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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방 최대의 민중항쟁 - 홍경래의 난과 여러 민란들
저항의 세기
조선후기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인 19세기는 저항의 시대, 민란의 시대로 불릴 만큼 민중의 사회적 역할이 컸다. 조선왕조를 유지해왔던 유교적 봉건체제는 민중에 의해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으나, 당시의 지배층은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보다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구체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민중의 움직임은 18세기인 영조, 정조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들이 조직화되어 변란이나 민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세기 초기부터였다. 1800년 6월 28일에 남인들을 등용하여 변화의 시대에 맞게 대책을 준비해오던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19세기는 그 벽두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정순대비는 영조의 두번째 왕비로서 경주 김씨이다. 그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의 친정 인물들과 영조대의 집권세력이었던 벽파와 결탁하여 정조대의 집권세력이었던 시파를 몰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 때에 등장하여 활동하던 남인들이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몰려나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가환과 정약종은 옥사당하였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많은 천주교도들이 사형당하였다. 그런데 1802년에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이 순조와 결혼하고, 1804년에는 정순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게 되자 다시 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도 어리고 정치에 미숙하였으므로, 시파의 중심이었던 김조순 등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고, 그 이전인 1801년에는 왕실이나 관청 소유의 공노비들이 해방되었다.
순조대에는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였고 전염병이 크게 번져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였다. 이 때문에 도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민란이나 반란들은 심정의 문란 등 조선후기의 누적된 사회 모순 위에 관직을 사고 팔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과거시험의 부정부패로 가난한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웠고, 또 어렵게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더라도 벼슬을 얻기가 어려웠다. 문벌을 통한 굵은 줄이 있거나 수천 수만 냥의 뇌물을 쓰지 않으면 벼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가난한 선비들은 중앙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없었고, 대다수는 향반이나 잔반으로 전락하여 명맥을 유지하거나 경제적 기반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과객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지식인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고, 그들의 선동에 의하여 사회적 불안도 고조되어갔다. 반면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얻은 관리들은 갖은 방법으로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민중들을 착취하는 데 핏발을 세웠다.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고 더 좋은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세가들에게 더 많은 뇌물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로 전세나, 군역, 환곡의 행정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백성들에 대한 착취는 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하였고, 자포자기적인 난동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 농민을 비롯한 일반민들의 체제에 대한 도전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이같은 사회적 추세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면 그 누가 막을 것인가?"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한 예언처럼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민중들의 동요는 시작되었고, 그것은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내내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811년의 관서지방을 뒤흔든 대대적인 반란, 즉 홍경래 난, 1862년의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항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이 장에서는 19세기 초기의 대표적인 '변란'이었던 홍경래 난과 그에 앞서 일어났던 여러 차례의 작은 '민란'들을 살펴보면서 '저항의 세기'의 문을 열어본다.
다산이 들은 이야기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전하는 이 사건이 동기나 진행 과정은 변란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판이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래 장시경과 부사 이갑회의 아버지는 먼 친척간으로서 가끔 관아에서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처지였다. 세상의 이야기들 중에는 당시의 정승이 의원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독약을 바쳐서 임금이 죽게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이 때 장시경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갑회는 국상의 공식 애도 기간(25일간 일체의 정사를 중지하고 애도함)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의 회갑연을 열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질기면서 장시경 부자를 초청하였다. 이에 장시경이 심부름 온 아전에게 "임금이 돌아가신 이런 때에 잔치를 베풀다니, 세상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알겠다"고 비난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갑회는 자신이 탄핵될 것을 염려하여 장시경을 모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감영에 긴급 보고를 올려 장시경의 장현경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조정의 악당들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있다고 고발하였다. 보고를 들은 관찰사였던 신기는 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갑회는 장교와 나졸 200여 명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장시경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시경 부자는 영문도 모르고 도망치다가 장시경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장현경은 달아나버렸다. 장시경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은 잡혀 갇히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서구를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장시경의 집에서 압수한 증거라고는 점치는 책 한 권과 점괘를 풀이한 종이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건마서분'이라고 씌여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안핵사 이서구는 비교적 온건하게 사건을 처리하여 잡힌 사람들을 대부분 풀어주었다. 그래서 영남에서는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안핵사를 칭송하기까지 하였다 한다. 다만 도망간 장현경의 아내와 자녀들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보내었다. 거기서 그의 가족은 한 군졸에게 핍박을 받다가 아내와 큰딸이 바다에 투신자살하였다. 그때 마침 다산이 강진에 귀양가 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내막을 기록한 것이다.
결과와 영향
이 사건의 동기나 내막에 대하여는 이와 같이 상반되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미심쩍은 면이 없지 않다. 부사 이갑회의 보고는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난의 동기가 불분명하고 또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명문가의 학자였던 장시경이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난동을 일으켰을지 의심스럽다. 반면 다산의 기록은 순전히 전해들은 이야기로서 그 사건의 동기는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전모를 알 수 없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장시경은 단순히 당시의 정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모종의 행동을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상민들 중에서 연루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의 아들 장현경이 도망한 것도 미심쩍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사건은 장시경 등의 주동과 부추김으로 농민들이 참여하게 된 소요사건으로서 매우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핵사 이서구의 선처로 농민들은 불문에 부쳐지고 장시경 일가만이 처벌됨으로써 사건은 큰 물의 없이 처리되었다. 살아서 도망갔던 장현경은 10여 년 뒤에 경원 월명사에 숨어 있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동부는 강등되어 현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인동의 소요사건 이후에도 경상도에서는 괘서 사건이 뒤를 이었다. 다음 해 8월 하동의 두치장에 대자보를 붙이는 괘서의 변이 있었는데, 여기에 관련된 사람은 이진화, 정양선, 이방실, 정철손 등이었다. 이 괘서는 읍과의 거리가 5리쯤 되는 시장 가에 걸려 있었는데, 흰 명주를 한 자 남짓하게 대나무 장대에 종이 끈으로 꿰뚫어서 매단 것이었다. 명주 가운데에는 "문무의 재주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한 자는 나의 고취에 응하고 나의 창의에 따르라. 정승이 될 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 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준다"라고 하였다. 창원 지방에도 흉서를 게시한 곳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있지 않다. 그리고 의령에서도 괘서사건이 발생하여 집권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농민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단천과 북청의 민란
1808년(순조 8)에는 함경도의 단천과 북청에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단천부의 향인 김형대 등은 좌수를 쫓아내고 관문에 들어간 다음, 지팡이를 가지고 관아에 올라가서 해당 수령을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또 북청부에서는 아전 김치정 등이 관장을 모해하고 떼를 지어 향청에 들어가서 아관을 불로 지졌다. 북청부사심후진은 모욕을 받고 비웃음을 샀으며, 단천부사 김석형은 겁을 먹고 피하여 숨어버린 것이다.
