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문체(연변대학 조문학부 홈에서)*김관웅*
1. 간결체(简洁体)
간결체문체는 되도록 간단하게 요약한 문체를 말한다. 이 문체는 어구가 적고 의미가 충실하며 여운이 많지만, 자칫하면 뜻을 모르게 된다. 많은 내용을 근소한 어구로 긴밀하게 압축하여 함축성 있게 표현한 문장 스타일을 간결체 또는 간약체라고 하는데, 외형적인 면에 있어서는 만연체에 비해 말이 적고 센텐스(문장)가 짧으며 문장의 구도도 단순하다.
간결체의 특징은 압축과 선택인데, 압축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전체를 서술하여 독자로 하여금 세부를 상상하게 하는 방법이라면 선택은 내용의 부분을 표현하여 그 전체를 상상하게 하는것이므로 자칫하면 개념적인 문장이 될수도 있어서 세련된 연마를 요한다.
로신의 수필중에는 간결체로 쓰여진 작품이 많은데 그가운데서도 ≪전사와 파리≫가 가장 유명하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한 사람의 위대함을 평가함에 있어서 정신상의 거대함과 체격상의 거대함을 가늠하는 법칙은 완전히 상반된다고 지적한적 있다. 후자는 거리가 멀수록 작아지고 전자는 반대로 점점 커진다. 가까울수록 작아지는것은 결점과 상처가 더 잘 보이기때문에 그 사람은 신도(神道)가 아니고 괴물이 아니며 야수(野兽)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이고 보통사람과 다름이 없다. 또한 이러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사했을 때 파리들이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전사의 결점과 상처자국 때문이다. 파리들은 마구 빨아대고 윙윙거리며 죽은 전사보다 더욱 영웅답다고 우쭐거린다. 그러나 전사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파리를 쫓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파리들은 더욱 기승스레 윙윙거리면서 스스로 불후(不朽)의 소리로 여긴다. 그것은 그것들의 완전함은 전사들보다 퍽 우위에 있기때문이리라.
확실히 파리의 결점과 상처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전사는 영원히 전사이고 완미한 파리도 결국은 파리에 불과하다. 썩 물러가거라, 파리들아! 네 놈들은 비록 날개가 달려있고 또 윙윙거릴수 있지만 전사를 초과할수는 없는것이다. 너 이놈, 더러운 벌레들아! ―로신의 ≪전사와 파리≫ 전문
이 수필은 자수가 천자정도밖에 안되며 고도의 함축미를 가지고있는데, ≪결점이 있는 전사는 영원히 전사이고 완미한 파리도 결국은 파리에 불과하다.≫와 같은 구절은 간결한 경구와 같다. 동시에 이 수필은 비록 짧기는 하지만 긴 여운을 끌면서 우리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펼쳐주고있는바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尽而意无穷)≫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우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군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려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밖 그 늙은 버드나무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엄니, 돌아오지 않은 계집애, 돌아오지 않은 이야기가 돌아올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여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의 ≪길≫ 앞부분
이 글은 수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문시에 가깝거나 그 범주에 드는 글이라고 해야 타당할것이다. 2백자 원고지에 2매 분량의 짧은 글로서 시적으로 이루어진 산문이라 할가 쟝르구분은 모호하지만 시적인 요소가 풍부하여 은은한 감동을 주는 글이다.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는 첫구절부터 그렇다. ≪내 첫사랑도 그 길우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다음 구절도 시적인 압축을 보이고있어서 간결체문장의 함축미를 충분히 발휘하고있음을 어렵지 않게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한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인 황송문은 시적인 함축미를 갖고있는 많은 간결체수필을 창작했는데 그 실례로 ≪간장이 제맛을 내듯≫과 ≪청보리정신≫을 들어본다.
간장이 맛들기 위해서는 갈등을 해소하는 려과의 과정이 요구된다. 간장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메주와 소금이 만나야 하는데 그 메주는 잘 썩어야 하거니와 소금은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장독속에서 잘 썩은 메주와 부패를 막으려는 소금이 짠 소금물로 어울려 잠긴 채 곰삭는 과정은 몹시도 쓰리고 아플것이다. 둔중한 뚜껑에 덮인채 춘하추동 사시장철 숨막히는 어둠속에서 견디여내려면 속삭는 아픔도 클것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이와 같이 속삭는 간장독 같은 성질의것이여서 갈등을 견디여내는 인내가 요구된다. 속삭는 아픔을 다소곳이 참고 견디여낸 끝에 마지막으로 열을 가해서 달여내는 간장처럼, 펄펄 끓는 사랑으로 죽었다 깨여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작은 종지에 담겨져도 음식상중앙에 좌정하게 된다. 왜냐 하면 그것은 모든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는 맛의 중심이기때문이다.
