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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 Henri Cartier Bresson, 프랑스, 1908 ~ )
글을 쓰는 작가에겐 심사숙고할 시간이 있다.
그는 받아들이고 거부했다가 또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거듭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생각을 종이에 기록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상관요소들을 한데
묶어 볼수도 있다.
그의 머리가 잊어버리기 까지에는 역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며
또 잠재의식이 그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작가들 에게 있어 가버린 것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 앙리 까르띠에 쁘레송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사진을 촬영할 때 이미 전체성과 완전함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심리적인 예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 순간은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이며, 그 결과로서의 구도는 끝난 이후 트리밍 등의 변경은 있을 수 없는 절대적 순간이라고 말하며 프레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사진 전부가 35밀리 필름 싸이즈를 그대로 인화하는 유일한 특징이 있다.
그는 라이카를 육안의 연장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며 사진적 리얼리즘을 확립하였고 결정적 순간이란 것은 일종의 사진미학이며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새로운 사진표현의 창조였다.
동적인 현상을 테마로 하는 스냅숏 수법이 일반화되면서 차츰 대상의 움직임에 맞춘 구도를 변화시킨 파인더 내에서의 프레이밍이 사진적 구도수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사진의 대명사로 사진가는 물론 일반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브레송은 평범한 대상을 가장 평범한 눈으로 사진적인 표현을 하여 거둔 예술적 성과는 무엇인가? 그는 여는 사진과들과는 달리 그의 사진에서 별다른 미의 추구나 심오한 사상을 설교하려 하진 않는다. 그는 다만 인간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적인 의식의 흐름을 사진속에 부각 시킴으로써 생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예외적인 대상들을 예외적인 눈으로 보기 보다는 평범한 상황을 언제나 평범한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하였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명이나 지명은 고유명사의 성격을 떠나서 모든 일반을 지칭하는 대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평범한 예술적 태도는 또한 일상적 상황 속에 흐르고 있는 의식세계를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데 보다 적절한 것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말하면서 아마도 그의 사진집 제목으로부터 유래된 <결정적 순간 Image a La Sauvett, The Decisive moment>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띠에 브레송은 단순히 <결정적 순간>으로 응축되기에는 그 폭이 너무나 큰 작가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는 사진 예술을 통해 철학(哲學)한 인물이자 후대의 많은 사진 작가들에게 있어 숱한 영감과 감화를 준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어떤 말이나 글로 전했다기 보다는 그의 사진작업들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진 기자이기도 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Image의 추구
까르띠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까르띠에 브레송은 어려서부터 미술을 비롯해 당대의 여러 예술적 경향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조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후일 그가 사진 작업을 통해 평생 이미지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게 되는 첫 출발점이었다. 그는 처음엔 화가가 될 생각으로 1927년부터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자크 에밀 블랑슈, 앙드레 로트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초현실파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테리아드 출판사를 드나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형상(image)의 엄격성에 집중된다. 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구입한 그는 멕시코, 미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폴 스트랜드 곁에서 영화를 배우고, 1932년에는 줄리안 레비 화랑에서 처녀전을 열기도 한다. 또 프랑스로 귀향한 뒤로 장 르누아르와 자크 베케르 감독과 함께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 무렵이던 1930년 마르세이유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평생 라이카 카메라만을 애용했다. 당시는 중형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가 라이카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르포르타주 사진가로 활동한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1932년부터 2년 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었다. <폐허에서 노는 아이들>은 이때에 그가 찍은 대표작이다. 1936년 봄, 그는 파리의 어느 신문사 사진부에 들어가기 위해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낙방하고 말았다. 이때 헝가리 출신의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세이무어도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그날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날의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그들은 후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역시 프랑스군에 종군하여 영화사진반에 참가했으나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1943년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이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고, 이때부터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전쟁 후에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uge), 루오(Georges Rouault) 등을 촬영하며 예술가의 내면의 깊이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것인가에 노력을 쏟았다.