단천의 소요
1808년 1월 3일 함경도 단천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먼저 부사의 사주를 받은 한 무리의 고을 사람들이 향청에 모여 민폐를 의논하던 중, 지나간 일들을 들추면서 좌수 심지원을 몰아내고 말았다. 그러자 좌수의 편을 들고 나선 수백 명의 고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툼이 일어났다. 그들은 관아 건물에 올라가 부사 김석형을 몰아내었다. 부사는 처음에 서재에 숨어 있다가 다시 장창으로 도망하여 5일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 후에 돌아온 부사는 이 사건을 향전(향권의 장악을 둘러싼 싸움)이라고 규정하고, 사건을 주동한 김형대 등을 묶어서 옥에 가두었다. 이 사건은 실상 단천부사였던 김석형이 향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향회를 구실로 당시 향청의 책임자였던 좌수 심지원을 몰아내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기존의 향인층들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부사를 축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중앙정부의 대행자라고 할 수 있는 수령과 토착 양반 세력인 향청 사이에 자주 일어나던 수령권과 향권의 한 대립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이면에는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 그 해 6월 17일에 함경도관찰사 조윤대가 올린 조사 보고서에는 단천부사 김석형의 탐학 불법한 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김석형은 원래 탐욕이 많아 불법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각종 명목으로 불법 착취한 돈이 18,148냥, 은이 831냥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청의 임원인 좌수 향소 창고지기 중군(지방군 참모장)으로부터 천종(대대장급) 초관(중대장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책을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또 나루에 운행하는 배들에 대하여는 상세를 부당하게 과외로 징수하였고, 광산에서는 소정의 세금을 무시하고 생산되는 은을 빼앗다시피 하였다. 그는 수령으로 있으면서 부유한 농민이나 상인층, 또는 광업으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로부터 심한 착취를 해왔던 것이다. 김형대 등이 향인층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단천의 작변은 이런 부사의 수탈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북청 아전들의 봉기
한편 북청에서는 아전인 전치정 등이 무리를 지어 향청에 들어가 그 책임자인 좌수와 풍헌을 불로 지지고 부사 심후진을 모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사 심후진은 북청에 부임한 후 창고 곡식 500여 석과 대동별수전 1만여 냥이 민간에 대출된 후 오래도록 걷히지 않아 떼어먹힌 지경으로 된 채 그때까지 덮어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 김원후와 창고감독 이인혁을 시켜 그 수를 조사케 하고 떼인 곡식과 돈을 거두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 곡식과 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며 이익을 보던 아전들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1808년 3월 5일 백여 명 가까운 아전들이 이안(아전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떼를 지어 향청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좌수 김원후와 창고 감독 이인혁의 옷을 벗겨 구타하고 불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부사 심후진까지 해치려고 하였다. 이것은 곧 부세 징수와 관리 과정에서 농간을 부리던 아전들과 이를 시정하려는 체 명분을 내세우면서 또 다른 이권을 챙기려던 수령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수령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데 대한 고을 사람들의 반발이라는 점에서 단천의 소요와 공통성을 가진 사건이었다.
함경도 변란의 성격
비변사에서는 단천의 백성들이 관아를 부수고 관장을 쫓아낸 일과 북청에서 좌수를 불로 지지고 고을 수령을 해치려던 사건을 변란의 일종으로 보고 모두 주동자들을 효시(목을 베어 매달아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벌)하여 사나운 불한당들을 징계하도록 처분하었다. 그들이 비록 무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무기를 들었다면 바로 반란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808년 함경도 단천과 북청에서의 변란은 그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령들의 향촌 침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조선후기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은 삼남지방에 비하여 토착 양반들이 세력이 크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의 권세는 절대적이었고 그들을 견제할 지방 세력이 확고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삼남지방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향회나 향소에 참여하는 향임들은 대체로 수령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고을 사람들이나 아전들이 향회나 좌수 향소 등을 공격하는 경우, 그들의 최종적 저항 목표는 이들에 대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수령이었다. "난민들이 세력만 강하였다면 그 저항의 목표가 수령을 넘어서 곧바로 감사와 병사에게 미쳤을 것이다"라고 표현한 재상 김재찬의 우려는 바로 그러한 형편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우려는 바로 홍경래의 난에서 중앙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현실화되었다.
곡산민란
부사를 들것에 실어 쫓아내다
1811년 2월 23일 새벽 곡산의 북면 사람 수백 명이 각각 곤봉을 둘러매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관아에 돌입하였다. 농민들은 관아에 있던 사환, 노비들을 몽둥이로 때려눕히고 이어 관문을 부수고 정당 안에 난입하여 수령의 병부와 인신을 탈취하였다. 이어 곡산부사 박종신을 끌어내어 빈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담아 마주 들고서 읍에서 30리 떨어진 참막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청 안채로 들어가 부녀자들을 몰아내고 옥문을 부수고 갇혀 있던 창고의 책임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내보냈다. 이 와중에서 농민들은 박종신의 부정과 비리를 8조로 열거하여 폭로한 다음 다짐을 받아냈다. 곡산 사람들은 부사 박종신의 직인을 탈취하여 이웃 수안군으로 가지고 가서 바쳤다. 수안군수 오준상은 이를 황해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 홍희신은 이를 다시 중앙에 급보하였다.
수령을 축출하고 죄수를 풀어주어 목적을 달성한 농민들은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곤봉을 들고 고함을 치면서 좀처럼 해산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관리들은 농민이 기세에 눌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안군수 오준상은 난민들이 변란을 일으킨 뒤 두려움 때문에 해산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는 농민들을 즉시 해산시키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피하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읍내에 모였던 농민들은 수령이 잡아들인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보기 위해 해산하지 않고 수령의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은 농민들의 위세에 눌려 진압은 커녕 잡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조사조차 착수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봉기군에 의해 곡산부의 통치질서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곡산 농민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의 지배층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중앙정부는 난민들이 관아에 쳐들어가 수령의 직인과 지휘관의 병부를 탈취한 것을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는 관장을 살해하거나 아전들을 쫓아낸 것보다 죄가 큰 것으로 보았으며, 무리를 동원하여 고을을 함락한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까지 생각하였다. 당시 지방관들은 이들 농민봉기를 매우 두려워하여 옛날 임꺽정이 관군에 저항하던 것을 연상하기까지 하면서 반란군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보고를 들은 왕은 주모자와 가담자를 막론하고 엄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아전들과 상인들이 유착된 환곡 포탈
곡산부는 황해도 동북쪽에 깊숙이 위치한 작은 고을로, 수안, 신계, 토산 등과 함께 황주에서 개성으로 가는 직로의 동쪽에 위치한다. 이들 지방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험한 오지이며, 민심이 사납고 도적의 출몰이 잦으며 전통적으로 토착 양반들의 기반이 취약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18세기 말에도 군역문제를 둘러싸고 불만이 폭발한 적이 있었다. 수령이 군포를 함부로 징발하자, 분노한 곡산민 천여 명이 관청에 몰려가 일제히 호소한 뒤 성토하고 관장을 축출함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수령의 착취나 온갖 부패는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지방은 그 지방 토착 양반들의 기반이 미약하여 수형의 횡포를 견제할 수 없었으므로 그 폐단은 더욱 심한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봉기의 원인은 오랫동안 누적되어왔던 것이다.
1809년 11월에 박종신이 곡산부사로 부임하자, 그는 1년도 안되어 고질적인 병폐였던 환곡의 운영상황을 조사하여 아전들이 떼어먹은 환곡이나 가마니에 불순물을 넣어 수량을 붗 풀리던 폐단인 이른바 분석을 조사하였다. 곡산부에는 북쪽 사화방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서하창이라는 창고가 있고, 서북쪽의 화촌방에는 서상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박종신은 조사에 의하여 창고의 곡식이 크게 결손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서하창의 경우, 환곡을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일 때 창고 감독과 실무담당자 색리가 좁쌀을 훔쳐내어 각 마을의 부유층들 집에 쌓아두었다가, 해빙기가 되면 그것을 배로 평안도에 운반하여 팔아 이익을 착복하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 이유로 박종신은 창고의 담당자들을 모두 옥에 가두어버렸다.
