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고명딸로, 평생을 온갖 굴곡에 시달리며 살아 온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명 라나 피터스 여사가 지난 11월 22일 미국 위스콘신 주의 한 요양원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85세.
어린 시절, 아버지 스탈린과의 단란한 (?) 모습.
1967년 미국으로 망명했을 무렵의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그녀의 인생은 한편의 소설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말 기구했습니다.
6세 때인 1932년에는 스탈린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생모가 자살했고, 10대 시절에는 연인이 아버지에 의해 시베리아로 강제 유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대 시절을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으로 보낸 뒤, 스탈린의 사망 후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름을 스베틀라나 알리류예바로 바꾸어 세상의 이목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윽고 인도인 연인 브리제쉬 싱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브리제쉬 싱이 1967년 오랜 병고 끝에 사망하자, 스베틀라나는 그의 유해를 인도의 유가족에게 전달한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 출국한 뒤, 인도에서 뉴델리의 미국 대사관으로 가 전격 망명 신청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으로 서방 언론의 대단한 주목을 받았고, 미국 망명 직후 발표한 그녀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스베틀라나는 1970년에 세계적 건축가였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조수였던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와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고작 3년 뒤 또다시 파경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 후 소련에 남겨두고 온 다른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1984년 전격 귀국했던 그는 다시 2년뒤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몇 차례 사기를 당해 빚 독촉과 온갖 구설수에 시달린 뒤 90년대 초반 이후로 유럽의 이곳저곳에서 한동안 불안정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영국에서는 한때 노인보호시설에서 거주했고, 스위스에서는 수녀원 부속 보호시설에, 그리고 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위스콘신의 시골 마을에서 세번째 결혼 때 썼던 미국식 이름 "라나 피터스"로 살면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허름한 집에서 조용하게 말년을 보냈습니다.
작년에 위스콘신의 지역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스베틀라나, 아니, 라나 피터스 여사는, "아버지가 내 인생을 부숴버렸다. 세상 어디를 가서든 나는 스탈린이란 이름에 딸린 정치적 죄수였다"라고 술회하면서, "운명을 탓할 수는 없지만, 때론 어머니가 왜 평범한 목수와 결혼하지 않았을까란 원망이 들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2010년 인터뷰 당시 말년의 모습
평생 동안 냉전체제의 숙명적 아픔을 지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부디 이제 냉전체제나 철권독재 따위 없는 곳에서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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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스탈린의 딸이 맨위의 사진에서 암시하듯이 실제로 저런 멋진 명언을남겼는가 알아보려고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해보자니 직접 그런 말을 남겼다는 기사나 문장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기구한 삶을 잘 들여다 본 그 누구가 그녀의 삶에 의거하여 만들어 낸 명언이 아닌가 의심간다.
이여인은 한때 소련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을 다시 보려고 러시아에 다시 입국하여 자기가 전향한 것을 사과하고 그곳서 한 2년 살다가 다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와 살다가 85세에 미국 위스콘신에서 그 기구했던 삶을 마쳤다고 한다. -유샤인
One will become a communist should he learn of communism by books.
One will become an anticommunist however, should he learn of it
by experiencing it. (just as Starlin's daughter who denounced her country to immigrate to the US.)
- 유샤인 번역, Translation: YouShine@yoush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