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에게 살인면허를 준 자들은 누구인가
증언자 : 최규백(남)
생년월일 : 1950. 4. 8(당시 나이 30세)
직 업 : 세일즈(현재 노점상)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5월 20일 오후 1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공수단에 의해 북동성당으로 쫓겨들어갔다가 뒤쫓아온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전신을 구타당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나는 1950년 광주시 누문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건어물 도매상을 하시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광주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따라 목포로 이사갔다. 그곳에서 동강중학교를 졸업하고 동강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하시던 장사가 망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살길이 막막하게 된 우리 가족은 다시 광주로 이사했다.
광주로 올라오면서부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금성여객에 취직하여 차량정비나 운전보조 등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금성여객이 재벌회사인 광주고속에 합병되자 그 일자리마저 잃어버렸다.
그 후에는 광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신문 가판을 하였다. 그러나 신문 가판이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돈벌이도 시원치 않아 그만두고 책 세일즈맨이 되었다. 1980년 5월에도 책 세일즈를 하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도청으로
5월 20일 언제나처럼 오전에 책을 판매하려고 화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전남대병원 앞을 지나는데 일찍부터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계엄군이 최루탄을 터트리면 한편에서는 시민, 학생들이 이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었다.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보자니 상당히 겁이 났다. 나는 얼른 버스에서 내려 집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집은 대성국민학교 뒤쪽에 있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대인동 근처에서 우연히 친구 윤도상이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녹음기가 고장났다며 같이 대인동 어느 전파사에 맡기러 가자고 했다.
녹음기를 전파사에 맡기고 난 뒤 친구가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 학생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구경삼아 도청에 가보자고 하였다. 나는 겁이 났지만 그래도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와 함께 도청으로 향했다.
도로 요소요소마다 계엄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피하느라 골목만을 택해 갔다. 중앙국민학교 앞에 있는 육교 부근에 갔을 때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를 만났다. 계엄군은 시민,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며 뒤쫓았다. 많은 시민, 학생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학생 몇 명이 육교 위로 도망쳤다. 이것을 본 계엄군들은 육교 양쪽 계단을 막고 그 학생들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학생들을 사정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실신한 다음에야 때리기 를 멈추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것을 본 후 가톨릭센터 쪽으로 나간 우리는 광주관광호텔 앞까지 갔다. 도청 앞에서도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시위양상이 좀 다르게 살벌하다는 것을 느끼고 '시내를 나오는 게 아닌데 잘못 나왔구나' 싶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가톨릭센터 쪽으로 갔다. 가톨릭센터 앞에도 계엄군이 있었다. 시민들도 꽤 많이 모여 있었는데 계엄군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고 "저놈들 죽여라" 하는 말이나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계엄군들은 이런 시민, 학생들을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키려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도망치던 나는 그 와중에 친구와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혼자서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데 소방서 앞까지 가니 그곳에도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 시위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나는 그쪽으로 갔다.
북동 천주교회에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건물 안과 지하도 입구 쪽에는 많은 시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터미널 맞은편(현재 칠성약국 앞) 도로와 그 반대쪽에서 동시에 계엄군들이 시위대들을 향해 열을 지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시위대들은 포위당하고 말았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갈 구멍을 찾았다. 칠성약국 옆으로 난 골목이 보여 그쪽으로 도망갔는데 하필 막다른 골목이었다. 할 수 없이 얼른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도망쳐 온 사람들이 15명 정도 있었다. 모두들 불안해 하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밖으로 나서지도 못한 채 대문을 살짝 열고 간간이 밖의 동정을 살폈다. 얼마쯤 지나니 젊은 남자가 팬티만 입은 채로 뛰어왔다. 그것을 본 나는 문을 열어 얼른 그 남자를 집으로 끌여들었다.
그 남자가 한숨 돌리기를 기다려 사람들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시위현장에 있다가 계엄군에게 붙잡혔는데 무조건 구타를 당한 후 팬티만 남겨놓고 옷을 벗기는 바람에 알몸뚱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함께 붙잡혀 있던 시민 한 사람이 틈을 타 도망을 치자 그 사람을 잡으려고 계엄군이 뒤좇아가는 사이에 자신은 반대쪽으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다시 젊은 남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골목으로 뛰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그 집으로 들어왔다. 우선은 내 손수건으로 피를 대강 닦고 머리를 감싸주었다. 손수건이 금방 빨갛게 피로 물들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몰려들자 드디어는 집주인 아저씨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집주인도 겁이 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좁은 집에 숨어 있지 말고 집 뒤편에 있는 북동 천주교회로 가시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순순히 담을 넘어 천주교회로 갔다. 그런데 나는 웬지 가기가 싫었다. 담을 넘어가면 꼭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머뭇거리는 나를 본 집주인이 얼른 담을 넘으라고 재촉했다. 할수 없이 성당으로 넘어가려고 담 위에 올라서서 성당 안을 보니 총을 메고 곤봉을 손에 든 공수부대원이 15명 가량이 성당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보다 먼저 담을 넘어갔던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공수부대원이 성당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성당으로 갈 수도, 집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를 발견한 공수부대원이 담에서 얼른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성당에 내려섰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시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소. 나는 일반시민일 뿐이오."
땅으로 내려서는 순간부터 계엄군에게 하소연했다. 공수부대원은 무조건 나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곤봉을 막았다. 얼마나 세게 내리치던지 오른쪽 손목이 즉시 찢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죽을지 어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얼른 호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나이도 이렇게 많은데 데모를 하겠소. 나를 풀어주시오."
그러자 계엄군은 "학생이고 뭣이고 소용없다"면서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또한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하였다. 어느 순간 나는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는 쓰러졌다. 머리가 터져 순식간에 얼굴로 피가 흘렀다.