지방의 환곡을 관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감색(창고지기)들과 아전들에게 맡겨져 있었는데, 곡산읍의 창고들은 관아에서부터 100여 리나 떨어져 있어서 통제가 미약하였던 것이다. 이들 창고지기와 아전들은 수상운수의 요충지대인 곡산부 화촌 일대의 부유층들과 결탁하여 곡식을 빼돌렸던 것이다. 이때 그들이 거래했던 곡물의 총량은 약 2천 석에 달하였다. 이들의 환곡을 둘러싼 농간에는 그 지역 부유층들과 상인들이 구조적으로 결탁되어 있었다. 부유층들은 아전들이 훔쳐낸 곡식을 몰래 보관해주고, 상인들은 봄이 되면 이 곡식을 인근 평안도 지방으로 내다 팔아 이익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평안도는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며 강상들에 의해서 지역간의 곡물거래가 성행하여, 이를 틈타 지방 아전들이 환곡을 훔쳐내어 이익을 도모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1810년 박종신은 아전들이 훔쳐먹은 곡식을 천여 석이나 독촉하여 받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환곡에 불순물을 넣어 부풀리는 관행마저 금지시킴으로써 아전들과 부유층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향리들에 의해 자행되는 환곡 포탈의 부담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에게 전가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해감사 홍희신은 곡산사건의 보고에서 박종신의 치적을 옹호하였고, 포흠 환곡을 강제로 거둬들여서 빈민들이 은혜를 입었다고 두둔하였다. 즉 환곡 포탈로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계층은 일반 소농민과 빈민들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포흠 환곡을 받아내었다는 것은 결국 다시 향리 아전들이 그 부담을 가난한 농민에게로 돌리게 마련이어서 그 후유증은 빈민의 몫이었고 이는 농민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었다.
부사 박종신의 과감한 조치로 모리 행위에 실패한 곡산의 향리들과 장평리의 부유층들은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장평리 부유층들은 곡산의 아전인 한극일 등을 사주하여, 폭동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하여 보수금을 지출할 부유한 자의 명단과 그 액수를 기록한 수전기를 작성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한극일 등은 각 부락에 통지문을 보내 농민들을 곡산읍에 집결시켰다. 농민들은 통지문을 보고 격분하여 각기 몽둥이를 들고 모여들어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교활한 향리들과 부유층들에 의해 은밀히 사주된 1811년의 곡산 농민항쟁에서는 향리들과 농민들의 갈등이 묘하게 잠복되어버리고, 오히려 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령의 관권에 대해 저항을 꾀하였다. 조세부담 계층이었던 농민층은 읍리의 부유층이었던 향리들과 창고 담당자들 및 상인세력들과 연대하여 수령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때 농민들을 앞장서서 이끈 사람은 한명홍, 장진, 박대성, 심낙화 등이었다.
부사의 가렴주구
곡산 폭동의 동기는 위와 같이 향리들과 결탁한 일부 모리배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사 박종신은 그것을 적발하여 시정하려고 노력한 공권력의 대표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는 부사 박종신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 역시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던 것이다. 그는 환곡을 거두어들인 후에도 현장감사라고 핑계하여 곡물의 품질이 나쁘면 그것을 부유층들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품질 좋은 곡식으로 납부케 한 후 기일을 재촉하여 걷어들였다. 기한 내에 바치지 못하면 관속들을 풀어 집집마다 뒤져서 간직한 곡식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간혹 나눠준 미곡이 남아있으면 창고 곡식을 훔쳤다는 구실로 모조리 몰수해 창고에 쌓아놓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민란 직후 곡산민들의 참혹상을 목격한 사간원 헌납 유헌장의 보고서나, 곡산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이면승이 순조임금과 가졌던 대화에서는, 폭등의 직접적 동기를 곡산부사의 가혹한 조치라고 지적하였다. 즉 이 사건이 직접적 원인은 부사가 곡식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모은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박종신이 창고의 재고조사를 하고 현장감사를 행한 것은 사실 읍폐와 민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를 핑계로 부유층들의 곡식을 수탈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환곡의 운영을 바로잡는다는 미명하에 향리와 향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재정 운영권을 탈취하고 이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용하였다. 박종신은 부유층들로부터 곡물뿐 아니라 돈도 탈취하였다. 그는 재화가 많은 부민과 상인들을 주로 침탈하였으나 가난한 양민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형벌까지도 남발하였다.
정부의 진압과 처벌
곡산의 폭동을 보고받은 비변사에서는 2월 29일에 우부승지 이면승을 안핵사로, 좌변포도대장 오의상을 신임 곡산부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안핵사를 파견하면서 왕은 난민들을 엄히 다스려 백성들이 저항심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곡산의 농민들은 봉기 이후 줄곧 상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령을 축출한 이후 뚜렷이 공세를 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관망하며 시일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에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함으로써 농민들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3월 6일 안핵사는 해주목에 도착하여 5진영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약 한달 동안 5진영군의 봉기군에 대한 대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윤 3월 9일 안핵사는 난민들의 토벌을 끝내고 최종 조사 보고서를 올린 후 관군을 철수하였다. 농민들이 5진영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기간은 안핵사가 부임한 3월 6일부터 3월 중순경까지의 약 일주일간이었다. 대부분의 농민이 체포 구금된 것은 3월 14일 이후이며, 5진영군대는 3월 중순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봉기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5진영의 군졸들은 패퇴하는 농민들에 대한 잔혹한 살상과 토색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관군의 공격에 맞서 농민 봉기군은 각지에 통문을 돌려 저항세력을 확충하였다.
이에 다른 지역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들도 수령의 가혹한 침탈에 깊은 원한을 품은 자들이었다. 패퇴한 농민들은 4월말까지 도처에서 무리지어 저항하였다. 잔류군의 항전은 필사적이었다. 안핵사 이면승은 사태를 진압한 후에 보고서에서 사건의 주모자로 한극일과 심낙화 등 4명, 공모자로 최성덕 등 6명과 그들을 추종한 이동백, 김영철, 그리고 지방의 장교 이속 관노들을 열거하였다. 동시에 박종신의 죄도 함께 논죄하였다. 즉 그가 주민들에게 몹시 가혹하게 하고 수탈을 너무 혹독하게 하였으므로 멀리 귀양보내게 하였던 것이다. 곡산민들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도 관찰사 홍희신과 안핵사 이면승이 수령의 비리를 묵인한 채 자신들만 일방적으로 치죄하는 처사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토착 향임이나 토호들도 박종신을 경미하게 처벌한 데 불만을 품고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여 그를 암살할 세력을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이속들이 여기에 서명하였다. 이 점에 대해 당시 일부 고위직들도 박종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봉기에 가담한 130여 명을 잡아 강경하게 처벌하여 주모자 37명은 효수, 42명은 정배시켰다. 이렇게 하여 곡산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안핵사의 최종 보고를 받은 비변사에서는 난을 일으키고 참여한 농민들은 죄의 경중을 가리지 말고 모두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난의 원인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데 있는 것으로 보고 모든 책임을 봉기민에게 돌리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 한편 곡산부사 박종신을 백성들의 폭동을 야기한 책임자로 지목하여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후 처리책으로 곡산민들에 대한 위무와 삼정의 개선, 형벌 완화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농민항쟁을 계기로 삼정의 폐단을 거론하면서 개선을 촉구한 응교 이지연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난민들이 처벌에 대해 강경론을 폈다가 곡산민의 동향을 접한 수에는 태도를 바꾸었다. 직제학 홍석주도 정부가 봉기민을 지나치게 혹독히 처벌하는 데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였다. 또한 전헌납 유현장은 우연히 곡산부를 방문한 후 곡산민의 참상을 확인하고 수령의 탐학이 농민항쟁을 야기한 원인임을 입증키 위해 수령의 비리를 10개 조로 나누어 열거하면서 박종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는 곡산민이 절실한 요구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농민층을 옹호한 사람들은 항쟁의 원인을 수령의 침탈에서 찾았으며 박종신을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당시 예조판서 김이익, 좌의정 김재찬 등도 난의 원인이 박종신의 가렴주구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의 울산으로이 정배가 너무 미약한 처사였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김재찬, 김이익 등의 박종신 처벌론을 묵살하여다. 결국 곡산민들에게는 가혹한 처형이, 부사 박종신에게는 경미한 처벌이 내려졌던 것이다. 정부의 강경진압 결과 곡산부의 형세는 극도로 피폐되었고, 곡산민의 유리 실업 또한 극심하였다. 이에 정부는 곡산민들에 대한 위무책으로 중앙 각사에 상납하는 당해 연도 공물을 이듬해까지 미뤄주었다. 그러나 곡산의 피해는 쉽게 복구되지 못하여 순조 12년에는 안변 고원의 곡식 1500석을 옮겨 진휼하게 하였고, 순조14년에는 환곡 신포 전세에 대한 중지 탕감조치도 취해주었다. 순조 14년 8월에는 황주의 531호와 곡산의 204호에 대한 감세조치가 내려지고 유배인을 전원 석방시켰다. 또한 밀려있던 환곡, 군역, 전세를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는 곡산부이 타격이 극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