짠맛에서 약간의 단맛으로 우러나기 위하여 펄펄 끓는 사랑으로 거듭나는 끝에 개성적인 사람이 될수는 없을가 하는게 요즈음의 나의 관심사다. 짠맛속에 약간의 단맛으로 우러나는… ―황송문의 ≪간장이 제맛을 내듯≫ 전문
황송문의 수필 ≪간장이 제맛을 내듯≫은 詩로도 표현된바 있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는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여나는 부활의 륜회
사랑을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황송문의 ≪간장≫ 전문
오늘은 청보리의 그 푸른 정신으로 살고싶다. 가난한 나라에 태여나 살아도 가난한줄 모르고 보란듯이 살고싶다. 오뉴월 보리밭은 찬란한 축제였다. 천둥지기라고 하는 천수답에서 자란 보리는 악보와 같은 대자연의 층계를 오르내리며 화음되고있었다. 지대 낮은 은남촌의 들녘에서 북부산께로 부는 바람은 지그재그로 휩쓸어 가리마를 타면서도 풋풋하게 살진 보리를 마치 녀고생들이 어깨 짜고 물굽이로 휘는 매스게임처럼 변화무쌍한 교향곡을 연주하고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노고지리는 지불대고, 그 아래 보리누름은 청춘의 황금마차를 련상케 한다. 그 청보리의 그 푸른 정신을 그리워하는것은 나뿐만 아닐것이다. 겨우내 얼어죽지 않고 밟히면 밟힐수록 농부의 뚝심으로 일어나는 그 푸른 선비정신으로 살고싶다. 푸른 하늘과 종달새를 머리에 인채 두팔로 어깨 짜고 만국기처럼 일렁일렁 지그재그로 휩쓸고 흐르는 청보리의 그 푸른 정신으로 살고싶다.
―황송문의 ≪청보리정신≫ 전문
황송문의 수필 ≪청보리정신≫은 시로도 표현된바 있다.
청보리의 푸른 정신으로 살고싶다
가난한 나라에 태여나서 살아도 가난한줄 모르게 수천톤의 해살을 받아들이는 양지바른 토양에서 보란듯이 살고싶다.
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잘 가르치는 그런 사대의 사내새끼가 아니라
자가용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거나 면사포를 쓰고 깜둥이에게 들리여가면서도 하이힐 코빼기를 까딱거리는 정신 희미한 계집의 헤픈 웃음은 말고
짓밟히면서도 일어서는 청보리의 사상, 농부의 뚝심으로 살아나는 그 푸른 정신으로 살고싶다. ―황송문의 ≪청보리≫
2. 만연체(漫衍体) 간결체와 량극을 이루는것은 만연체이다. 만연체수필은 많은 어구를 사용해서 섬세한 감정을 상세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문장의 흐름이 느린 문체를 말하는데, 그 내용에 비해 많은 말을 동원하므로 반복하거나, 설명, 수식 등을 써서 문장이 길어진것을 가리킨다. 이 문체는 압축과 생략을 피하고 많은 어구를 동원하여 반복하고 설명하고 수식하므로 문장의 긴밀성이 약간 길어지게 된다. 만연체는 간결체와는 반대로 많은 어구의 사용과 장문(长文)이라는데에 있다. 이러한 문체는 군말이 많은 대신에 내용을 부드럽게 하고 예술성을 만들어내는 장점도 있다.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것이다. 눈을 즐겨하는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 아니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여 지르는듯한 느낌이 난다. 눈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질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缘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目礼)를 보내지 않을수 없게 되는것이다.
나는 눈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듣기를 나는 좋아하는자이기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들어오는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旧壳: 케케묵은 제도나 관습)을 탈(脱)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은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수 없는것이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긴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여 모든것은 일시에 원시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보인다). (생략)
보라! 우리가 절망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속에 잠겨있던 모든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恩宠)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있기때문이다.
말라붙은 풀포기, 앙상한 나무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百花)를 달고있음은 물론이요, 괴 벗은 전야(田野)는 성자의 령지(领地)가 되고,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谐调: 잘 조화됨, 즐거운 가락)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 우리의 회의(怀疑)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우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아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뿐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것을 덮어줌으로 의해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이지만, 특히 그중에도 눈에 덮인 공원, 눈에 안긴 성사(城舍), 눈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古蹟) 눈속에 높이 선 동상(铜像) 등을 봄은 일단으로 더 흥취의 깊은것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한 옛 시를 읽은것과도 같이 배후에는 알수 없는 신비가 숨쉬고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눈이 내리는 공원에는 아마도 늙을줄을 모르는 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뛰여다닐지도 모르는것이고, 저 성사(城舍)안 심원(深园)에는 이상한 향기를 가진 알라바스터의 꽃이 한송이 눈속에 외로이 피여있는지도 알수 없는것이며, 저 동상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을 저 혼자 알게 되는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있을지도 모르기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된 눈은 도회에 속할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산중 깊이 천인만장(千仞万丈)의 계곡에서 맹수를 잡는자의 체험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된다.
