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 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주하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습니까?(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금강경』 2장에 나오는 수보리의 질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끄리뜨어 ‘anuttarā samyaksambodh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2장의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구마라집의 의역(意譯)이다. 이에 대한 산스끄리뜨어는 ‘보디사뜨와야나 삼쁘라스티따(bodhisattva-yāna-samprasthitena)’인데, 현장은 ‘발취보살승자(發趣菩薩乘者)’로 번역한다. ‘보살의 길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마라집은 『금강경』 전체를 통해 이것을 “발아뇩다라샴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으로 번역하고 있다. 곧 “보살의 길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을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마음을 낸 사람”으로 의역한 것이다. 구마라집은 왜 이런 번역을 했을까?
아뇩다라(anuttarā)는 무상(無上), 삼먁삼보리(samyaksambodhi)는 정등각(正等覺)으로 번역된다. 무상은 지극히 높은 것이고, 정등각은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다. 종합하면 지극히 높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며, 일체를 초월한 원만한 깨달음이다.
『금강경』은 초기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기에 우리가 『금강경』을 읽을 때, 소위 소승과 다른 대승의 강조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금강경』에서 추구하는 무상정등정각의 강조점은 정등(正等)에 있다. 등(等)에는 ‘같다, 차이가 없다, 평등하다’의 뜻이 있다. 평등은 중생제도에서 온다. 우리는 본래 자타분별이 없는 평등한 존재이지만 차별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어 본래면목을 확인한다고 해도, 이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을 제도하지 못하면 평등을 이룰 수 없다. 정등을 얻지 못한다. 사실 정등과 정각이 둘이 아니기에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야뇩다라샴먁삼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성불제중(成佛濟衆)의 서원을 품는다는 말이다. 『금강경』은 중생제도에서 공부길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불제중은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환경에 따라 마음이 흔들려 소위 ‘내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진다. 성불과 제중의 순서를 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불과 제중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금강경』이 제시하는 보살의 길, 대승의 길이 아니다. 『금강경』을 이끌어가는 수보리의 질문은 ‘보살의 길’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보살의 길은 위가 없는 성불제중의 서원을 전제로 한다. 구마라집의 의역은 이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