성서에 있습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을 구체적인 사정에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이 하느님에게 죄를 짓고 낙원에서 황무지로 추방되었습니다.
후손들은 그 황무지에서 ‘은총의 비’를 갈망하였으나 조금씩 내린 비는 곧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 보내시어 거대한 ‘생명의 호수’를 만들어 그 속에 생명의 비를 한꺼번에 가득 저장해 두었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수도꼭지만 열면 신의 은총이 내려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수는 황무지 전체를 옥토로 가꾸고도 남을 양이지만
인간들은 게을러서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는데 주저하고 있으며
손발을 걷어 올려 생명수를 긷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생명수조차도 마시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 애써 물을 길어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짓밟는 나쁜 무리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생명수를 부지런히 길어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여 낙원을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땅을 옥토로 개간하는 것은 온전히 ‘자유의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한 사람은 가을에 가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한 것을 하느님은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여름철 베짱이처럼 놀거나 남의 농작물을 훼손시킨 사람에게는
나중에 그에 상당한 벌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내린 계시입니다.
관계에서는 여러 정도가 있습니다. 금이 간 관계, 미지근하고 애매모한 관계, 올바른 관계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중 어떤 관계에 놓여있습니까?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고 다들 이야기하니 대충 그런 줄 알겠는데 ,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고 부활절만 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종교는 본래 인간의 정신면에 관련되는 것인데,
교회의 외형적인 행사나 의식이 과연 하느님의 본뜻에 맞는 것인지 어떤지 회의를 느끼며
주일미사 참례를 종종 빠뜨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정말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로 오염되어 있을까 하고
홀로 철학자가 된 듯 턱을 괴고 고민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혹은 바쁘다는 핑계로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이웃은 고사하고 친형제나 부모도 자기처럼 사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 다 좋습니다.
불완전하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주위 환경에 좌지우지되고,
극도로 고민하고 회의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겠다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놓고도 얼마가지 않아
또다시 죄의 수렁에 빠집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들이란 원래 저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꾸준한 노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비 그리스도인, 냉담교우 등)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후에 진정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뉘우침으로 끝난다거나 뉘우침이 오래가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뉘우침을 바탕으로 자신을 성화시켜 앞으로 그러한 사태가 자기 앞에 펼쳐지더라도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덕을 쌓도록 자기 수양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거룩히 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크게 깨닫고 뉘우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다음부터는 ‘마음의 문’만 열면
하느님께서 쉽게 인도 해 주실 것입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참석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은총을 얻어 자신을 성스럽게 가꾸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
기도를 자주 드리는 사람,
자선행위를 많이 하여 이전의 죄를 기워 갚는 사람 등 여러 길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 중에서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외람되이 내 놓을까 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
(신앙의 내실화를 위한 몇 가지 방법)
꾸준히 교리를 공부하고 연구합시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정의 교육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기간동안 교리 수업을 받습니다. 교리는 가톨릭 신앙의 요지를 체계적으로 간추려 놓은 것입니다.
예비자들에게 성서보다는 교리책을 먼저 주는데,
그것은 젖먹이에게 젖이나 이유식을 일정기간 준 후 밥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입문자가 처음부터 성서를 읽게 되면 자기 위주로 신앙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대대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밝혀내고 연구한 것을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가톨릭 교리서입니다.
하지만 처음 입교하는 예비자들에게 깊은 정도의 교리지식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가톨릭신앙의 개요만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 예비자 교리교육의 실태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신자 개개인의 장래의 숙제로 남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혹은 많은 교우들이 그 숙제를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일단 영세를 하면 교리공부와는 이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영세 후 몇 년이 지나도 예비자 교리수업 때 공부해 본 간추린 요리문답식 교리서가 전부인양 생각하고
보다 광범위하고 본격적인 교리서는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세 때 처음 배운 기초적인 교리지식마저 복습을 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비자 교리수업 때 배운 교리내용과 믿음이 견고한 성인교우들 수준에 맞는 본격적인 교리서의 내용을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중학교 수학과 대학의 수학의 차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철두철미하게 인식하고 성당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마음의 안식처를 얻기 위한다거나
오늘날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무엇엔가 기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성에서 기인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동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초심자들이 좀더 신앙을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겨우 교회 전례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전부로 한다면
하느님이 가르친 구체적은 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가서는 하느님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신앙적인 방황을 하기 쉽습니다.