생각하여보라! 이 세상에 있는 눈으로서는 여러가지가 있을것이니, 가령 열대의 뜨거운 태양에 쪼임을 받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멀고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안타르크리스에 잔존(残存)해 있다는 눈, 우랄과 알라스카의 고원에 보이는 적설(积雪),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에 없어져버린다는 상부 이탈리아의 눈 등―이러한 여러가지 종류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알수 없다고 아니할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거리의 술집이나 몇집 들어가며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되는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赋)란 것도 근거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김진섭(金晋燮)의 ≪백설부(白雪赋)≫중 일부
만연체문장의 좋은 본보기로 되는 김진섭의 대표작 ≪백설부(白雪赋)≫는 한겨울에 순수무구(纯粹无垢)하게 내리는 흰눈에 대한 도시인의 감회(感怀)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이 수필에는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수 있으랴!≫는 등의 구절이 절창(绝唱)을 이룬다. 여기에서는 <부(赋)>가 사용되는데 이 <부(赋)>란 원래 글귀끝에 운(韵)을 달고 대구(对句)를 맞추어 짓는 한문체의 한가지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이름만을 따왔을 따름이다. 중국 현대산문중에도 제목에 <부(赋)>가 붙은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양삭(楊朔)의 ≪차화부(茶花賦)≫나 준청(峻靑)의 ≪추색부(추색賦)≫ 등이 그 실례이다. 물론 <부(赋)>가 붙은 작품들이 모두 만연체와 련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강건체(刚健体)강건체수필은 문장의 기세가 강직(刚直)하고 크고 거세며 웅혼(雄浑), 침중(沈重), 호방(豪放)하여 남성적인 문체로 나타나는바 격렬한 분노라든가, 앙양된 정열, 굳센 결의와 의지, 꿋꿋한 신념을 표현하기때문에 박력이 있고, 격조가 웅장하며 호흡이 다급한 특징을 가지므로 현실을 비판한다거나 하여 치열성을 드러내게 된다. 중국 근대계몽기의 량계초(梁啓超, 1873~1929)의 수필 ≪소년중국설(少年中国说)≫은 애국충정으로 끓어넘치는 강건체수필의 한 보기이다.
일본인들은 우리 중국을 첫번째도 늙은 대제국이라고 부르고 두번째로도 늙은 대제국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아마도 유럽사람들의 말을 본뜬것이리라. 오호라! 우리 중국이 과연 늙은 대제국이란 말인가? 량계초는 말한다. 허튼소리! 무슨 말이냐! 무슨 소리냐! 내 눈에는 소년중국이 비쳐있는데야!
나라의 늙고 젊음을 론하려면 먼저 사람의 늙고 젊음에 대해 론하시라. 로인들은 늘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소년들은 늘 장래를 생각한다. 지난 일을 생각하기에 미련의 마음이 생기게 되고 장래를 생각하기에 희망의 마음이 생기에 된다. 미련의 마음을 가지고있는 까닭에 보수적이고 희망의 마음을 가지고있기에 진취적이다. 보수적이기에 낡은것을 지키려 하고 진취적이기에 날마다 새로움을 추구하게 된다. 지난 일을 생각하기에 사사건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선례를 좇게 되고 장래를 생각하기에 사사건건 모두 지내보지 못한것이므로 늘 과감히 파격(破格)을 추구하게 된다. 로인들은 늘 근심이 많고 소년들은 늘 삶을 즐기려 한다. 근심이 많기에 늘 신심을 잃으며 삶을 즐기려 하기에 늘 기가 성해있다. 신심이 적기에 겁약하고 기가 성하기에 호매롭다. 