종전 후인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그의 작품전을 통해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이 중심이 되어 <매그넘MAGNUM>을 설립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진기자들의 불안한 지위와 특정 매체(신문사와 잡지)의 틀에 박힌 편집 방향과 포맷으로부터 벗어나 사진가의 개인의 관심과 개성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을 보장받기 위해 창립된 사진 에이전시가 바로 <매그넘>이다.(그러나 이런 매그넘의 경향과 탄생이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름인 매그넘MAGNUM이 '크다'라는 의미의 희랍어로 위대한 사진가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이는 동시에 대형연발권총을 의미하는 영어‘Magnum’의 동음이의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탄생이 처음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었고, 근대성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매그넘은 닫힌 서구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매그넘과 인간가족전>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어쨌든 경제적 착취와 기존 매체들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설립된 국제보도사진가 집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진통신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설립 이듬해 뉴욕에도 사무실을 개설했다.
매그넘의 주요사진가이자 주요 설립자 중 하나였던 카파는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고, 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데이비드 세이무어는 1956년 수에즈 상륙작전 때 사망했고, 베르너 비쇼프는 1954년 페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매그넘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후로도 주로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신세대 사진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더욱 규모를 키워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레송은 그후 3년 동안 중공,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이란 등으로 여행하여 동양 민족의 생활과 그 풍토를 촬영하였다. 그 사진들은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후의 민중의 혼란 상태와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태 등을 박진감 있게 표현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첫번째 대형 사진집은 <재빠른 영상들>(1952)이다. 거의 20여 년간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탐방기자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제 다시금 그림으로 돌아와 있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현실과 시각의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 후 또다시 소련을 여행하며 공산주의 정권 아래의 민중의 일상생활 모습을 촬영하고 발표하는 한편 1955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중량감있는 사진 표현으로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만약 그가 단지 그냥 한 명의 충실한 보도사진가라면 그가 지금처럼 유명한 사진작가로 추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보다 한발 더 나갔기 때문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천재성은 매그넘의 모험을 따랐으나 자기 자신은 그보다 더 멀리 앞서 나갔다. 그러나 1933년의 스페인 여행에서 그는 본격적인 르포르타주 사진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두뇌를 써서 사공한 이미지보다 "결정적 순간"의 탐구에 훨씬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자의 사진찍는 행위를 가장 완벽하게 정의했던 인물이 바로 까르띠에 브레송이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다." 현실의 어떤 치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또 형태들이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미지에서는 다소 차가우면서도 섬세한 멋이 나며, 그것은 찬양도 비판도 아닌, 단지 현실을 꼼꼼히 분해하고 거기에 어떤 스타일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르포르타주는 승리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사진가와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념적 체제 사이의 분열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불과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가장 생생한(거친) 사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현 욕구에 제동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연출하지 않고, 트리밍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삼았다. 1952년 출판한 그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미학을 권두에 밝혀두고 있다. 그는 촬영 대상의 움직임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포착했다. 이를테면 그는 피사체에게 '아, 좋아요. 잠깐 거기 멈춰 서세요.'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는, 촬영하는 동안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되며, 실제의 자연광을 존중하지 않고서 플래시 라이트의 도움을 받으면 어떤 사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사진찍히는 사람이 카메라나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복잡한 장비나 반사판 등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하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여러 기자재들은 멋진 작품을 만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현상, 인화 과정에서의 조작과 사진을 트리밍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또한 그는 카메라의 앵글의 변화들을 통해 강조를 주고 주의를 환기하는 형태의 촬영에 반했고, 광각이나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것도 되도록 멀리했다. 그는 또한 칼라 사진에 대하여, 흑백사진에 의해 포착되는 삶의 움직임과 성취감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왜 트리밍조차 거부했는가?