한편, 비록 입문하게 된 동기는 세속적이고 하잘 것 없는 것이지만,
신앙을 스스로 연구하고 부지런히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신앙 한 가운데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될 터이고, 눈이 밝아져 모든 사물을 옳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게 되어
흠잡을 때 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전제로서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은 일생을 통하여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과의 관계(우정)에는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즉, 아주 친한 친구(죽마고우)가 있는가 하면
직장 동료와 같이 추구하는 목표가 같기 때문에 어느 한도 내에서 가까워 질 수 있는 친구도 있고,
길거리에서 만나면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여러 등급의 친구들 중에 우리는 어떤 친구를 가장 신뢰합니까?
아마 약간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소위 ‘죽마고우’라고 하는 친구를
가장 잘 믿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 친구의 환경과 자라온 과정 및 그 친구의 성격이나 사고방식 등에 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친구끼리 서로 잘 알고 지내면 이해를 잘 하게 되고 마침내는 서로 믿고 신뢰합니다.
잘 알면 잘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에 적용됩니다.
오래전에 과학기술이 발전되지 못 하였을 때 사람들은 배는 반드시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쇠붙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뜨는 원리(부력)를 잘 몰랐기 때문에 강철선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스테인리스 그릇이 물위에 뜨듯이 배가 뜨는 원리를 잘 아는 현대인은 수만 톤씩 하는 쇠붙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것을 조금도 의심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잘 알기 때문에 잘 믿는 것의 본보기 입니다.
신앙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으며,
그리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아야만 그 가르침에 맞게 행동할 수 있고
그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그 가르침의 내용을 얼마나 알려고 노력해 왔습니까?
혹시 이미 다 배운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인간의 뇌는 ‘망각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알았던 사실도 반복하지 않으면 죄다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따라서 자주 반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리공부라고 할 때의 교리서를 1권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실 기본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총론 혹은 개론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더 넓고 더 깊은 각론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이고 성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데 이를 자세히 체계적으로 알려면
천상 성령에 관하여 해설해 놓은 책을 찾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주위에는 갈라진 형제들(개신교)이 수없이 많은데 왜 갈라지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하는 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교회사를 비롯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관한 책을 읽어보아야 정확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의 신앙선조 103인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어찌해서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는지,
당시의 우리 선조들의 신앙생활과 증거하는 모습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신앙태도를 자세히 모르고는 우리 한국인에 알맞은 토착적인 가톨릭신앙을
정착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 명의 성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이란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들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경에 다다른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우리 성교회는 그런 분들이 남긴 신앙상의 업적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이 간 길을 모범으로 삼아 많은 신앙적, 인간적 발전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책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모든 교우들이 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런 분들을 위하여 교리공부에 관하여 몇 가지 덧붙입니다.
우리가 교리책 1권으로 교리공부를 끝내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깊이 있게 혹은 폭 넓게
교리를 공부하고 연구해야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의 신앙은 1, 2년 안에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평생 동안에 틈틈이 배워야 할 것이므로 결코 분량이 방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성숙과 발전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간잡지나 월간잡지는 사 볼 여유가 있어도
자신의 인생목적과 관련된 신앙서적을 사볼 여유가 없다고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알아야 면장을 해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합니다.
천주교로 영세,입교를 권유한다는 것이 고작 “성당에 같이 나가지 않을래? 참 좋더라.”
정도로 그친다면 민족의 복음화는 암만해도 우리 세대에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 좋은지, 어째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와 같은 종교와 인생의 근본문제를 술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제대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현재 우리 교회 내에 바람직스러운 훌륭한 전교전통이 서 있질 않는 것이 퍽 아쉽습니다.
선교사업은 어느 종교이든 근본속성입니다.
선교사업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는 종교는 그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발전의 소지가 없는 것이지요.
다른 종교를 들먹여 죄송하지만 오늘날 불교신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다행히 가톨릭은 말로써 전하는 선교는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드나
행동으로써 하는 무언의 선교가 큰 힘을 발휘해서 해마다 10% 내외의 신자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청지기주: 불행하게도 25년뒤인 요즘은 2~3%정도 밖에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 말로써 하는 증거를 보탠다면 얼마나 많은 신자가 증가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친히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르 16,16)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도 명백히 부지런히 말로써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은 생활의 증언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사도는 말로써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찾는다.