민중운동이 점차 잦아지는 19세기,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난들이 간헐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중 서북지방 최대의 난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었다. 1811년, 즉 순조가 즉위한 지 11년이 되는 해 12월 18일 저녁,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진사 김창시가 아래 격문을 낭독함으로써 홍경래의 난은 시작되었다.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니, 우리 관서지방의 원로들과 공사노비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의 옛터요, 단군시조의 옛 땅으로서 예의가 바르고 문물이 뛰어난 곳이다.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으니,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여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살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다.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되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있으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이 세상을 구하는 성인이 청천강 이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위의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그분은 나면서 신통함이 있었고, 다섯 살 때 승려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셨다. 장성하여서는 강계와 여연에 5년간 머무르면서 황명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기병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다. 의로운 기치가 이르는 곳이 어찌 참임금을 기다려 살아난 곳이 아니겠는가!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지역 군수들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이 격문을 다 읽자 홍경래가 참여자들에게 격문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자기는 선천 월봉산 아래 가야동에서 태어난 정진인의 지휘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강계의 폐사군 지역에서 봉기하여 철기 수만을 이끌고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횃불을 앞세운 봉기군은 선천으로 진격하여다. 이제 그들은 10여 년의 오랜 준비 끝에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서북민들의 사정
흔히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평안감사'라는 자리가 얼마나 좋은 관직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을까! 평안도의 중심도시인 평양은 옛날부터 우리 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고조선의 수도도 평양이요, 고구려가 만주벌판을 차지한 후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도읍을 옮긴 곳도 이 지방이다.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왕조는 개성을 수도로 하면서도 평양은 '서경'이라 하여 개경 다음 가는 중심도시로 삼았다. 고려태조 왕건은 수도를 정하면서 그 당시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인기가 있었던 풍수지리설을 믿고 서북민들을 관직에서 배제시켰다. 이러한 불만은 고려시대 중엽의 묘청의 난에 투영되었다. 묘청은 승려였지만, 그와 함께 난을 일으킨 정지상은 서북 출신으로 불만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전통적인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대에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나을 거치면서 서북인들은 더욱더 관직에서 소외되었다. 조선후기 과거에서는 생원 진사, 또는 대과의 정원에서도 서북인은 삼남 지방에 비해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면 홍경래의 난은 과연 서북지방에 대한 편파적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난 것인가? 홍경래의 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평안도 지방의 지역적 특성에 유의해야 한다. 평안도에는 일찍이 중앙정부의 차별로 인하여 사대부 즉 토착 양반층의 형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양반층보다는 향인층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중국과이 무역이나 수공업, 광산경영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나타나 새로운 향촌세력, 즉 신향층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 신향층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옛 향촌 세력은 뒷전에 밀리는 추세였다. 신향층은 경제적 상승을 전제로 하여 신분상승의 욕구를 이루려 하였으나 수령의 부유층에 대한 수탈행위에 의해 좌절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수령권 대 부유층의 대립이라는 갈등을 낳게 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부유민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들이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동지들을 규합하다
홍경래 난의 전후 사정을 비교적 잘 기록한 (진중일기)(홍경래 난의 진압과정을 기록한 책. 2권 2책. 필사본이다. 1811년 12월 18일부터 이듬해 6월 20일까지의 농민군 토벌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의병으로 자원하여 나갔던 정주군 남면 하월리의 현인복의 후손 현은우 소장본으로 그 원본은 규장각에 있다)에 의하면, 진압군 쪽에서 파악한 봉기군의 주동층은 다음과 같았다. "홍경래는 괴수요, 우군칙은 참모였으며, 이희저는 와주요, 김창시는 선봉이었다. 그리고 김사용과 홍총각은 손발의 역할을 하였다. 그 졸개로는 의주에서 개성에 이르는 지역 거의 대부분의 부호와 대상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파락 난당이 모두 부하가 되어 횡행하고, 떠돌이 굶주린 백성들이 또한 많이 투속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봉기군의 지도층으로는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그 중심이 되었고, 호응 세력으로는 의주에서 개성까지의 부호와 대상들이 포함되었고, 말단 군사력으로는 황해 평안도이 떠돌이 파락호와 난당 그리고 떠돌이 기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층은 평서대원수에 홍경래, 부원수에 김사용, 군사 또는 모사에 우군칙과 김창시, 도총에 이희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제초와 홍총각은 모의 단계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선봉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도층은 향촌 사회의 유력가들을 수령급의 유진장으로 임명하였고, 장사들은 군사지도자로서 장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지식인들은 종사관으로서 주로 북진군의 참모로 활동하게 하였다. 각 관아의 하급 관속들로서 내응한 자들은 감관 집사 등 행정실무자로 활동하였다. 홍경래의 본관은 남양이며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가계는 알 수 없으며, 4형제 중 셋째로 알려져 있다. 1811년(순조 11)에 일으킨 난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의 나이가 42, 3세라고 하였으므로, 그는 1770년(영조 46)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경래는 일반적으로 몰락한 양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민이라는 설도 있다. 하층 양반이었든 상민이었든 전답이 없는 빈곤한 처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홍경래는 4척 5촌의 단구로서, 얼굴이 희며 윤택하고 턱이 짧고 뾰죽하며 수염은 길었다. 그의 바른쪽 눈 위에는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홍경래는 젊었을 때 과거에 뜻을 두어 외숙 유학권에게서 유교 경전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28세 때 소과인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이 실패를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 때문으로 생각하였고, 여기에 대한 반감과 선동이 이 난이 중요한 동기라고도 알려져 있다. 과거에 실패한 후 그는 집을 나와 풍수 곧 지관이 되어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홍경래는 과거를 볼 만큼 유교 경서에 대한 교양을 쌓았고, 병서나 풍수지리서 기타 여러 가지 술서 등을 익혔다. 특히 당시에 유행하던 (정감록)에 통달하였다. 그러한 교양을 바탕으로 홍경래는 상당한 경륜을 지닌 지도자로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홍경래는 상당한 용력과 무술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홍경래를 포함함 주동자들은 개인적 무술 실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군사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관군이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것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화공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관군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당시의 전형적인 저항 지식인으로 군사지식과 지도력을 가지고 항쟁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정치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심각하게 부패해있고, 서울의 양반가는 주지육림의 생활을 하였지만 삼정의 문란으로 일반 백성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경래는 풍수를 업으로 삼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서북인들이 벼슬 진출에 제한을 받고 있어서 식자층의 불만과 불평이 팽배해 잇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이용하였다. 그는 진인설을 자기 행동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이 사상을 대외적으로 선전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폐악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로 변혁시킬 존재로서 진인 또는 정진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고 그를 따르자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가산에서 역시 풍수로 부호의 집에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났다. 홍경래가 우군칙을 처음 만나 친교를 맺은 것은 1800년(정조 24)이었다. 우군칙은 봉기 당시의 나이가 36세로서 태천 출생 양반의 서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아주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 같다.