내가 쓰러지자 계엄군은 양다리를 잡고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디로든지 끌려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으로 땅바닥을 파며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 때의 나는 인간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한 마리의 동물에 불과했다.
내가 계속 버티자 계엄군은 화가 났는지 욕설을 퍼부으며 군화발로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그러더니 다시 다리를 잡고 끌고 갔다. 조금 가니 큰 돌이 하나 있길래 얼른 그 돌을 움켜잡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버티자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러는 내가 애처롭게 보였는지 계엄군은 나의 옆구리를 한번 걷어차더니 발을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속삭이면서 성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절로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성당 옆에는 금호전자 대리점이 있었다. 그 대리점 운전기사가 우연히 옥상에 올라갔다가 성당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몰래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계엄군이 철수하자마자 얼른 근처 식당으로 가 된장을 굉장이 많이 얻어와 내 상처부위에 붙이고 수녀들과 함께 나를 부축하여 성당 옆에 있는 신용협동조합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내 머리에서 피가 계속 나오자 수건으로 피를 닦고 머리를 감싸주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아프고 갈증이 일어났다. 구토증세까지 있었다. 내가 물을 달라고 하자, 수녀와 조합 직원들이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주지 않았다.
조합에 들어간 지 10여 분 정도 지난 후 그들은 성당 안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나를 성당 안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가 20일 밤 11시경이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성당의 신부가 기거하는 방 같았다. 그 방에는 나보다 먼저 담을 넘어갔던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중에는 부상당한 사람만도 5, 6명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피를 가장 많이 흘리고 있어서 곧 바로 된장을 떼어내고 붕대로 머리를 감싸주었다. 그때 나는 흰 와이샤쓰와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와이샤쓰가 빨간 색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에 북동 천주교회에 계셨던 조규완 주임신부님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간호원 1명과 의사 1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신부님이 부상자 치료를 위해 병원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의사와 간호원은 거기에 있던 부상자들 전부를 응급치료하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나도 찢어진 머리를 꿰맸다. 그러고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수혈을 해야 하니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치료도 좋지만 우선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고, 살아도 집에 가서 살고 싶으니 집에 데려다주시오."
나는 의사를 붙잡고 사정사정했다. 의사는 집에 갈 수 없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나는 일초라도 빨리 집에 가고만 싶었다. 내 태도가 완강하게 느껴졌는지 의사와 조규완 신부님은 무슨 얘기를 나누더니 집에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성당 뒷담에 사닥다리를 놓고 뒤에서 두 명이 부축하여 성당 밖으로 내려줬다.
신부님은 성당 뒤 골목에서 택시를 잡아 택시비까지 주며 택시기사에게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당부했다.
누가 알까 두려워 바깥출입도 못 해
택시는 나와 또 다른 부상자 한 명이 타고 갔다. 택시는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는 큰 도로를 피해 골목골목으로 해서 갔다. 같이 타고 갔던 부상자는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내렸다.
집 앞 도로에서 내린 나는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걸어가지 못하고 기어서 집 앞까지 갔다. 벨을 누르자 만삭이 된 아내와 어머니가 나오셨다. 그들은 머리가 하얀 붕대로 감긴 채 제대로 서지도 못 하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랐다. 이때가 21일 새벽 3-4경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몸이 아프기도 하였지만 겁이 나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집에서 치료를 하였다. 집에만 처박혀 있자니 답답해서 하루는 큰아들을 업고 집 옥상에 올라가보았다. 옥상에 앉아 있자니 어디에서 최루탄을 쏘았는지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재채기가 났다.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최루탄 가스를 맡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어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다가 2층 옥상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아들과 나는 별 다른 부상이 없이 가벼운 타박상만 입었을 뿐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끝나기는 하였지만 남들이 붕대 감은 내 모습을 볼까 두렵기도 하고 몸도 아파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어머니도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숨기고 지냈다. 내가 일을 못 하니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전세집에서 사글세로 옮기면서 조금 남은 돈으로 치료비와 먹고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러다 몸도 어느 정도 좋아지는 것 같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83년부터 빚을 얻어 리어카 행상을 하였다. 지금은 양동시장에서 점포 없이 길바닥에서 옷 파는 일을 하고 있다.
5·18 부상자 신고는 전에부터 하려고 했으나 인우보증인을 해줄 만한 사람이 없어 신고하지 못했다. 1980년 당시 북동 천주교회에 계셨던 신부님은 다른 성당으로 옮긴 지 오래였고, 치료해 준 의사도 병원을 옮겨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작년(88년)에 신고를 하기 위해 그 의사와 신부님을 찾으러 다녔다. 어렵게 수소문해 신부님과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5·18 당시에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병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한국전력 앞에 있는 '조정형외과'의 원장님이셨다. 그 당시 북동 천주교회 신부님은 현재 목포 연동 천주교회 주임신부님으로 계시다. 항상 생명의 은인이신 두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1988년 5월에 신부님이 서류상으로 보증을 서줘서 5월 26일에야 부상자 신고를 하였다.
책임자 처벌도 있어야
요즘에 들어서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5·18의 해결은 광주시민들이 왜 피를 흘려야 했는가, 누가 광주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확실하게 규명되어야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현재 국회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5·18 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 끝내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 5·18에 관련된 책임자들이 현재 국민들 앞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서 용서해 달라고 했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마땅히 책임자 처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보상금 문제가 거론되어야 한다. 보상금도 정부에서는 한꺼번에 일시불로 지불할 것이 아니라 유가족, 부상자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연금제로 지불되어야 한다.
(조사정리 허혜자)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