까르띠에 브레송에게 있어서 사진은 일종의 구도(求道)와 같은 것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많은 사진작가들(드니 브리아, 마이너 화이트 등)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수가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자신과 과녁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과녁에 동화시킴으로써 과녁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가는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다만 사물들의 존재만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과 구성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카메라를 자신의 눈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마치 시선을 따라 사물이 보일 때 그것을 마음에 담는 기분으로 카메라를 조작했다. 그는 우리의 시선이 대상을 보이는 데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는 수단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을 마치 불교의 선승이 도(道)에 이르는 과정과 흡사한 것으로 변화시켰다. 선승이 순간의 직관으로 도에 이르는 것처럼 그의 카메라 역시 순간으로 승부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직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거기에서 '본질'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진의 시각적 구성이란, 사진가 자신의 감각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사라진 세계에서 이미지라는 도(道)를 추구한 철학자였다. 그는 당대의 많은 유명인들을 촬영했으나 정작 자신은 사진에 찍히기를 달가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에 표제를 달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엔 때와 장소만 있을 뿐 제목이 없다. 그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실재의 외관에 모든 능력이 집중되는 순간에 숨을 죽이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난 순간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주위와의 관계와 광선 등의 상태까지 포함해서 '광선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 즉, '대상과 촬영자의 내부의식의 일치'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사진가협회, 독일사진가협회등으로부터 문화상 등 많은상을 받았으며 197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사진의 선승(zen-master)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1908년. 프랑스 세느-에-마르느의 샹틀루에서 커다란 섬유회사의 아들로 태어남. 콩도르세 중학교에서 수학했으나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음.
1927-28년 20세. 앙드레 로트(Andre Lhote)에게서 그림을 배움.
1930년 22세.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
1932년 24세.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시회 개최.
1932년 24세. 2년 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음.
1936,1939년 28세. 영화감독 장 르느아르(Jean Renoir)의 제2조감독으로 활동.
그후 네편의 기록영화 제작.
1940년 32세. 2차 대전 중 프랑스 육군에 입대, 영화, 사진 선전대의 병사로 일하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됨. 두차례의 시도 끝에 세 번째로 탈출에 성공.
1946년 38세.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작고사진작가전의 착오를 정정하기 위해 미국에서 지냄.
1947년 39세. 36년 당시 신문사 사진부 입사 시험에서 떨어질 때 알게된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조지 로저 등 4명의 프리랜서 사진작가들과 함께 전세계 사진 공급 업체인 "Magnum Photos"사를 설립.
1948년-50년 40세. 동양(인도, 버마, 파키스탄, 중국, 인도네시아 등)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음.
1952년 44세. 호화 사진집 <숨겨진 영상(Image a la Sauvette)>을 출판. 영문판인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음.
1954년 46세. <발리섬의 춤> 출판.
1955년 47세. <하나의 중국에서 또 하나의 중국으로>, <모스크바 사람들>, <유럽 사람들> 등의 작품집 출판.
1965년 57세.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1966년 58세. 동경 케이오 백화점에서 [결정적 순간, 그후] 라는 사진전 열림.
1974년 이후. 그림과 디자인에 몰두하며 활동이 거의 없이 은둔 칩거(蟄居)중.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나에게 있어 카메라는 스케치북이며, 직관적 통찰과 자발적 행위의 기구이고, 시각적 의미에서 질문과 동시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의 작품 과정이다. 세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뷰파인더를 통한 작품세계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 마음의 표현력, 감성 그리고 기하학적인 감각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표현의 단순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현실을 잊고 모든 능력을 집중해서 숨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이미지를 작품화하는 것은 크나큰 육체적, 지적 즐거움이 되는 순간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사실 그 자체와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의미가 부여된 엄격한 구성을 동시에 인지하는 것이다. 머리와 눈과 마음을 동일한 축에 두는 일인 것이다.