외모는 5척 단구에 깡마른 몸매이고, 얼굴이 철색이며 빰은 좁고 길며 강팔랐다. 수염은 갓났으나 누르며, 하관이 빠르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시국을 논하면서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다음 해에 이미 병란을 함께 논의할 정도로 의기투합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시국에 불평과 불만을 품은 자들을 규합하여 동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0년 동안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중간 지휘층을 널리 포섭하였다. 봉기군의 중심인물로 홍경래가 정주목사에 임명하였던 최이륜도 봉기 7, 8년 전에 이미 포섭되었다. 홍경래는 지식층의 포섭을 위해 한때 홍삼장사를 한 일이 있으며, 상인층과 관계가 많았던 우군칙은 중간층 및 상인층의 포섭에 나서서 활약하였다. 우군칙은 우선 가산의 부호로서 자금원이 되어준 이희저를 끌어들였다. 그는 이희저의 부친 묘터를 잡아줌으로써 그를 포섭하게 되었다. 이희저는 봉기하기 수년 전부터 다복동에 큰 기와집을 짓고 우군칙과 어울리면서 준비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몰래 광산을 채굴하고 잠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희저의 자금이 바탕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벼슬이 막혀 현실에 불만을 품은 진사 김창시, 정주서이 거부 이침과 김속하, 안주의 상인 나대곤, 개성 상인 박광유와 홍용서 등도 끌어들였다. 또 힘센 장수의 발굴에 주력하여 홍총각, 가난한 평민 이제초 등을 끌어들였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 등을 포섭하였다. 김사용의 본명은 김종각이고 사용은 자이다. 그는 태천 서면 송우리에서 살았고, 거사 당시의 나이는 38, 9세였다. 그는 태천에서 명망 있는 향임 가문 출신이었으나 매우 가난하였다. 그는 봉기군을 잡아가던 장교를 급습하여 구출하는 등 봉기 초기부터 활약하였다. 김사용은 짧은 기간에 부원수로서 관산, 정주, 선천, 철산, 용천 등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관할함으로써 봉기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봉기군이 장악한 각 지역의 책임자나 행정담당자들을 임명하고 군사와 군량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김창시는 곽산의 양반 출신으로 봉기 당시 나이가 36세였다. 그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으며, 봉기 전해인 순조 10년 10월에 소과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봉기군 지휘자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학식이 있었다. 봉기군의 격문은 그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내응자를 모집하고 봉기의 명분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의주 및 곽산의 상인들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그들을 포섭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임신년에 병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고, 봉기 이후에는 모사로 활약하였다. 이희저는 일명 이태번으로 가산에 살던 부호였다. 그의 친척들 역시 대부분 여러 읍의 실권을 잡고 있던 향리이거나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그는 평안도 여러 지역의 실력자들과 널리 교분을 맺고 있어서 봉기를 조직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본래 역졸의 신분이었으나 재산이 많아 무과에 합격하였고, 돈으로 향임직을 사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복동에 봉기군 기지를 마련하는 데 경제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하였고, 봉기 후에는 도총을 맡았다.
홍총각은 홍이팔이라고도 하고 본명은 홍봉의라고 한다. 당시의 나이는 당시 24세로 곽산 남면의 평민 출신이었다. 그는 생업에 종사하였지만 빈곤한 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완력이 강한 장사로서 봉기의 핵심인물이었다. 남진군의 선봉장이 되어 혼자 가산을 점령하였고, 정주성 농성에서는 홍경래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봉기군의 지휘관으로 홍경래와 더불어 가장 많이 활약한 인물이었다. 이제초는 개천군 군내면 사람으로서 봉기 당시에 35세였다. 그는 몰락한 양반이거나 향임층 신분으로서 역시 매우 빈한하였지만, 완력 있는 역사로서 북진군의 선봉장을 맡았다. 이처럼 홍경래난의 주동 인물들은 몰락 양반, 토호지주, 향임층, 상인, 관예, 읍속 농민 등 여러 부류의 신분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파락 난당은 곧 관예와 읍속을 말하는 것으로, 난의 봉기 과정에서 즉시 내응하여 반란군이 청북지역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주요한 동력이었다. 또 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부호와 상인들은 상업적 기반을 갖는 토호지주층과 큰 상인층들이었다.
준비 과정
난의 주동자들이 봉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것은 1810년(순조 10) 11월 무렵이었다. 홍경래는 이때 우군칙을 만나 정진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봉기를 준비하게 하였고, 이를 들은 우군칙은 이희저와 함께 영변 묘향산 아래의 백령촌에 가서 은신할 것을 찾았다. 이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봉기군의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정월부터는 우군칙과 곽산의 진사 김창시가 나서서 청천강 이북 지역의 유력가와 부유층들에 대한 포섭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군칙은 4월에 이르러 다복동에 30칸의 기와집을 마련하였고, 이희저의 사촌 이명운도 새로 집을 구하여 중수하였다. 이리하여 가산 대정강 가의 요지인 다복동에 봉기의 본부가 되는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다. 다복동은 대정강 하류에 위치하여 청천강 이북 여러 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였고, 평양과 의주로 가느 길목에 위치하면서도 산으로 둘러싸여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곳이다. 홍경래는 그해 7월 평소 포섭해 두었던 각지의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 우군칙의 집에 머물렀다.
홍경래가 모은 인물들은 다복동 외에도 넓은 지역에 끼리끼리 모여서 지내면서 봉기에 대비하였다. 다복동 이외의 비밀기지 중의 하나는 신도였다. 그것은 용천의 바닷가에 있는 섬으로서, 홍총각, 김창시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서 봉기를 논의하였다. 그들은 또 선천의 검산성에서 회합하기도 하였다. 순조 11년 9월에는 이미 거사 준비가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이때 주동자 김창시가 곽산의 김대훈에게 와서 봉기의 준비상황을 선전하고 12월에 기병한다는 사실을 통지하였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집을 떠나 유랑하던 홍경래는 9월에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와 형제 조카 등 친척 14명을 이끌고 박천 진두로 들어갔다. 10월에는 주요 참여자들이 모두 다복동에 모여 준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부원수 김사용이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11월 이후에는 진두 대정강이 추도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강수홍 부자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주전작업을 벌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희전느 호피, 연철 등의 군수품을 사들였고, 선천의 유문제 최봉관이나 정주의 정진교, 철산의 정복일도 무기와 군수품 등을 다복동에 수송하였다. 한편 김창시는 다음해인 임신년에 기병이 있을 것이라는 요언을 퍼뜨려 민심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용력 있는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11월 중에 봉기의 주동자들은 거사의 맹약을 하고 서명식을 하였다. 그 숫자는 정부측이 압수한 (도록)이라는 문서에는 79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 참여한 혐의가 없거나 정도가 미미하여 처벌을 받지 않은 인물은 12명이었다. (진중일기)에는 59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봉기과정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던 사람은 60여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봉기는 처음부터 대단히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졌다. 11월에 들어서자 시장에 출입하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병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봉기가 시작되다
순조 11년 12월에 이르러 주동자들은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그리고 우군칙은 서울 물주의 자금을 받아 운산 촉대봉에 금광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광부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우군칙은 이희저와 박광유 등의 상인들에게서 나온 자금을 바탕으로 1냥 내지 3냥의 선금을 주어 사람들을 다복동으로 불러들였다. 봉기군의 일선 졸병들은 이들 광산 노동자층으로 구성되었다.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도 포섭되었다. 걸인을 비롯, 소상인 마부 등 다양한 업종과 향임층도 참가하였다. 가산 박천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이나 품삯 노동자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자들은 오라"는 말에 솔깃하여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봉기 날짜는 당초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들은 출병에 앞서 12월 15일에 사람을 평양에 보내 대동관을 폭파하고 그곳에서 소요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폭파장치가 물에 젖어 발화시간이 늦어지고 담당자도 도망하여, 그 계획은 단순 화재에 그치고 말았다. 17일에는 여러 지역의 반군들이 다복동으로 모여들어 크게 소란하게 되었다. 미리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이때 구성, 태천, 그리고 멀리 황해도 지역에서부터 다복동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소란한 사태는 곧 수령에게 포착되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18일 아침 민간인 수십 가구가 일시에 도주하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이들을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그 결과 곽산의 김창시, 박성신 등이 결당하여 난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희저, 김창순 등의 이름도 거명되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일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자 홍경래 등은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에 봉기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가산, 박천, 안주 방향의 남쪽 방향과 정주, 곽산, 선천, 철산을 거쳐 의주로 가는 북쪽 방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 공략하기로 하였다. 남진군의 지휘는 홍경래와 그 밑의 선봉장 홍총각, 모사 우군칙, 후군장 윤후검이 주도하였다. 정주에서 의주로 향하는 북진군의 지휘부는 부원수 김사용, 선봉장 이제초, 모사 김창시, 영장 김희련, 김국범, 이성항, 한처갑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도총 이희저는 남북진군의 군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12월 19일 새벽 3시경에 가산 삼교에 이르렀다. 고을 아전 이맹억과 김응석 등이 내응하여 봉기군은 마을로 들어갔다. 때마침 민가에 일어난 화재와 이 불을 끄라는 나팔소리로 어수선하였다. 가산군수 정시는 난리가 일어난다고 민심이 흉흉하고 군내가 떠들썩하며 백성들이 피난가려 하자, 홀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타이르며 피난을 중지시키고 있었다. 남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봉기군 50여 명을 이끌고 관아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정시에게 수령의 인신과 군지휘 표신인 부절 및 보화를 내놓고 항복문서를 쓰라고 요구하였다. 정시는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고 버티고 그들의 대역부도함을 꾸짖다가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 때 함께 죽었다. 정시 부자는 난이 진압된 후 그들의 의연한 태도와 충성으로 포상되었다.
