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에서 감수성이란?(호모데우스/유발하라리)
인본주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神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데서 출발하였다.
인본주의 이전에는 가치판단의 기준에 서양에서는 성경에 있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서는 윤리학에서는 ‘좋게 느끼면 해라’이다. 정치학에서 인본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이다. 미학에서의 인본주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도 정의 내리기 나름이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대량생산된 평범한 소변기를 구입해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선언하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서명한 다음, 뉴욕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런 어이없는 일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중세라면 판단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현대의 미술 강의 시간이라면 <샘>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예술인지 맘대로 토론하게 하고, ‘예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예술 작품은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질문하고 토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결론은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술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라고 내린다. 사람들이 소변기를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고 여기면 예술작품이다.
인본주의 사상이 부상하면서 교육제도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모든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 외부에 있었으므로, 순종을 주입하고 성경을 암기하고 고대전통을 배우는데 교육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교사들이 문제를 내면 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솔로몬 왕,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대답해야 한다.
반면 현대 인본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아리스토텔레스, 솔로몬, 아퀴나스가 정치, 에술, 경제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 것도 좋지만, 의미와 권위의 최고 원천은 자신의 내면이므로,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게 가르친다.
의미의 권위와 원천이 하늘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옮겨오면서 우주 전체의 성질이 변했다.
신, 뮤즈, 요정, 악귀들로 바글거리던 외부 우주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지금까지 버려두었던 별 볼일 없는 공간이었던 내부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해졌다. 천사와 악마는 세상의 숲과 사막을 떠도는 실재하는 실체에서 우리 심리 안의 내적 힘으로 탈바꿈했다. 천국과 지옥도 구름 위 어딘가에 있고 화신 밑 어딘가에 있는 실제 장소에서 마음의 내적 상태로 해석이 달라졌다. 우리는 가슴 안에 분노와 증오가 불붙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고, 적을 용서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눌 때마다 천상의 기쁨을 누린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을 했을 때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적어도 서구에서 신은 누군가는 믿고 누군가는 믿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 되었다. 중세에는 신 말고는 정치적, 도덕적, 미적 권위를 찾을 곳이 없었다. 나 자신은 옳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구별할 수 없었다. 반면 오늘 날에는 신을 믿지 않는 편이 훨씬 쉬운데, 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히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내면의 경험에서 정치적, 도덕적, 미적 가치를 풍성하게 버무려낼 수 있다.
신을 믿고 안 믿고는 내 선택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신을 믿고 그 반대면 안 믿는다. 어느 쪽이든 권위의 원천은 내 자신의 감정이다. 그래서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실은 내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일이다.
감수성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인본주의 감정에도 다른 모든 인간의 일처럼 단점이 있다. 진정한 내적 자아는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침묵하는 목소리와 상충하는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중세 유럽의 가장 중요한 지식의 공식은 지식=성경☓논리였다. 어떤 중요한 질문의 답을 알고 싶으면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자신의 논리로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했다. 지구의 모양을 알고 싶으면 <욥기>38장13절을 보면 “땅의 모서리를 잡고 마구 흔들어서 악한 자들을 떨어낼 수 있다.”고 적혀 있다고 지적했다. 모서리가 있으니 지구가 평평한 사각이라고 했다. 또 다른 현자는 “땅 위의 둥근 하늘에 계신”이라 적혀 있으니 이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고 했다.
과학형명은 지식에 대한 사뭇 다른 공식을 제안했다. 그것은 지식=경험적 데이터☓수학이다. 어떤 질문에 답을 알고 싶으면, 그에 관련한 경험적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 그 데이터를 분석해본다. 이 공식은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에 획기적 발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공식에는 큰 결점이 하나 있는데, 가차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룰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중세의 학자들은 살인과 도둑질이 잘못이며, 삶의 목적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임을 의심할 여지없이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리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간 사회에 꼭 필요한 이 원칙은 아무리 많은 데이터와 수학 기법으로도 살인이 잘못임을 증명할 수 없다.
인본주의는 여기에 대안을 제시했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확산을 얻으면서 윤리적 지식을 획득하는 새로운 공식인 지식=경험☓감수성이 등장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윤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면 내면의 경험을 꺼내 예리한 감수성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년간 지식을 쌓고 그 경험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감수성을 갈고 닦는다.
이 경험이란 숫자로 나타내지는 경험적 데이터가 아니다.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 세 가지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이다. 특정 순간의 내 경험은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열, 쾌락, 긴장 등),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사랑, 두려움, 분노 등),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이에 미치는 영향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모든 산들바람에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그 경험들로 인해 내 견해와 행동은 물론 성격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 강화한다. 감수성 없이는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감수성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서 키울 수 있는 추상적 소질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해야만 무르익고 성숙하는 실용 기술이다.
모든 미적, 윤리적 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양심을 완비하고 태어나자 않는다.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동정을 베풀고 받는다. 주의를 기울이면 도덕적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축적된 경험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가치 있는 윤리적 지식의 원천이 된다.
이렇듯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의 과정으로 본다.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데 있다. 19세기 초 근대 교육제도 창시자 중 한 사림인 빌헬름 본 훔볼트는 존재의 목표는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인생 경험을 증류해 지헤로 만든 것”이라 했다. 그는 또 “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정점이 있는데, 그것은 느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지‘라고 했다. 인본주의 모토로 삼기에 딱 알맞는 말이다.
중국철학인 陰陽論에 의하면 세계는 상반되지만 보완적인 두 힘인 음양의 조화로 이루진다고 한다. 과학이 양이라면 인본주의는 음을 내포하고 있다. 양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반면 음은 우리에게 의미와 윤리적 판단을 제공한다. 역사상 지금처럼 인간의 감성, 욕망, 경험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긴 문화는 없었다. 인생을 경험의 연속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관광에서 예술까지 수많은 현대산업의 창립신화가 되었다. 여행 산업은 비행기 티켓, 호텔방, 근사한 저녁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판다.
현대 소설 시 수필 영화는 느낌을 강조한다. 그리스 로마의 서사시는 영웅담이다. 영웅들은 모험을 감행하고 경험하지만 결말에서 똑 같은 세계관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현대의 워즈워드, 도스토에스키, 디킨스, 졸라는 영웅들의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평법한 노동자와 주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기술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외적 행동보다 내적 삶에 초점을 맞춘 근대문학의 정수리고 한다. 다 읽어본 사람은 드물겠지만 하루 종일을 26만 단어로 표현했지만 한 일은 딱히 없다.
여러 문학작품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바라며 온갖 고생을 하며 찾아 나서고 있다. 위대한 마법사나 어떤 신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생을 통해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데, 바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과 지혜와 용기를 원한다면 신이나 마법사는 필요 없다. 그저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걸으며 도중에 겪는 경험들을 온전히 받아들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