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평문
淡泊한 수묵으로 발현된 화엄의 세계
주지하듯이 문인화는 위진시대 문학화(文學化)로부터 출발하여 송대를 거치면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가슴속에서 먼저 형상을 만든 뒤 그 의취를 그려내는 사의적(寫意的)인 화풍이 탄력을 받았고, 후대는 개성을 앞세운 명가들에 의해 전통이 유지되어왔다. 이렇듯이 문인화는 그림속에 시정(詩情)과 작가의 성정을 담아내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문인화라는 장르는 무었인가? 토탈아트를 지향하는 미술세계에서 독특한 문인화의 장점을 살려내면서 현대인의 동감을 얻으려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어설픈 서양화법을 흉내내어서는 정체성을 찾기 어렵고, 작가의 생각이 담기지 않은 그림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화두를 풀기 위해 석경은 30년 동안 작업해 온 작가이다. 전시를 거듭하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고, 지금도 그 화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석경이 시도하는 방법론의 주조는 전통적 재료와 바탕은 지켜나가면서 현대인의 정서에 부합되는 그림을 그려나가려는데 있다. 그 동안 고지(古紙)를 사용해 보기도 하고,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석채(石彩)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으며, 추상성이 있는 화풍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등 재료와 작품양식에서 이러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원숙하고 유현(幽玄)한 수묵의 맛과 담박한 아취가 우리의 눈길을 붙든다. 전통적 재료인 지필묵은 그의 손을 거치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화엄나무>라고 이름붙인 작품속에서 보듯이 불교적 정신세계를 담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내면정서가 작품을 통해 뚜렷이 감지된다.
석경은 월간 서예문화에서 주최한 ‘한국현대문인화대표작가 초대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이 초대전은 문인화가로서 전통과 현대적인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50대 작가 8명이 대작을 반드시 출품해야되는 전시이다. 대작 출품규정에 따라 출품한 2미터가 넘는 <화엄나무>라는 작품을 보면서 느낀 소회를 다음 두 가지로 요결한다.
포유어간(飽遊飫看)의 수묵미학
동양화론에는 산림을 유람하며 보고 또 보고 하는 관찰과정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는다는 이른바 포유어간(飽遊飫看)이란 말이 있다. 석경은 사군자를 제대로 그려보려는 생각에서 연구실에 대나무를 두고 조석으로 관찰하기도 하였고, 매화가 많은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게다가 고전에 등장하는 귀한 비파나무를 보기 위해 천리를 마다않고 찾아나섰다. 그야말로 포유어간을 실천코자 한 것이다.
특히 붓과 먹으로 대상을 그려내는 문인화의 특성상 수묵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가히 포정(庖丁)이 소를 잡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일찍이 미술대학에 재학하던 때 송대 곽희(郭熙)의 “붓과 먹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운용할 줄 모르면 절묘함을 이룰 수 없다”라는 말을 들은 뒤 오늘날까지 이를 다각도로 실험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담묵(淡墨)과 농묵(濃墨) 외에도 짙은 농도의 초묵(焦墨)과 벼루에 한동안 묵혀진 숙묵(宿墨), 빛이 바랜 퇴묵(退墨), 혼합되어 혼탁한 애묵(埃墨)과 본인이 직접 만든 묵 등을 반복해서 연구하고 있다. 이런 결과 그의 작품에는 부드럽고 윤택한[滋閏] 먹맛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푸르고 물기가 있는[蒼潤] 먹맛도 있어 깔깔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다양한 먹맛이 공존한다. 이렇게 부단히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지금의 화면위에 겉치레를 걷어내고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처럼 절제된 수묵의 층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엄나무>라는 작품을 보고있노라면, 이런 수묵의 다양한 효과가 선명하게 감지된다. 모노톤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양의 어떤 칼라보다 심원한 의경미가 발현된다. 작가는 바로 오늘의 시각과 정서 논리에 맞게 작품 제작에 용묵(用墨)과 심미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반영 하고 있다. 이런 작품은 우연이 아니라 포유어간의 고행과 수 많은 실험작을 통해서 산생된 것이다.
붓으로 그린 화엄의 세계
작품은 작가의 의식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거울이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상징적인 사물이 화면에 등장되기 마련이다. 이번 작품전에서 선보인 <화엄나무>에는 석경의 선적(禪的) 풍취가 물씬 묻어난다.
화엄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화엄경》에서는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의 관계를 나무로써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보통 집을 지을 때 실한 나무는 대들보 감으로, 둥근 나무는 서까래, 편편한 것은 문짝 등으로 사용한다. 즉, 나무의 존재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희생을 통해 집이라는 완성품을 이룩한다. 이번 작품전에서 석경이 그린 <화엄나무>는 여러 가지 함의(含意)를 담고 있다. 각자의 주장만 내어놓는다면 결코 어울릴 수 없으니 서로 양보하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작가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이든 모두 조화의 화(和)를 도모해야 상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또 다른 중요한 테마는 〈입법계품〉이다. 선재라는 동자의 구법행각을 적어 놓은 것인데, 여기서 선재란 진리에 목말라하는 구도의 나그네를 상징한다. 쉰세 명의 선지식을 만나 법을 묻고 법을 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선재에게 처음 법을 전하는 선지식은 문수보살이다. 이후 그가 만나는 선장, 어부, 심지어는 창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다. 그 모든 이들을 통해 불법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아 간다. 맨 마지막에 보현보살을 만난다. 그 직전에 만난 미륵이 손가락을 튕김에 의해 선재는 궁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부처의 자리에 올라보니 그 자리가 자신이 출발했던 자리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 가지 상징과 은유가 담겨있다. 석경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다. 우주에 나 아닌 것이 없듯, 어머니 아닌 것이 없으며,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주만물이 다 그대로가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무는 작가의 내적인 지향성을 잘 드러낸 것[以形寫神]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석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석경은 붓으로 자신의 사상을 그리는 철학자이다. 전시마다 새로운 기법과 내면세계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노동가이면서 동서양과 과거와 현대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진정한 작가이다.
월간 서예문화 주간 정태수
프로필
이원동, 李元東(Lee Won-Dong)
석경(石鏡)
연락처 : 010-7688-5995
주소 : 대구 중구 대봉1동 2521 석경서화원
작가경력
개인전 1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수상
앙데팡당전(국립현대미술관)
상파울로 비엔날레 招待出品
韓國 現代美術展(뉴욕, 서독)
韓·日 書法交流展(한국, 일본)
韓·中 書畵交流展(안휘성, 대구)
『먹에 의한 탈장르전』 (예술의 전당)
『보는 글씨, 읽는 그림전』 (예술의 전당)
韓國 文人畵 20人 招待展(도올아트센타)
韓國 文人畵의 展望과 摸索展(공평아트홀)
패션과 書藝의 만남전(예술의 전당)
大韓民國 美術大展 招待作家展
한국문인화대표작가전(수원, 서예박물관)
가슴속에 대나무를 품고 세상을 보네(미술세계 기획)
기획, 초대전 100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