남진군은 이렇게 쉽게 입성하여 윤원섭을 선천 주관장에 임명하여 지키게 하였다. 봉기군은 관아이 무기를 확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민심을 얻고 군사를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은 각 지역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하고 봉기군에 가담하라고 위협하였다. 이때 남진군의 군사력은 중간지휘자였던 기마병이 30-40명, 보병 군졸은 100-150명이었다. 봉기군의 숫자는 곧 늘어나서 300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19일 저녁 박천, 진두로 진격하여 다음날 새벽에는 박천읍에 도달하였다. 박천은 조그만 저항도 없이 함락되었다. 군수 임성고는 처자와 노모를 버려둔 채 서운사로 도망하여 은신하다가,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는 봉기군에게 항복하였다. 박천을 점령한 봉기군은 영변을 공격하고 이어 안주를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천을 점령한 후 직접 안주를 공격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즉 안주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과 이인배 등이 안주를 먼저 치자는 건의를 한 것이다. 도원수 홍경래가 이를 승낙하려 하였으나, 모사 우군칙이 원래의 계획대로 영변을 친 후에 안주를 칠 것을 고집하였다.
안주, 영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김대린 등은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홍경래를 죽여 공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김대린이 갑자기 칼을 뽑아 휘둘러 쳤다. 홍경래는 민첩하게 피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무경 등 안주 병영에서 가담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지도부는 홍경래의 회복을 기다리기 위해 21일에 가산 다복동으로 돌아갔고, 병졸들은 대정강 가에 모여 있게 되었다. 홍경래가 부상을 당해 시일을 끌게 되자 진격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후 봉기군의 작전에 커다란 착오를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북진군을 이끈 김사용은 선천부사 김익순의 체포령으로 붙잡힌 박성신을 구출하고 곽산으로 향하였다. 곽산군수 이영식은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옥에 갇혔고, 그의 아우는 칼에 맞아 죽었다. 이영식은 한 장교의 도움으로 8세 된 아들을 업고 야반도주하다가 추격을 받게 되자 중간에 아들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김사용은 이영식이 버리고 간 인신과 병부를 압수하고, 박성신을 곽산의 주관장으로 삼았다. 이어 김사용의 봉기군은 능한산성을 공격하고 정주성으로 향하였다.
정주성에서는 12월 16일에 벌써 난리가 난다고 흉흉하였다. 18일에는 좌수 김이천, 수성중군 이성천, 독진장군 홍하진 등과 기타 아전들이 모여 내응을 준비하였다. 봉기군은 정주성에서도 무혈입성하였고, 목사 이근주는 도망하여 향교로 피신하였으나, 곧 잡혀서 인신과 병부를 빼앗겼다. 김사용은 최이륜을 정주 주관장으로 임명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군병 500명 가량을 봉기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당시 지방사회의 지식층이며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좌수, 풍헌, 별감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의 군사 계층을 흡수하여 봉기군의 지도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 소 부농층 또는 경영형 부농층들이었다. 24일 아침에 김사용의 봉기군은 정주를 떠나 곽산을 거쳐 그날 저녁 선천에 입성하였다. 검산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은 25일 봉기군에 투항하였다. 이후 그는 봉기군의 참모가 되었다가 틈을 보아 도망쳐 나갔다. 김익순은 당시이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출신이었으나, 난이 평정된 후 비겁한 죄로 처형되었고 가족들도 모두 연좌되었다. 그는 흔히 장렬하게 죽은 정시와 대비되었다. 그의 손자 김병연은 연좌를 피해 도망하였다가 후에 조부의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시국을 풍자하는 시를 많이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사람들이 그를 그를 김삿갓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봉기군은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뉘어 군사를 일으킨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없이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각지에서 내응세력이 적극적으로 호응한 때문에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 각처에서 내응한 자들은 주로 좌수, 별감, 풍헌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 군직을 가지고 있었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상인들로서 대부분 돈을 내고 향임 계층으로 올라간 자들이 많았다. 봉기군은 곧 관아의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엄한 군율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민심을 얻었다.
정부군의 반격과 송림전투의 패배
한편 중앙정부는 12월 20일에 평안병사 이해우의 밀계를 받고 18일의 가산봉기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평안감사 이만수는 22일에야 순안현 장십부군 2초(1초는 1개 중대 규모로서 약 120명 내외)를 발동하여 안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는 이미 가산, 박천, 곽산, 정주, 희천 등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된 뒤였다. 사태의 진전에 경악한 중앙정부는 신홍주를 정주목사로, 정주성을 가산군수로 각각 임명하고, 이들에게 편의대로 접전하고 모병할 것을 명령하였다. 23일에는 운산군수 한상묵을 파직하고 백경해로 교체하고, 곽산군수 이영식을 정경행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이때 정경행은 벌써 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중앙정부에서는 아직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정주목사 신홍주는 하루만에 다시 영변부사로 임명하는 등 혼돈이 계속되고 있었다.
12월 27일까지 열흘도 채 안되는 사이에 이미 가산, 박천, 곽산, 정주, 희천, 선천, 철산 등 7개 지역이 함락되었다. 12월 24일, 정부는 금위영 안에 양서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을 양서순무사로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순무사 이요현은 27일에 출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안주에서 봉기군이 주춤한 것을 알고는 순무사의 출동은 뒤로 미루고 우선 훈련도감과 금위영 개성부 등의 보군과 마군 일부를 차출하여 서북 지방에 출정토록 하엿다. 그 동안 서울에서는 강도들이 부잣집을 습격하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하여 왕은 백성들이 동요되지 말도록 전국에 유시를 내렸다. 12월 28일 평안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관군은 비로소 전열을 가다듬고 봉기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29일 아침, 관군과 봉기군이 박천의 송림에서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송림에는 홍총각의 부대 300여 명이 이미 24일부터 진을 치고 있었고, 26일에는 홍경래, 김창시, 우군칙 등이 50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봉기군은 각지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천여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한편 관군은 평안도 일대의 군졸을 모아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루었으나, 그중 전투력을 갖춘 것은 약 9초의 병력이었다.