겁약하기에 굽실거리게 되고 호매롭기에 모험을 좋아하게 되고 세계를 창조할수 있게 된다. 로인들은 늘 일을 벌리는것을 싫어하고 소년들은 늘 일을 벌리는것을 좋아한다. 일을 벌리는것을 싫어하기에 늘 모든 일은 다 할수 없다고 여기게 되고 일을 벌리는것을 좋아하기에 모든 일은 다 할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로인들은 저녁의 해와 같고 소년들은 아침의 태양과 같다. 로인들은 늙고 여윈 소와 같고 소년은 새끼호랑이와 같다. 로인은 중과 같고 소년들은 협객과 같다. 로인들은 옥편과 같고 소년들은 극본과 같다. 늙은이들은 아편과 같고 소년들은 브랜디술과 같다. 로인들은 다른 행성의 운석과 같고 소년들은 큰 바다의 산호섬과 같다. 로인들은 애급사막의 피라미드와 같고 소년들은 씨비리의 철도 같다. 로인들은 가을날의 버드나무와 같고 소년들은 이른 봄의 풀과 같다. 로인들은 사해(死海)의 저위택(潴为泽)과 같고 소년은 장강의 발원지와 같다. 이것이 바로 로년과 소년 성격의 부동한 점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량계초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나라 역시 이러하다고 말한다…
량계초는 말한다. 오늘의 늙은 대제국을 만들어낸것은 중국의 늙다리들이 만들어낸 원업(冤业)이다. 장래의 소년중국을 만들어내야 함은 중국소년들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몽땅 우리 소년들에게 있다. 소년들이 지혜로우면 나라도 지혜롭게 되고, 소년이 부유하면 나라도 부유하게 되고, 소년들이 강하면 나라도 강하게 되고, 소년들이 독립하게 되면 나라도 독립하게 되고, 소년이 자유로우면 나라도 자유롭게 되고, 소년들이 진보하게 되면 나라도 진보하게 되고, 소년들이 유럽을 이기게 되면 나라도 유럽을 이기게 되고, 소년들이 지구에서 우쭐하게 되면 나라도 지구에서 우쭐하게 된다. 붉은 해가 방금 솟아올라 그 빛발이 크게 비치고있다…
종(纵)으로는 천고(千古)가 있고 횡(横)으로는 팔황(八荒)이 있다. 앞길은 바다 같고 래일은 길기도 길다. 아름다워라 나의 소년중국이여, 하늘과 함께 늙지 않으리! 장하도다, 나의 중국소년, 나라와 함께 무강(无疆)하리라! ―량계초의 ≪소년중국설(少年中国说)≫ 앞부분
이 수필은 애국적인 지식인이며 계몽사상가인 량계초가 전 중국인민들과 전세계를 향하여 웨친 우렁찬 납함(纳喊)으로서 굳세고 정열적이고 호방하고 박력있는 남성적인 양강지미(阳刚之美)를 갖고있다.
한국 박종화(朴锺和)의 ≪민족(民族)≫에 실린 ≪서설(序说)≫도 강건체수필을 리해하는데 실감적으로 도움이 될것이다.
조선민족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 더구나 셋도 아니요 넷도 아니다. 조선사람은 삼천만이나 조선민족은 다만 하나다. 아득하고 오래기 반만년전 송화강반, 백두산아래 성스러운 천리천평(千里千坪) 신시(神市)의 때로부터 가까이 서른여섯해동안, 뜻 아니한 왜노의 잔인한 압박과 구속밑에서 강제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의 굴레를 뒤집어씌우고 창씨와 개명까지 당했던 을유년 팔월 십사일 어제까지 조선민족은 다만 하나요, 둘이 아니다.
또다시 앞으로 조선민족은 억천만년 백겁을 감돌아 ≪한밝≫의 밝은 광명을 동방으로부터 세계에 부어내리고, 삼천만 민족이 삼억 창생이 되는 때까지 조선민족은 다만 하나요, 둘이 아니다.
민족은 조상을 같이한다. 맥박에 뛰노는 피줄이 본능으로 엉키니 하나요 둘이 될수 없다. 말이 같고 풍속이 같으니 하나요 둘이 될수 없다. 멀리 바다를 건너 도꾜, 하와이, 뉴욕, 런던에 외로운 그림자를 짝하여 달빛아래 초연히 거닐어보라. 만가지 향수가 그대의 머리를 스치리라. 삼각산이 보이고 한강물이 그리워지리라. 모란봉이 떠오르고 대동강이 생각나리라. 다행히 남만격설지성(南蛮鴃舌之声) 떠드는 외국사람틈에 고향친구를 만나 방아타령이나 아리랑타령 한곡조를 들어보라. 그대의 눈에 까닭 모를 더운 눈물이 주루루 흐르리라. 이것이 조국애요, 민족애다. 조선민족은 다만 하나요 둘이 아니다. 조선민족은 운명을 같이할 약속을 갖는다. (생략).