믿지 않는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신자들을 가르쳐 굳세게 하고, 더욱 열심히 살도록 격려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신자들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당연히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셋째, 젊은 청년이기 때문에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 부지런히 교리를 익혀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상황으로 보아서(교세가 급격히 팽창하는 추세에 있음)젊은 교우들의 역할은 앞으로 지대할 것 입니다.
교회의 기둥이 될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청년들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가정을 가지기 전에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앞날을 위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정립을 잘 하기 위해서도
이 때가 신앙적인 성숙이 꼭 필요한 중요한 때 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훌륭한 주춧돌이 되기 위해서
이 시기에 부지런히 신앙을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순교선열 성인들의 떳떳한 후예가 될 수 있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초기의 학자들, 이 벽, 이 승훈, 이 가환, 정 하상 등은 서학으로써 천주교를 받아들여
스스로 교리연구를 하여 마침내는 신앙으로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선교사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깨우쳐 천주교를 믿게 된 나라는 역사상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이 어찌 천주의 섭리라고 보지 않겠습니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고 우리는 이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성인들과 신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 역사 100년 동안 61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교회를 유지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정말 그들의 노고는 지대합니다. 감흥과 눈물 없이는 책장을 넘길 수 없는 것이 한국천주교회사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 분들의 자랑스러운 후예가 되고자 한다면 안일하고 게으른 신앙생활을 훌훌 털어 버리고 보다 더 진지하고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교리공부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참다운 신앙생활을 나아가는데 교리공부 밖에 없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글을 잘 깨우치지 못하였으나 매일 미사에 참례한다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등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몸이 허약하여 질병에 걸려 신음하는 가운데 신앙으로 회복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형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연히 믿게 되고 독실한 신앙인이 됩니다.
천주께로 나아가는 데는 이 밖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내리는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믿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써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개인을 성화시키는 모든 수단 중에 교리를 터득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에 깊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교육수준이 되는데도 불구하고(가톨릭 교리를 어느 정도 깊이 연구 할 수 있는 사람)
게으름과 태만으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는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따로 떨어져 개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신자가 지체가 되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 있습니다.
직장 나가랴, 가사 돌보랴 기타 여러 가지 맡은 바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 자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는 성업(聖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목적과 관련한 창조주의 가르침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人生의 목적이 창조주를 바로 알아보시고 그 계시대로 살아 마침내는 자기와 사회가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할 때,
출퇴근시간과 틈틈이 나는 시간 중에 신앙서적 단 몇 페이지라도 읽지 못하겠습니까?
한가로이 TV보는 시간 대신에 생명의 말씀인 성서 한 구절 읽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참다운 신앙인으로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항상 염두에 둔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건은 다 극복되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노력하는 진지한 자세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더 나아가서 당신이 가르치신 계시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때
그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생활화하기 위해서 교리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과 유사한 것으로 성서읽기가 또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피겠습니다.
성서 읽기를 생활화 합시다
많은 교우들의 가정은 종교적 분위기가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족구성원도 그렇고, 읽고 있는 신문, 잡지가 그렇고 일상의 세속생활에 몸과 마음이 푹 젖어
하느님의 말씀은 오직 주일 하루뿐이며 주일도 미사뿐인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쉽게 들을 수가 있습니까? 바로 성서입니다.
성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기록한 책이 아닙니까?(2티모 3, 16)
이는 곧 천주께서 직접 쓰신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귀한 보배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귀한 보배는 값도 아주 싸서 값어치에 비하면 공짜나 한 가지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애지중지하였으며 사랑하였습니까?
교우들 중에 주일미사때 신구약성서를 지참하는 분이 얼마나 되며,
그것이 부피가 크다면 신약성서만이라도 가지고 다니는 분은 얼마나 됩니까?
미사 때 성서 지참하는 것에 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평소의 성서읽기에 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하는 데는 성서 외에도 은총의 객관적 도구인 성사(聖事)와
하느님께 드리는 부탁인 기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옳게 이끄는데는 성사와 기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사는 시간적인 제약과 장소적인 제약이 따르고,
기도도 상황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분명히 하느님과의 대화는 틀림없습니다만
신자들의 일방적인 대화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것 보다 상호적인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여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주님께 말씀드렸다면
그 다음에는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상호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회의, 계시헌장 25.)