봉기군은 세 갈래로 진을 이루어 관군을 맞아 싸웠다. 그중 홍총각이 이끄는 선봉대는 병영 우후 이해승이 이끄는 진압군의 본대를 공격하였다. 평안병사 이해우는 백상루에 올라서서 양군의 전투를 조감하면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봉기군은 중앙돌파에만 주력한 나머지 전체 군사의 2/3가 관군의 중앙을 대적하고 나머지가 우익군을 공략하는 결과가 되어 관군의 좌익에 대하여는 방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병사 이해우는 관군의 중앙군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곽산 전군수 이영식으로 하여금 군졸 천여 명을 이끌고 출격한 봉기군의 후방을 치게 하였다. 이에 봉기군의 일부는 꼬리를 거두고 후퇴하게 되었다. 한편 선봉장 홍총각의 용맹으로 관군의 선봉이 의기를 잃고 후퇴하려 하자, 관군의 좌영장 오치수가 기세를 돋우며 봉기군을 진격하며 압박하였다. 이에 봉기군의 기병 3, 4명이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봉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크게 패하여 머리를 베인 자가 수백명이고 생포된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봉기군이 이 전투에서 패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관군과 봉기군은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 평야에서 전투를 벌인 점이다. 겨울이어서 은폐할 것이 없는 평야에서의 전투는 활과 총으로 무장한 숙련된 관군에게 크게 유리하였던 것이다. 둘째, 봉기군은 중앙돌파에만 주력한 나머지 전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지 못하였다. 셋째, 봉기군의 지휘부는 평야에 있었고, 관군의 지휘부는 언덕 위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관군은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하면서 지휘하는 반면, 봉기군의 작전지휘는 매우 국지적이었다. 이렇게 봉기군은 전술 전략면에서 관군에 비하여 훨씬 미숙하였던 것이다. 송림전투는 봉기군에게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관군은 송림을 휩쓸어 봉기군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진두에까지 봉기군을 추격하였다. 관군의 한 부대는 가산 다복동에까지 쳐들어가서 그곳 근거지도 불태웠고 이어 박천을 수복하였다. 관군이 밀고 들어가는 곳마다 불지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남녀노소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도륙하였다. 이른바 초토전술로 봉기군의 근거를 없애는 전술이었다. 이때 관군의 초토전술은 정부 안에서도 두고두고 논란이 될 정도로 극심하였다. 이 같은 관군의 초토전술 때문에 홍경래의 남진군이 정주성으로 후퇴할 때 가산과 박천의 남녀노소 백성들이 많이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봉기군 지휘부는 패주하면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주에 끌고들어갔다. 관군의 학살에서 그들을 구하고 항거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600-700명 규모의 북진군은 구성 공략을 준비하던 중에 송림 본대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12월 30일에서 다음해 정월 초하루 사이에 군사들은 대부분 흩어졌고, 그 주동층과 남은 병력은 정주성으로 들어가 합세하였다. 태천을 점령하고 있던 봉기군은 영변 관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었고, 곽산에서도 1월 8일 진압군의 공격으로 패하였다. 곽산을 지키던 유진장 박성신은 패주하여 선천으로 가서 정부군의 북진을 알렸다. 1월 9일에는 정주성에서 김창시가 진압군과 싸울 것을 건의하여, 그곳에 있던 이제초가 기병과 보병 천여 명을 이끌고 곽산으로 내려와 시송야에서 싸웠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관군은 1월 15일에 쉽게 선천을 점령하였다.
부원수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남진군의 패전 소식에 접하자 정주 이북을 완전히 석권하기 위해 1월 초하루 이후 작전을 개시하였다. 북진군은 힘들이지 않고 용천에 입성하고 이어 의주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의주 진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관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북진군 지휘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김사용은 용천 지방에서 진사급 중간 실력자들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회유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이임, 면임, 풍헌 들로 하여금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하층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게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하여 소집되었다. 이렇게 하층 농민층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장악하는 것은 중간 향반층이었으므로 이들을 통하여 병력을 소집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봉기군이 전열을 정비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정주성에서 농성하다
12월 29일 박천의 송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온 봉기군은 홍경래 이하의 지휘부를 정비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정주성은 매우 견고하였고 군량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었다. 홍경래는 김사용, 홍총각 등과 함께 서장대에 머물면서 대원수로서 총지휘를 하였고, 성내의 일반 사무는 동헌에 기거하는 유진장 김이대가 맡아보았다. 농성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였던 성문의 수비는 김석하, 신덕관, 오용진, 이하유, 윤효검 등 장사들이 맡았다. 그들은 진압군이 성에서 100보 밖에 있을 때는 활로 쏘고, 100보 안에 들어오면 총을 쏘며, 성 밑에 도달하면 돌을 던지는 전투법을 택하였다. 그들은 평상시에 성 밖에 복병을 배치하는 등, 관군의 공격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비하였다.
진압군의 선발대는 1월 2일 정주에 도착하여 농성자들의 항보과 양반들의 의병을 권고하였다. 5일에는 곽산군수 이여식, 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소모장 제경욱, 순천부사 이유수, 순천군수 오치수 등이 이끄는 병력으로 정주성을 일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압군은 봉기군의 반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하였다. 한편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 군사는 12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1월 10일 안주를 거쳐 정주성에 도착하였다. 여기에 송림전에서 승리한 안주 관군도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11일에 정주성을 포위한 진압군의 숫자는 서울과 개성에서 동원된 천여 명과 안주 평양 및 인근지역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합하여 8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진압군은 1월 16일 대포와 구름다리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봉기군은 응전하지 않고 있다가 관군이 성에 접근하자 맹렬히 반격하였다. 봉기군의 전술에 말려든 관군은 소모장 제경욱과 순무영 군관 김대택을 포함하여 21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관군은 수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봉기군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봉기군의 농성전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비되었다. 진압군의 야습에 대비하여 횃불을 밝히고 총을 쏘기도 하였고, 군악을 연주하여 기세를 돋우는 한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장기농성에 대비하여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던 곡식과 반찬을 징발하고 충분한 우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진입군이 봉기군이 사기에 압도되어 있었다. 정주성 내의 봉기군은 관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성 밖 인가의 곡식을 실어들이고, 동남문 밖 수천호의 민가에 불을 질러 관군이 접근을 막았다. 이에 대해 진압군은 민간의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방화와 살인을 계속하였다. 각 진의 관병들은 마을을 횡행하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군막 안에 쌓아두기도 하였고, 약탈시에 멋대로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진압군들 중에는 무고한 자의 목을 잘라 전과를 과장하는 일까지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이를 단속하는 금령을 거듭 내려야만 했고, 심한 경우에는 난동자를 효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농성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봉기군 지휘부는 '오랑캐 병력'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민심을 이끌어갔다. 실제로 그들은 1월 말에 창성, 벽동 등지로 가서 원군을 이끌어올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2월 3일 진압군은 병력을 총동원하고, 특별히 만든 사다리차 5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사다리차는 성을 내려다볼 정도로 높았다. 밖에는 두꺼운 널빤지를 대고 소가죽을 씌워서 그 위에 총수가 엎드려 있고 안에는 군졸들을 숨겼다. 이는 성에 육박하여 군졸들이 성을 넘게 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봉기군은 성루에 은신하여 총을 쏘는 데 비해 관군은 은신처가 없이 노출되어 싸우는 형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계속하여 싸웠으나 관군은 봉기군을 당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주로 봉기군이 선제공격을 하였다. 농성이 계속될수록 진압군도 초조해지게 되었다. 봉기군의 입장에서는 식량이 줄어들고 보급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포위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 밖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활로 타개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압군은 2월 25일 또 한번 전군을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3월에 들어오자 봉기군은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3월 8일에는 홍경래가 직접 천여 명을 이끌고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의 부대를 불로 공격하여 사망 70명, 부상 137명의 피해를 입히고, 봉기군도 46명이 죽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활로를 뚫을 수는 없었다. 3월 20일에는 봉기군 1천여 명이 북문으로부터 공격하여 나왔다. 이때 관군은 군량을 나르기 위해 포구에 많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오가 허약하였다. 봉기군은 이 같은 형편을 성 위에서 탐지하고서 목책을 부수고 돌격해들어갔다. 그리하여 의병장 허항과 관군 22명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봉기군도 관군의 반격을 받아 48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피해를 입었다. 홍총각과 엄계량은 22일 다시 공격하여 17명의 관군을 죽였으나, 봉기군도 69명이 전사하고 87명이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시일이 경과하면서 정주성 내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갔다. 곡식이 떨어져 군병들에게 당초 하루 2되씩 주던 배급을 1되 5홉, 1되, 나중에는 6홉까지로 줄였다. 소나 돼지는 물론 나중에는 말도 10여 필을 남기고는 거의 다 잡아먹었고, 횃불을 올리기 위해 성채의 집도 부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말에는 인구를 줄일 목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노약자와 부녀자 227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가운데 이제초의 동생인 이제신을 중심으로 홍경래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사분란한 지휘체계가 유지되었다. 4월에 들어서도 관군의 공격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봉기군의 양식이 고갈된 약점을 이용하여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봉기군은 관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밤에는 한층더 많은 횃불을 성 주위에 밝히고 총소리와 함성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4월 3일부터 관군은 서의 동북 모퉁이에 모래를 쌓아 성 높이에 육박하고 사방에서 성을 공격하는 한편, 북장대 쪽으로는 땅 밑을 파기 시작하였다. 양동작전을 써서 성을 폭파하려는 것이었다. 굴착은 18일에 완료되었고,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화약 1800근을 장전하였다. 드디어 4월 19일 새벽, 화약에 불을 댕기자 1시간 뒤에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였다. 성은 파괴되고, 진압군은 성 안으로 돌입하였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고, 홍총각, 김이대, 윤언섭, 양시위 등은 사로잡혔다. 우군칙, 이희저, 최이륜 등은 난군에 섞여 달아났으나 구성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농성에 참여했다가 정주성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이었다. 이중 10세 이하의 소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23일에 모두 참수에 처해졌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민란은 이렇게 정주성에 고립된 채 병력의 수나 군비에 있어 몇 배 우세한 중앙군 지방군 민간의병의 진압군과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들어가 저항에 가담하였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 밖 농민들의 협조도 컸다. 정주성의 농성군은 주로 박천과 가산 일대의 농민들이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봉건사회체제이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민간이 의식 속에 남아 있었고, 이 난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광범한 소농, 빈민층은 이후 그후 임술민란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하였다.