우리는 임진왜란때 단신으로 기막힌 항전을 계속한 바다의 영웅 리순신장군을 잊어서는 안된다. 병자호란에 청나라에 잡혀가서 죽어도 청제(淸帝)에게 절을 아니한 삼학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을사조약에 목을 찌른 민영환(闵永焕)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마도에서 굶어죽은 최익현(崔益铉)도 알아두자. 할빈역 머리에 이등박문을 쏘아 죽인 안중근(安重根)님께 고요히 묵도를 올리자.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어 놓은 백수(白手)의 항전 삼일운동의 기억이 새롭구나― 귀여운 도련님과 아가씨의 광주학생사건도 눈물겨웁다. 이것은 모두다 민족의 항전이요, 투쟁이다. 조선민족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 해방후(解放后) 서기(西纪) 1945년 10월 31일 ―박종화(朴锺和)의 ≪민족(民族)≫의 ≪서설(序说)≫중 일부
4. 우유체(优柔体)강건체와 량극을 이루는것은 우유체로서 강건체가 남성적인 수필문체라면 우유체는 녀성적인 수필문체인바 흔히 음유지미(阴柔之美)를 나타내고있다. 우유체수필은 문세(文势)가 부드럽고 온화하며 순한편이다. 또한 청초하고 겸허하고 우아하여 다소의 미문조(美文调)를 띨수도 있다. 강한 의지를 나타내기에는 연약한 문세때문에 적합하지 않은편이다. 주자청의 ≪련못에 비낀 달빛(荷塘月色)≫이나 양삭의 ≪차화부(茶花赋)≫ 같은 수필은 전형적인 우유체이다.
동생이 입학한후, 첫번째 맞이한 봄소풍때의 일입니다. 김밥, 사탕, 과자, 과일 등 어머니는 동생 몫과 내 몫을 한 보자기에 싸주셨습니다. 보자기가 하나뿐인데다가 동생이 너무 어리기때문에 점심시간에 나보고 챙겨먹으라시면서 그렇게 싸주신것입니다.
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를 향해 팔랑팔랑 걸었습니다. 날아갈듯이 즐거운 마음이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도착해 보니 1학년과 3학년이 각각 다른 곳으로 소풍을 간다는것입니다. 3학년은 1학년보다 조금 더 먼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였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도시락을 둘로 가를 수도 없을뿐더러 어린 동생을 혼자 보내는것도 마음 놓이지 않았습니다. 저 어린 동생을 위해 오늘 하루 학부형이 되여야겠다고 말입니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나는 먼저 출발하는 우리 반 소풍대렬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것을 꾹 참고 동생네 소풍 대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신입생들이라서 그런지 학부형들이 꽤나 많이 따라왔습니다. 1학년 아이들과 비교해도 별로 크지 않은 조그만 내가, 어머니들사이에서 걷고있으려니까 어머니들은 무척 궁금한 모양이였습니다. 몇학년이니? 너는 왜 너네 학년 소풍 안가고 여기 왔니? 그렇게 물어볼 때마다 도시락보따리가 왜 그리 부끄럽던지 감출수만 있다면 어디에든 감추어버리고싶었습니다. 그런 마음때문이였는지 도시락보따리가 자꾸만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후 동생을 솔밭그늘로 데려와 점심을 먹였습니다. 동생은 언니인 내가 저를 따라온것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는지 재잘거리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를 따라 동생은 다시 제 동무들곁으로 갔습니다. 혼자 앉아서 도시락보따리를 챙겨싸는 내 눈에는 뿌우연 안개가 서려왔습니다. 참았던 눈물 한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아, 이러면 안돼, 난 오늘 학부형인데, 눈물 따위를 보이다니! 나는 눈물을 보이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볼세라 손으로 얼른 눈물을 닦았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에 기대여서서 동생네 반 아이들이 뛰노는것을 보고있었습니다. 수건돌리기, 술래잡기, 보물찾기… 즐겁게 웃는 동생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렸습니다. 솔밭우 하늘엔 눈부시게 하얀 학들이 너울거리며 날아다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으로 길고 긴 하루였습니다. 아홉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겨웠던 봄소풍. 그런데 왜 가끔씩 그때가 그리워지는지 나도 모를 일입니다. ―문혜영(文惠英)의 ≪어린날의 초상≫중 후반부
≪봄소풍≫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유체수필이다.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월남한 작자가 유복녀로 태여난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소풍을 가게 되는데 교편을 잡은 어머니가 동행할수 없기때문에 그 대신으로 학부형이 되여 주는 어린날의 추억담이 순후하게 내비치고있다.
