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옛 중국에서도 알아낸 원주율. 유휘의 원주율.
2500년 전에 완성된 중국 수학의 고전 “구장산술”이 모두 246개의 문제로 되어 우리 중학생이면 대개 풀 수 있을 만큼 쉽다는 것은 이미 소개했다. 그 후 중국의 수학은 점점 발달 까다로운 문제들을 푸는 재주가 많아졌다. 예를 들면 중국의 수학자 유휘는 원주율의 값을 3.1416까지 정확히 얻었다. 원주율이란 “파이”라고 그리스 글자로 나타내는 것인데 이 값은 지름이 1일 때의 원 둘레를 말한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지름이 1자인 원의 둘레가 대강 3자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림 계산을 할 때는 모두 원주율의 값으로 3을 썼던 것이다.`구장산술에서도 원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들에는 모두 원주율을 3으로 쓰고 있다. 1800년 전의 유휘는 그 값을 상당히 정확하게 얻었다. 이 값을 구하는 데 그가 쓴 방법은 복잡해서 실제로 계산해 보여 주기는 어렵다. 지름이 1인 원을 그리고 거기에 각각 안에 꼭 맞는 정6각형과 밖에 꼭 맞는 정6각형을 그린다.
여러분도 종이에 한번 이걸 그려 보자. 원 안의 정6각형을`내접했다`고 하고 밖의 것을`외접했다`고 하는데 내접한 정6각형의 둘레가 3인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외접한 정6각형의 둘레는 금방 알 수는 없지만 계산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경우 원둘레는 내접 정6각형의 둘레보다는 크고 외접 정6각형의 둘레보다는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휘는 삼국 시대 수학자였다. 중국에서 삼국 시대란 `삼국지`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때이다. 조조와 유비, 관운장과 장비, 역사상 가장 현명한 사람 제갈량 등이 등장하는 그 시대의 일인 것이다. 동양에서 유휘가 이런 방법으로 원주율을 구한 것과 거의 똑같은 방법으로 서양의 아르키메데스도 원주율을 구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휘보다 400년 전에 활약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에 가짜 금속이 금 대신 섞여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뻐서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 나왔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중국의 수학.
유휘와 아르키메데스만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원주율 값은 그리스 보다 조금 뒤졌다. 그 시대에는 중국과 그리스 사이에 지식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유휘에게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이 전해져서 그것을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원주율 값은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더 열심히 구했고, 서양 수학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5세기의 조중지(429-500)라는 중국 수학자는 원주율 값을 소수점 이하 6자리까지 구하여 썼다.
조중지의 원주율은 분수로도 나타냈는데 그것은 대강의 값을 쓸 때는 약 률 이라 해서 7분의 22, 더욱 상세한 값으로는 밀 률 이라 하여 113분의 355를 썼다. 약 률을 계산해 풀어보면 3.1428...이어서 소수점 이하 2자리까지만 맞다. 그러나 밀 률 값은 3.1415929...여서 소수점 이하 6자리까지 정확한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의 발달로 소수점 이하 수백자리까지 값을 얻고 있지만 옛날에는 이 계산이 아주 어려웠다. 조중지의 원주율만한 정확한 값은 서양에서는 나오지 않다가 17세기에 들어가서야 소수점 이하 10자리까지 계산되면서 점점 서양의 계산이 중국 수학을 앞서게 되었다.
중국의 수학은 시대를 지나면서 발달했다. 당나라 때에는 산학박사라 하여 전문 수학자를 길렀고 그들을 뽑는 과거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 시대부터 수학자를 시험을 통해 뽑고, 또 수학을 국가에서 교육하는 제도가 있었다. 특히 10세기 이후에는 여러 가지 수학책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1297년 주세걸이 쓴“산학계몽”이란 책은 유명하다. 이 책은 세종 임금이 정인지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던 교재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책이 처음 나온 중국에서는 없어졌던 것을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찾아 얻어갔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산학계몽은 방정식 푸는 법을 설명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17세기 이전까지는 방정식 푸는 기술에서도 중국은 서양을 앞서고 있었다.
3각형, 4각형, 원 등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별로 뚜렷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옛날 전국 시대의 묵자가 남겼다는 “묵자”란 책에는 기하학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거의 전부라 생각한다.
기하학이란 대단히 논리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조직적이고 정확한 생각을 길러 주는 데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아인시타인은 서양 사람들이 결국 누구보다 먼저 과학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시대에 발달했던 유클리드 기하학 덕분이라고 지적한 일도 있다. 17세기 서양의 유클리드 기하학이 중국에서 번역되기까지 중국에서는 기하학이 발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