항쟁의 역사적 의의
홍경래 난은 근대 초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이 소요들은 대부분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지식인'들과 장사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경제 형편과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의식과 행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간 실력자들이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겠다. 빈민층의 자발적인 참여는 이후 민란의 단계로 발전되었다. 이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신흥 상공업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 홍경래 난이 지향한 것은 반봉건 투쟁이라는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이나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난의 모의나 진행 중에 토지개혁이나, 신분제 폐지, 삼정의 개혁 등 가난한 하층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구상되지 않았다. 격문에서는 단지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하였고, 정작 소농과 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는 대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홍경래 난에는 신흥 상공업층의 참여라는 자본주의적 맹아기적 현상도 내포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던 당시에 조선왕조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한 일은 그후 반봉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하층농민으로 하여금 전제왕권과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각서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홍경래 난이 끝난 후 민간에는 정감록이나 해도진인, 미륵신앙과 함께 홍경래 불사설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항쟁의 여파
1811년의 봉기는 서북지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홍경래군이 가산, 박천 등지를 석권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을 받아 해주, 황주, 서울 등에서도 소규모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12월 28일 해주의 귀락방에서 수백명이 무리를 이루어 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횡행하면서 난동을 일으켰다. 이에 감영의 군대가 나갔으나, 그들은 대항하면서 흩어지지 않았다. 그중 노인담, 김여철, 홍잉죽, 곽성즙 등 4인은 주동자를 자칭하면서 난민들을 지휘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싸우다가 노인담과 곽성즙 등 10여 명이 잡히고 나머지는 흩어져 달아났다. 붙잡힌 사람들은 당일로 현장에서 효수되었다. 이에 대한 황해병사의 장계에는 '관서의 적'과 서로 연결될 염려가 업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들이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듣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주 효진포에서는 1812년 1월 홍경래가 정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뱃사람들이 마장리, 요암리 등 12포구에서 3백여호를 불질러 태우고 4명을 죽이는 등 난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괴수였던 뱃사람 김덕춘, 김사옥 등 3명은 체포되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되었다. 이 또한 홍경래군의 봉기에 호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루에서도 민간에 흉흉한 말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홍경래 일당은 성루에 첩자까지 두어 조정의 정세를 탐지하고 성루의 동정을 일일이 입수하는 한편, 이들을 동원하여 민심을 선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염탐꾼은 각 도의 감영과 고을에도 있었다. 각지의 요소마다 그들 동조자들을 배치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활동하였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김사용의 지시를 받은 유한순이 조정의 정세와 관군 소식을 탐문하고, 남문 기둥과 옛 장용영 대문에 괘서를 붙여 민심을 선동하다가 2월에 잡혀 처형되었다. 유한순은 본래 영유 사람이었는데, 서울과 지방을 출입하면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는 한때 향리를 가칭하다가 백령도에 충군된 적도 있었다. 여기서 풀려난 이후 그는 김사용을 만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그는 김사용의 자금을 받고 서울에 잠입하여 아내를 얻고 정탐활동을 하였다. 그는 관군의 소식을 탐문하여 선천의 홍경래군에게 전해주었고, 다시 김사용의 지시를 받아 서울에 들어와서 궁성 부근에서 기밀을 정탐하다가 포교에게 잡혔던 것이다. 양반인 한기조는 서울에 살면서도 봉기 지도자들에게 글을 보내 거사에 가담했다가, 봉기군이 용천에서 패퇴한 후 그 문서가 알려짐으로써 처형당하였다. 또한 현직 관원이었던 박종일, 이진채 등도 봉기군에 은밀히 가담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였다. 박종일은 1812년 봄 홍경래 난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옹원 봉사로 있으면서 당시 백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참설을 이용하여 이진채와 더불어 사당을 만들었다. 그들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은언군의 아들을 추대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건너가 군량조달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정이 홍경래에 쫓겨 남쪽의 공주나 안동으로 피난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때 성내의 포수 3백여 명의 호응을 얻어 봉기하면 내응이 있을 것이고, 또 분원의 군사가 돕고 전라관찰사가 협조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동조자들을 모았다. 그들은 "국가의 운수는 4백 년"이라고 하면서, 도참서의 말을 빌어 변혁이 올 것이라고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중인, 서민의 무리가 양반을 도륙하고, 액정서의 환관들과 결탁하여 내용을 받는다"고도 하였다.
그들은 3월에는 새로 수립된 정부군이 도성을 공격하여 서울의 지배층을 모두 살해한다는 등으로 민심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2월에 화공, 3월에 기병"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군량미의 확보를 위해 미전인들과 자산가들을 선동했다. 이들 주모자인 홍주 출신의 이진채, 서울 출신의 고령인 박종일, 양주의 서얼 출신 한광우는 중인과 서얼로 주축을 이루고 포수와 환관들을 모아 거사하려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잡혀서 신문을 받게 되자 "계략을 써서 재물을 빼앗을 모의"라고 했지만, 그 퍼뜨린 말들은 인심을 선동하기 위한 유언비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소동을 틈타 평민층이 양반을 죽이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다소 비현실적인 거사계획은 농민층의 봉기와 성격이 상통되는 점이 많다. 다만 서울의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여 난동을 꾀한 점이 이채롭다고 할 것이다. 서울의 민중들을 동원하려는 이러한 구상은 일찍이 그 전례가 없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의 변란 가운데 대부분은 준비단계에서 고발당하거나 가담자의 배반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주도층이 광범한 농민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집권층과 직접 무력대결을 벌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유일한 사례이다. 홍경래가 남긴 상징적 영향은 매우 커서 난이 진압된 1812년 이후에 일어난 변란들 속에는 이른바 '홍경래 불사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당시 변란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홍경래는 고무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글 고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