여기에서는 어떤 가식이나 엄살이 보이지 않은채 어린날의 동심이 그대로 배여있어서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어린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진실성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다함이 없을것이다. 한국 피천득의 많은 수필은 이러한 우유체문체를 가진 수필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5. 건조체(乾燥体)
건조체문장은 어떠한 미사려구(美辞麗句)나 수사(修辞)와는 상관없이 말하고자 하는 의사를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문체로서 학술이나 보고서 등 실용을 본위로 하는데 적합하기때문에 본격적인 문학쟝르로서의 수필문체로는 적합하지 않다. 이 건조체는 비유와 수식이 아주 미미하거나 전연 없는 문체이기 때문에 화려체와는 반대의 성격을 띤다. 가령 ≪그 호수의 길이가 6km≫라면 건조체요, ≪그 호수의 물길이 시오리≫라면 화려체가 된다.
2,200년전, 중국에는 맹가(孟軻)라는 철학가가 있었는데, 그는 국가의 력사는 흔히 ≪일란일치(一乱一治)≫라고 했다. 그가 말한 첫번째의 대란은 4,200년전의 홍수였고, 두번째 대란은 3천년전의 맹수였는데, 후에 그가 생존했을 때의 대란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양주(杨朱)와 묵적(墨翟)의 학설이다. 그는 자기가 양주와 묵적을 비판한것을 가지고 우(禹)는 홍수를 막은것과 비교했고 주공이 맹수를 몰아낸것과 비교했다. 그리하여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양주와 묵적이 끼친 해는 홍수와 맹수보다 더 심하다고 말했다. 후에 한 학자는 다른 학설을 공격할 때는 언제나 ≪홍수와 맹수보다 더 심하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기의 유가(儒家)들은 불(佛), 로(老)를 공격할 때 이 말을 리용했고, 청(淸)나라때의 정주파(程朱派)들이 륙왕파(陸王派)를 공격할 때도 역시 이 말을 리용했다. 지금은 구파(舊派)들이 신파(新派)를 공격할때도 이 말을 리용한다.
나는 홍수로 새로운 사조를 비유하는것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본다. 홍수가 들이닥치는 기세는 아주 흉맹하여 과거의 습관들을 부수기 때문에 언제나 일부분 사람들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마치도 물의 원천이 너무 많아서 낡은 강바닥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강뚝을 넘어 범람하여 밭들과 집들을 마구 휩쓸어버리는것과 마찬가지이다. 홍수를 막음에 있어서 만일 계의 용인법(用湮法)을 쓴다면 막으면 막을수록 강뚝이 터져서 더욱 수습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禹)의 도법을 쓴다면 이러한 물들이 강하에 흘러들어 해를 일으키지 않을뿐만아니라 오히려 관개의 리득을 얻을수 있다. 맹씨는 ≪우의 치수는 무사함을 행했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낡은 세력들이 새로운 세력에 대처하는 좋은 방편이였다.
맹수는 면바로 군벌에 대한 묘사라고 할수 있다. 맹(孟)씨는 공명의(公明儀)의 말을 빌어 ≪부엌에는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지만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완연하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으니 이는 맹수들을 이끌고 사람을 잡아먹는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군벌들의 요인들은 모두 몇백만 몇천만의 재산을 가지고있고 사치의 극에 달했지만 다른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가난하다 못해 굶어죽고있는 형편이다. 이것이 그래 맹수들을 거느리고 사람을 잡아먹는것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천진, 북경의 군인들은 요인들의 지령을 받아 애국적인 청년들을 마구 때리고있는데 이것이 맹수의 기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때문에 중국 현재의 상황은 홍수와 맹수의 경쟁이다. 만일 누가 맹수를 길들이고 홍수를 다스린다면 중국은 즉시 태평해 질것이다.
―채원배의 ≪홍수와 맹수≫ 전문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한것도, 그 자체의 추궁(追穷)이 즐거움을 가져오는것도, 모두가 학문이 다름아닌 진리를 탐구하는것이기때문이다. 실용적이니까 또는 재미가 나는것이니까 진리요 학문인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이기때문에 인간생활에 유용한것이요, 재미도 나는것이다. 유용하다든가 재미가 난다는것은 학문에 있어서 부차적으로 따라올 성질의것이요. 그것이 곧 궁극적인 목적이라고까지 말함은 어떨가 한다.
학문의 목적은 진리의 탐구 그것에 있다. 이렇게 말함은 또 그 진리의 탐구는 해서 무엇하나 할는지 모르나 학문의 목적은 그로써 족한것이다. 진리의 탐구자로서의 학문의 목적이 현실생활과 너무 동떨어져서 우원(迂远)함을 탓함직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학문은 현실생활로부터 유리(遊离)된것처럼 보일 때, 가끔 그의 가장 풍부한 축복을 현실생활우에 내리는수가 많다. 세상에서는 흔히 학문밖에 모르는 상아탑속의 학구생활을 현실을 도피한짓이라고 비난하기가 일쑤지만 상아탑의 덕택이 큰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점에서 편리하여진 생활을 향락(享乐)하고있는 소위 현대인이 있기전에, 그런것이 가능하기 위하여서도 오히려 그런 향락과는 담을 쌓고 진리탐구에 몰두한 학자들의 상아탑속에 있어서의 노고가 있었던것이다. 그렇다고 남의 향락을 위하여 스스로는 고난의 길을 일부러 걷는것이 학자도 아니다.