그 주님의 말씀을 어디에서 듣습니까?
마음이 내킨다면 어느 때고 어디서라도 성서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학교가정 어디에서건 점심식사 후 헛되이 보내느니 조용히 앉아 성서를 읽어보십시오.
단 10분이면 1,2장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의 양식을 얻었기 때문에 오후 근무시간에는 활기에 넘치고
하루 종일 종교적인 거룩한 분위기에 접할 수 있을 겁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가방에 성서를 넣어 다니며 도서관에 공부하기 전에 몇 장을 읽고
찬찬히 음미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공부가 잘 될 것입니다.
성서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요한 14, 6)의 고귀한 가르침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몹시 감정이 상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혹은 고난을 겪을 때
평소에 성서를 자주 보며 중요한 구절마다 표시를 해 놓은 사람이라면
마음을 평온히 하기 위한 구절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의 구절들은 놀라운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번민고통시련등 인간사에 있어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모든 종류의 장애물도
성서 앞에는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고
그 분이 인간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적어 놓으신 것이 성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계시한 것으로 성서와 성전(聖伝:교회의 전승)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성서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계시 내용을 풍부히 받아드려 항상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성서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서를 읽을 때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의대로 해석한다면 하느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가톨릭교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자의로 해석할 우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에 관하여 한 가지 덧붙이면,
신약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오신 뒤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근감이 있고
부담감이 별로 없이 이해가 잘 되고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이에 반하여 구약은 당시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쓴 것이어서
신약보다는 우리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보다는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기록된 구약은 한결같이 구세주의 출현을 예언하고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복종을 그 중심내용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출현을 역사적으로 준비케 한 것이므로
구약 없는 신약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구약도 한 가지로 열심히 읽어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모든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성서를 읽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10, 25)
주일 미사 참례 때 성서를 반드시 가지고 다닙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주일에 성서를 잘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전례상 성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둘째 부피가 커서 신구약을 함께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하다는 것,
그리고 독서를 할 때 그 내용을 귀담아 들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다닐 필요성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성서읽기의 생활화와 신앙의 내실화라는 측면에서 성서가지고 다니기를 주장합니다.
먼저, 전례상 성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에 관하여 말합니다.
미사는 대개 우리의 신앙고백과 반성, 주님께 대한 찬미와 찬양, 주님의 말씀듣기,
성찬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계시하고 가르침으로 종교가 시작된다고 볼 때
주님의 말씀듣기인 성서봉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번씩이나 봉독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독서하는 것을 들으면 되므로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데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들어두어도 그 내용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그 독서내용을 얼마나 정성되게 귀담아 듣습니까?
더군다나 독서자의 독서 기술도 갖가지여서,
어떤 사람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또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 약하게 등
의미전달이 제대로 안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독서하는 시간에 잡생각이나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학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받을 때 청각과 시각을 함께 사용한다면
그 효과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자기가 늘 즐겨 읽어보던 성서에서 해당페이지를 찾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
얼마나 주님 말씀이 머리에 속속 들어오겠습니까?
미사 의식 중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보다 더 정성되게 봉헌한다면 천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부피가 커서 가지고 다니기 귀찮고 일일이 해당 페이지를 찾기 귀찮다는 데
필자의 관심이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서 지참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보배 중의 보배를 단지 가지고 다니기 귀찮다는 핑계로
당신의 날인 주일에 집에 그냥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천주께서 무척 섭섭해 하시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귀한 재물입니다. 돈은 다른 재화를 구입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실제 사용될 때 진가를 발휘하지,
골동품 감상하듯 진열장에 넣어놓고 보아서는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고려청자가 무척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들고 다니며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애지중지 고이 모셔놓고 그윽이 감상할 때 제 진가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어떻게 해야 제 진가를 발휘합니까?
성서는 읽혀지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십자고상처럼 모셔놓고 쳐다보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성서를 가까이 하는 분은 평소에도 집에서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성서가 봉독되고 있는데 당신께서 세상 끝나는 날 까지 항상 계시는 교회(마태 28,20)에서
특별히 읽으면 얼마나 바람직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물론 성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고는 절대 보지 않습니다.
