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하늘 저편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떠오른다
선홍빛 태양이 안개에 가리어 그 빛을 잃은 채 떠오르는 모습이
흡사 대기에 은빛 능금빛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하다
안개가 안광을 적셔 놓아서인지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다
안개에 싸여 희미한 햇살을 받는 건물들이 마치 마법의 성 같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들판엔 누렇게 익은 벼들이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베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가뭄과 태풍을 이겨내던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이깟 햇살 아래 풀이 죽은 채 낮은 곳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들판의 벼들
세월이 가면 모두가 약해져 가는 걸까
얼마나 달렸을까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기 전부터 주차된 차량들이 늘어서 있다
항상 지나치기만 하던 곳
때론 잠시 들러 차 한 잔 마신 것이 전부였던 곳
한계령
오늘은 한계령의 한계를 확인해 보리라
아니 나 자신의 한계를 확인해 보리라
어느 시인은 한겨울 한계령의 눈밭에 파묻혀 황홀한 고립을
맛보고 싶다 하였지만
나는 오늘 한계령 단풍의 바다에 파묻혀 황홀한 색채의 군무를 맛보리라
이름값을 하고자 함인지 들머리서부터 가파른 비탈길이 이어진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일행들
철책 밖엔 부끄러운 듯 옷고름을 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붉은 잎새들
상실의 시대에 부끄러움을 잃은 여인들을 대신하려는 듯
은은한 자태에 살짝 부끄러움을 드러낸 그 모습에 가슴이 흔들리운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붉은 잎새들이 잔잔한 가슴에 물결을 일으키운다
한번 마음껏 흔들려나 볼까
옥수를 붙잡고 질펀하게 놀아나 볼까
걸음을 재촉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세 갈래길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가면 서북능선
이정표가 선명하다
이제 한계령은 끝이 났는가
좀 힘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쯤으로는 한계령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부끄러울 듯 싶다
지난 번 민주지산의 거창한 이름에 실망이 컸던 만큼이나 이름 석자가
주는 위압감에 걸맞지 않은 한계령의 모습에 또 실망감이 앞선다
한계령의 한계는 어디에서 느껴야 하나
황홀한 고립은 또 어디에서 맛봐야 하나
능선을 따라 펼쳐진 산봉우리들을 본다
맑은 햇살을 받으며 의연히 서 있는 산봉우리들
갑자기 한 떼의 운무가 밀려오더니 산의 허리를 감싼다
이어진 산봉우리의 반쯤만 에워싼 그 모습이 꼭
야누스를 떠오르게 한다
초행의 길손에게 모든 걸 보여 줄 수는 없다는 듯
운무로 몸을 감싸는 산봉우리들
가까이는 붉게 물든 잎새
멀리는 운무를 걸친 산봉우리들
감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운무의 모습에 강약을
반복하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떠올려 본다
중청을 지나 대청에 이르기 전 목책에 기대어 운무를 본다
산봉우리를 휘감았던 운무가 한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떠밀려 간다
급류에 휩쓸리는 물고기들처럼
주변을 하얗게 물들인 운무가 중앙에는 투명한 물방울의 집을 만들어 놓는다
그 속엔 저 먼 곳의 산봉우리를 담아 놓은 채
꼭 호박구슬에 박아놓은 산봉우리처럼
서둘러 일행을 부르며 사진을 부탁하는 사람들
사진을 찍을 때쯤엔 이미 멀어진 물방울의 집은 흔적만 남아 있다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사람들
그 신비한 모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그 모습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아 있으리
대청봉 정상에 이른다
주변을 에워싼 로프들
오래 전 이곳에 왔을 땐 로프들은 본 적이 없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 산엔 로프가 늘어가나 보다
목책들은 또 어떻고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산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발길을 돌린다
돌계단을 따라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군데군데 제법 붉게 물든 잎새들이 흐드러진 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계곡에 이르러 발을 담근 채 먼 곳의 산들을 바라본다
만산홍엽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산의 모습
절정에 이르면 저들도 붉게 타오르겠지
그 타오름의 끝은 어디일까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말을 떠올려 본다
절정이 지나면 낙엽 되어 사라질 잎새들
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기나 할까
물에 떠오는 잎새를 본다
세월이 가면 우리들 모두는 낙엽인 것을
바람이 불면 떨어져 가는 곳 모른 채 사라져 가는 낙엽인 것을
어스름이 깔리는 숲길을 홀로 걸으며
내 삶의 가을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