학자는 그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학문을 하는것뿐이다. 상아탑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여야 할 상아탑이 제구실을 옳게 다하지 못하는것이 탈이다. 학문에 진리탐구 이외의 다른 목적이 섣불리 앞장을 설 때 그 학문은 자유를 잃고 외곡될 념려조차 있다. 학문을 악용하기때문에 오히려 좋지 못한 일을 하는수가 얼마나 많은가? 진리 이외의것을 목적으로 할 때 그 학문은 한때의 신기루와도 같아 우선은 찬연함을 자랑할수 있을는지도 모르나 과연 학문이라고 할수 있을가부터가 문제다.
진리의 탐구가 학문의 유일한 목적일 때 그리고 그 길로 매진할 때, 그 무엇에도 속박됨이 없는 숭고한 학적(学的)인 정신이 만난(万难)을 극복하는 기백(气魄)을 길러줄것이요, 또 그것대로 우리의 인격완성의 길로 통하게도 되는것이다. 학문의 본질은 합리성과 실증성에 있고, 학문의 목적은 진리탐구에 있다. 위무(威武)로써 굽힐수도 없고, 영달(荣达)로써 달랠수도 없는 학문의 학문으로서의 권위도 이러한 본질, 이러한 목적밖에서 찾을수 있는것이 아니다.
―박종홍(朴钟鸿)의 ≪학문의 본질과 목적≫중 결말부분
사람은 자기를 속이면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하여 심적동요가 생기기 쉽다. 그러나 자기에 충실한 사람은 마음이 항상 편하므로 심적동요가 생기는 일이 적다. 심적동요가 생길 때는 겉에 드러나는 행동도 안정치 못하고 혹동(或东), 혹서(或西)로 극단에서 극단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얻은 사람은 행동에 있어서 견정(坚定)확고하고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기상을 보인다. 맹자(孟子)는 ≪직(直)≫≪무자기(毋自欺)≫의 수양을 오래 쌓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남과 다른 특이한 기개를 가진다 하였는데, 그것을 ≪호연지기(浩然之气)≫라 하였다. ≪호연지기≫는 지극히 위대하고 지극히 굳센것으로서 천지(天地)사이에 들어찰만한것이라 하였다.
공자는 ≪인자(仁者)는 불우(不忧)하고,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하고, 용자(勇者)는 불구(不惧)≫라 하였거니와 불우, 불혹, 불구하는 경지에 이르면 저절로 호연지기(浩然之气)가 생기는것이다. 이런 호연지기를 가지는 사람이 맹자는 대장부(大丈夫)라 하여 대장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천하에서 가장 넓은 집(仁)에서 살고, 천하에서 가장 바른 자리(礼)에 올라앉으며, 천하에서 가장 큰 길(人义의 道)을 걷는다. 남이 알아서 써주면 백성들과 함께 같이 그 길을 걷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그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뜻을 움직이지 못하며 위무(威武)도 그의 뜻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런 대장부는 세가지의 락(乐)이 있다. ≪부모가 계시고 형제가 다 무고함이 첫째 락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음이 둘째 락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서 가르침이 셋째 락이다.≫라고 하였다. 이 대장부형(大丈夫型)의 인간이 동양의 리상적인간형중에서 하나의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인간형이다. ―리상은(李相殷)의 ≪동양적인간형≫중 결말부분
6. 화려체(华丽体)
화려체수필은 비유나 수식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문장이 찬란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는 극단적인 미문(美文)을 가리킨다. 건조체가 리지적(理智的)이라면 화려체는 감정적인 문체로서 회화적(绘画的)색감과 음악적운률을 갖게 되여 아기자기한 맛은 있지만 자칫하면 저속해질 위험도 있으므로 너무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서울의 봄은 눈속에서 온다. 남산의 푸르던 소나무는 가지가 휘도록 철겨운 눈송이를 안고 함박꽃이 피였다.
달아나는 자동차와 전차들도 새로운 흰 지붕을 이었다. 아스팔트 다진 길바닥, 펑퍼짐한 빌딩꼭대기에 백포(白布)가 널렸다. 가라앉은 초가집은 무거운 떡가루짐을 진채, 그대로 찌그러질듯하다. 푹 꺼진 기와골엔 흰 반석이 디디고 누른다. 비쭉한 전신주도 그 멋없이 큰 키에 잘 먹지도 않은 분(粉)을 올렸다.