성서 지참 하나로 어떤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읽기에 약간 소홀히 하고 있다거나 주일 미사때 가지고 다니지 않는 풍습은
교회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성서의 자유해석을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그 해석을 놓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갑론을박하며
분파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약 3백개 가량의 교단이 있습니다. 전부 성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야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같은 천주교회는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무조건 아무렇게나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읽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오늘날까지에도 성서 읽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덩달아 미사때 성서지참도 잘 되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방침도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서를 부지런히 읽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취지를 잘 새겨들어 성서읽기를 꾸준히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성서를 가지고 다닐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주일에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 신앙증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에 성서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비신자들은 천주교를 의식할 것이고
따라서 크게 노력을 들이지 않고 무언의 전교를 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개신교나 다른 종교인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미사 시작 10분전에 오셔서 그날 봉독될 부분을 주보에서 찾습니다.
그 다음에 성화카드 등으로 해당페이지의 해당구절의 첫 행에 맞추어 둡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두면 미사 도중에 찾느라고 책장을 뒤적이는 수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공동번역성서(신구합본)가 좋은데
아직 갖추지 못한 분은 영세 때 받은 신약성서라도 가지고 다니면 될 것입니다.
사실 공동번역성서 큰 책은 가지고 다니기에 약간 불편합니다.
하지만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정도의 불편은 차라리
가벼운 시련으로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보급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의 생각을 하면 교회에서는 충분히 배려를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청지기주:과거에는 다양한 크기의 양장본이 없었습니다.신약성경 단행본은 있었지만
신구약 합본 성서의 작은 사이즈는 없었고 부피가 큰 '공동번역성서'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남.
오늘날 성경 지참하기를 강조하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바로 감곡 성당 김웅열신부님입니다.
당시 저는 20대 후반때 혼자서 이런 주장을 하고 실제 두꺼운 성경책을 개신교 신자들 처럼
몇년간 들고 다녔습니다.좀 별난 구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에도 오늘날 처럼 '매일 미사'책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아마 그날 독서와
복음이 주보에 게재된 걸로 기억이 납니다만...
실용적으론 매일미사책이 낫습니다만,지금도 성경책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말씀을 늘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성경 소지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참고로 이때의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깊이 각인됐는지,
요즘도 직장이나 집의 거실 등 제가 움직이는 동선 마다 성경이 펼쳐져 있고
틈틈히 밑줄 긋고 색연필 칠합니다^^.)
맺음말
이상에서 나열한 것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하느님의 존재에 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여 ,
그 결과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애매모호해진 사람이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고 또 참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 하여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과 인간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이 글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며 선행조건적인 것으로써
교리공부와 성서읽기를 주장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초가 튼튼해야 흔들리지 않고 훌륭히 발전할 수 있듯이
신앙에 있어서도 그 기초를 다지는 내실화가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셨는데
그것을 자세히 모르고는 그 가르침에 알맞게 행동할 수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끝까지 머릿속에 맴돌고 있음을 밝히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부 록
(1) 가톨릭 사상 강좌(박도식 신부 저)
이 책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근원적인 관계부터 시작해서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풍부한 예증을 들어가며 명쾌하게 교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비자들이 처음 대하는 간추린 ‘요리문답식 교리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믿어서는 쉽게 냉담해지거나 맹신자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근거를 하나하나 밝혀가며 믿을 필요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필요에 대답하고 나온 책이 바로 이 사상강좌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비 신앙인들의 종교관과 종교에로의 초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가톨릭의 7성사를 비롯한 핵심적인 교리를 강연식으로 부드럽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얼핏 보면 비 신앙인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 같아 보이나
오히려 적당한 냉담자나 그런대로 신실한 신자들이 읽을 때 훨씬 더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하는 것으로 근근이 신앙생활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나
하느님의 말씀이 가슴깊이 와 닿지 않는 분들은 이 책을 한번 읽는 것으로써
충분히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며
교회의 각종행사나 의식 등에 관하여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도
이 책을 한번 보시게 되면 자기가 종교와 교리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가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인 신자도 이 책을 숙지할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풍부한 교리지식을 얻게 되므로 복음전파를 자신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리책도 많지만 필자는 자신의 신앙이 좀더 발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336면, 정가 2500원, 각 본당이나 시내 대형서점에서 구입)
(2) 천주교와 개신교(박도식 신부 저)
이 책은 이미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쓰였다는 점입니다.
