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생명으로 살아가기
2010. 11. 7
루가 20:27-38
올 한 해도 딱 두달이 남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연말 송년모임’예약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새해의 시작 방법은 양력이 있고 음력이 있습니다. 양력은 하늘의 태양 움직임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도 양력설이 있고 음력설이 있습니다. 양력설은 신정이라고 하고 음력설은 구정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또 다른 새해를 셈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절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림절 초를 하나씩 켜 나가다가 4개가 되면 성탄이 되는 것이지요. 11월 28일이 대림1주일 새해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식 설날입니다.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는 한 해의 끝부분 연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한해를 보내면서 좀더 열심히 살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걸하고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부활주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음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부활생명으로 사는 사람, 매일매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1. 산 자의 하느님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를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먼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존자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재차 가르쳐 주십니다. 에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당연히 이 호칭으로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1,400년동안 기도할 때마다 이 호칭으로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이름을 직접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신 것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느님을 믿었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만약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은 결과가 죽음 이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죽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사실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영원히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2. 죽음을 깨닫기
이번 대심방에서는 가정에 시편의 말씀만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가족의 이름을 하분씩 부르면서 악한 영을 이기는 대적기도를 했습니다. 구역장들에게 기도를 시키는데 마음 속으로 참 뿌듯했습니다. 작년 대심방에 비교해서 기도가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물이 흐르듯 유창하게 술술 잘도 하십니다. 참 기도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라고 느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를 기도시킬지 행복한 고민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난은 위장한 축복이다.’ ‘하느님은 고난의 폭풍 가운데 좌정하시고 통치하신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 주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여러번 되풀이해서 듣고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왔습니다.
이제 죽음이라는 문제도 한번 끌어 안아 보십시오. 어느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은 엄청난 진실, 본능적으로 피하는 문제이지만 이제 직면해보십시오. 죽음이라는 것을 친구로 삼아서 기도해보고 묵상해보고 자꾸 생각하여 보십시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해답이라는 사실이 마음 속에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요 축복이라는 사실이 깨달아 질 때 성경의 맥이 확 뚫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언제 어디에서나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길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린 안이숙라는 분이 있습니다.그는 유독 죽는 다는 것을 가지고 책의 제목을 삼았습니다.‘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죽어요’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정다움과 환히를 느끼게 한다. 반드시, 기어코 오고야 말 그 진짜 죽음! 그것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나를 바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매순가매순간 나를 받들어 주고, 밀어주고, 용기와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곤고한 인생길에서 죽음을 알고, 죽음이 가져 올 그 뒤의 실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서 힘을 얻으며, 어떻게 지혜를 얻겠는가?
순간순간 죽음이 다가오고, 그 죽임이 내게 가져다줄 놀랍고 황홀한 실재 세계를 생각하고 기다리니, 힘이 솟고, 기쁨과 소망이 넘치며, 열심있는 믿음이 생기고, 먹고 마시는 것이 즐겁고, 마음이 평안한 것이 아닐까?
아! 죽음은 내 앞에 멀리 보이는 화려한 문이다. 열리면 들어가는 영원한 문인 것이다. 그 문이 열릴 때 나는 들어갈 것이다. 내 본향 집에 들어가 그 분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도 나를 데려갈 수 없고, 죽음만이 나를 보내줄 수 있는 곳, 흙에서 온 육체가 흙으로 돌아갈 때, 사슬 같은 삶에서 풀려나와 자애로우신 내 아버지께 쏜살같이 날아 올라갈 것이니 어찌 죽음이 내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아! 나는 죽어요, 할렐루야! 언젠가 당신도 죽어요. 그러나 기뻐하세요. 기다리세요. 죽음은 우리에게 고향의 문을 활짝 열어줄 테니까요. 죽어도 죽지 않는 그 곳에 죽음이 우리를 데려갈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죽기를 좋아하고 잘 죽어요. 내가 죽을 때마다 예수님이 내게서 살아나고, 범사에 승리가 이루어져요.죽음은 내 신앙도 살리고 또 나를 영원한 본향으로 이끌어가요.” (안이숙의 휴먼 스토리)
3.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인 연극이 있습니다.막달라 마리아가 본래 어떤 인간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쓰레기나 걸레조각처럼 천한 인간이었습니다.여러 귀신이 들려서 인격이 완전히 깨져 버리고 파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납니다. 드라마에서 그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에 겨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한 행복을 가져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가까이 하는 모든 자들은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처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작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행복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 아이가 엄마를 쳐다 보고 웃으면서 보이는 그 모습, 행복해 하는 바로 그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잠을 푹 자고 난 아이가 눈을 살짝 뜨자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보입니다. 아이는 한없는 행복에 잠겨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런 행복을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가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기 신분이 높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그분을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 아이가 느끼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 갑니다.우리도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울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실패자가 되어서도 행복할 수 있고, 성공하고 부유한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와 계신 곳이 이미 천국이고 부활이고 자유입니다.“높은 산이 거친 들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나 나하고 같이 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에서 옵니다. 죽음의 깊은 의미를 깨닫으면 자유가 있습니다.남들이 모르는 편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