이 별안간에 지은 세상을 노래하는듯이 바람이 인다. 은가루 옥가루를 휘날리며, 어지러운 흰 소매는 무리무리 덩치덩치 흥에 겨운 갖은 춤을 추어 제낀다. 길이길이 제 세상을 누릴듯이.
그러나 보라! 이 사품에도 봄입김이 도는것을. 한결같이 흰 자락에 실금이 간다. 송송 구멍이 뚫린다. 돈짝만 해지고, 쟁반만 해지고, 대님만 해지고, 댕기만 해지고, …그 언저리는 번진다. 자배기만큼 검은 얼굴을 내놓은 땅바닥엔 김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겨울을 태우는 봄의 경기다. 두께두께 언 청계천에도 그윽한 소리 들려온다. 가만가만 자취없이 가는듯한 그 소리, 사르르사르르 이따금 그 소리는 숨이 막힌다. 험한 고개를 휘어넘는듯이 헐떡인다. 그럴 때면 얼음도 운다. ≪찡≫하며 부서지는 제몸의 비명을 친다. 언 얼음의 턱 갈라진 사이로 파란 물결은 해빛에 번쩍이며 제법 졸졸 소리를 지른다.
축축한 담밑에는, 눈을 떠이은 푸른 풀이 닷분이나 자랐다. 끝장까지 보는 북악에 쌓은 눈도 그사이 흰빛을 잃었다. 석고색으로 우중충하게 흐렸다. 그우를 싸고도는 푸른 하늘에는, 벌써 하늘하늘 아지랑이가 걸렸다. 봄이 왔다. 눈길, 얼음 고개를 넘어 서울에 순식간에 오고만것이다.
―로천명(盧天命)의 ≪서울의 봄≫
외로운 설음에 주체 못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는 술과 담배가 있으니 한개의 소상반죽(潇湘斑竹 중국 소상지방에서 나는 아롱진 무늬가 있는 대나무)의 연관(烟管, 담배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륙부에 서린 설음을 창공에 뿜어내여, 자연(紫烟)의 선률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哀愁)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이 쉴수도 있고, 한잔의 술이 있어 우로 뜨고 치밀어오르는 억제 못할 설음을 달래며 구곡간장(九曲肝肠)속으로 마셔들여 속으로 스며들게 할수도 있고, 12현(絃) 가야금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尖端的)표현기능인 열손가락으로 이 줄 저 줄 골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음 골수에 맺힌 한을 음률과 운률의 선에 실어 찾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실한 이내 가슴속 감정의 물결이 열두줄에 부딪쳐 몸부림 맘부림 쳐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듯, 호소하는듯 빌며, 땡기며, 부르며, 쫓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맺으며, 높고낮고 길게 짧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가며, 감돌아들며, 미묘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가는데를 모르는 심연한 선률과 운률과 여운의 영원한 조화미(调和美)속에 줄도 있고 나도 썩고 도연(陶然)히(술이 거나하게) 취할수도 있거니와―그리고 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히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속에 가득 답답한 설음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번 덩실 추는것을 보련마는―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보하며 네 얼마나 구제되랴. 이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라. 이내 무자비한 심술 너만은 알리라. ―오상순(吴相淳)의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중 일부
로천명의 ≪서울의 봄≫이 대자연의 흥기하는 모습에 경이감을 나타내 보여준 작품이라면 오상순의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는 허무적랑만주의경향을 보인 작품이라 할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거나 감응하는것은, 그 사물을 바라보는 나(주체적자아)와 보게 되는 그 사물(대상)사이에 동질적인 요소, 또는 서로 닮아있는 상사성(相似性)이 있어서 그게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론리로 보게 될 때 그 울부짖는 짝 잃은 거위의 속성은 이미 작자인 오상순 시인의 심층세계에 내재되여있었던것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짝을 잃은 거위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바로 작자 자신의 설음과 련민적심상을 더하게 한다. 세상 모르고 운명에 순응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지은이는 스스로의 심회를 토로하게 된다. 이 말을 바꾸어서 하자면, 작자자신의 마음속에 그러한 거위 같은 슬픈 요소가 자리하고있었는데 마침 울부짖는 짝 잃은 거위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수필창작의 발단동기를 활용하여 마침내 작품상의 효과음을 내게 된것으로 볼수 있다.
감상적랑만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진 이 작품은 긴박한 호흡과 유려한 기교적화려체문장으로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면서 한껏 고조시키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시의 주된 경향이였던 감상적, 또는 퇴페적랑만주의문학의 허무주의적풍향을 감안한다면 리해하기가 더욱 수월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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