개신교 목사나 장로들은 몇 백 년 전의 가톨릭의 일부 타락상을 들어오는 날 설교 중에
공공연히 천주교를 공박합니다.
그렇게 왜곡시키기 때문에 예수께서 직접 세우시고 사도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오는 정통의 성교회를
많은 개신교 형제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천주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마리아를 믿는 종교로 착각하는 순진한 개신교신자가 있는가 하면
구교이므로 구약성서를 보고 옛날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을 그대로 따르는
낡은 종교라고 이해하는 웃지 못 할 사정이 간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천주교의 진면목을 다른 개신교신자들에게 좀더 자세히 알리고자 저술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효과와 영향이 얼마나 큰지
오늘날의 개신교의 지나친 세속화・인간화・차별주의 등에 비추어
개신교신자가 이 책을 한번이라도 읽게 되면 심지어 개종까지 고려하게 되는 책으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이 책의 파급을 두려워하여 신자들을 단속하며
이 책의 각 내용을 비판하는 비판서까지 등장시키고 있는 지경입니다.
이 책 역시 기성 천주교 신자들이 읽을 때 매우 큰 효용을 발휘합니다.
호교론적 입장에서 쓰였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자신만만하게 성교회를 옹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 형식으로 엮었기 때문에 읽기에 무척 편하며 교리지식 강화에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135면, 정가1200원, 본당에서 쉽게 구입)
(청지기 주 :제 개인의 인생사와 신앙사를 볼때 이젠 고인이 되신 박도식 신부님의 위의 책
2권이 저의 인생 물줄기의 큰 흐름을 바꿔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다가신 신부님을 존경합니다.
당시 신부님의 강론이 인기여서 전국적으로 본당을 돌며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 앞 전에는 윤형중 신부님이,그리고 요즘은 차동엽 신부님, 김웅열신부님 등이
대중적인 신앙 강론을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박도식신부님 저작들은 쓰여진지 20~30년씩 되는데,요즘도 선교 일선에서 현역으로
씩씩하게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3) 그리스도의 가르침
이 책은 가장 최신의 정통교리서 입니다.
신학전반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게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17인의 신학자들이 충분한 자료와 시간을 들여 저술한 성인용 정통 교리서입니다.
성서구절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각종문헌을 풍부히 인용한 점에 그 특색이 있습니다.
보다 더 깊이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실 분이나 전교사, 교리교사 등이 이 책을 이용하시면
다대한 수확할 것을 확신합니다.(587면, 정가3900원, 가톨릭 전문서점이나 교보문고 등에서 구입)
(4) 기타 신앙관련 서적(각론)
앞에서 열거한 교리서는 기본서로서 총론에 불과합니다.
조금이라도 깊게 가톨릭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젊은 교우들은 이것으로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신앙 전반에 걸쳐 많은 서적들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범주로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첫째, 무어니 해도 교회사가 중요합니다. 역사는 과거의 단순한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발전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의 천주교회사는 필히 읽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정통신학은 아니더라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포용하는 신학의 개론 정도는 읽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셋째, 오늘날의 우리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교회에 대하여 건설적인 비판을 한 서적을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교회가 그대로 정지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구체적인 시대의 상황에 따라
교회는 끊임없이 변천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넷째,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개인적인 신비체험에 관한 성령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성령세미나에 참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더 언급할 수 있으나 이 글의 목적상 이정도로 해 둡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은 사람마다 방법을 달리하므로 개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적당한 방법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 서적
(1) 성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2) 가톨릭사상강좌. 박도식신부저, 가톨릭 출판사
(3) 종교의 근본문제. 윤형중신부저, 가톨릭 출판사
(4) 그리스도의 가르침. R.로울러. D.무얼 등 편저 오경환 역, 성바오로출판사
(5) 현대물리학입문, 이노끼 마사추미저 한명수 역, 전파 과학사
(6) 신도론, 양한모저, 가톨릭출판사
(7) 한국천주교회사, 유충렬저, 가톨릭출판사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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