-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1908년 8월 22일 프랑스의 샹틀루에서 커다란 섬유회사를 소유한 대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빠리에 있는 콩도르세 중학교를 다녔으나 그 이상의 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어릴 때에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고 그 시대의 다른 소년들처럼 다른 브로니형 암상자 사진기로 사진에 입문하였다. 영화에도 심취하면서 영화를 통하여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1927년부터 2년간 안드레 로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된다.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한 그는 1931년 아이보리 코스트에서 1년간 사진을 찍으면서 지낸다. 그때 그가 사용한 사진기는 처음 만져 본 프랑스 크로스사가 만든 35mm 필름을 쓰는 소형카메라였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그는 몇몇 동료들과 유럽을 여행하고 32년부터 2년 간 미국과 멕시코 등을 돌며 사진을 촬영한다. 멕시코에서는 민속사학적으로 접근한 사진 작업을 했다. 특히 1932년에는 뉴욕의 쥴리안 레비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마드리드와 멕시코에서도 전시회를 열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그가 앞으로 평생 같이 지내게 된 명기 라이카 카메라를 만나게 된다. 이 무렵 대부분의 사진가가 중대형카메라로 작업을 한 반면 브레송이 소형카메라에 심취했던 것은 그가 이후 다큐멘타리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르뽀르타쥬) 사진가로 활약한 것과 관련이 깊다. 브레송은 평생 동안 라이카와 인간의 시각과 가장 근접한 50mm 렌즈로만 작업을 했으며 그 이상의 어떤 렌즈나 도구 사용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의 대표적 사진집인 “결정적 순간”의 서문(나중에 쓴 것임)에서 라이카와 만난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그것은 내 눈의 연장(延長)이 되어 그것을 발견한 뒤로는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즉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의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숨막히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눈 앞에서 저절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의 진수 모두를 단 한 장의 사진의 테두리 속에 잡아둘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러한 그의 소망과 노력은 1932년 파리의 공원에서 비 온 후 빗물을 건너 뛰는 사람을 포착한 결정적 순간을 잡는다. 이 사진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연출을 한 것도 재구성을 하지도 않은 것이다. 공원 구석에 앉아 조금 후 벌어질 광경을 구상하며 오랜 기다림 끝에 사자가 먹이를 덮치듯 결정적 순간을 낚아 챈 것이다. 1935년 뉴욕으로 건너 가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사진 작업을 하게 된다.
1936년 어느 신문사에 응시하여 낙방하고 장 르노아르 (Jean Renoir) 감독의 영화 ‘A Day in the Country’의 조감독을 하였고 39년에 다시 르노와르 감독과 ‘The Rules of Game’이라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1938년에는 스페인에서 병원 다큐멘터리 ‘Return to Life’ 등의 작품을 감독하였다. 또한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취재하기도 하였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군에 영화 촬영팀으로 종군하게 되나 그만 독일군 포로가 되고 만다. 1943년 3번째의 시도 끝에 포로 소용소 탈출에 성공한 그는 MNPGD라는 전쟁 포로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비밀 단체의 일원으로 레지스땅스 일을 한다. 수용소 탈출 후에 마티스(Matisse). 피카소(Picasso), 브라끄(Braque), 루오(Rouault)등 예술가와 소설가 들의 초상을 찍으며 그들 내면의 예술 세계를 사진에 표현하는 노력에 치중하였다.
* 위의 사진 속 인물들은 각자의 면면이 녹아져 있다. 마티스는 거장의 풍모가, 까뮈와 샤르트르의 사진은 지성미가 그리고 삐아프의 얼굴에는 우수가 녹아져 있다. 전범재판은 전후 프랑스에서 독일에 협조한 여인을 재판하는 장면인데 오른쪽 여인이 때리기 직전의 순간을 잡았다. 기막힌 순간이며 각 여인의 얼굴은 전쟁 중 당한 아픔과 후회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1946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열린 ‘Posthumous’(遺作)라고 명명된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에 1년을 소비했다. 그의 이 전시회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빗 시모어, 윌리암 반더벨트, 조지 로저 등 4명의 프리랜서 사진작가들과 함께 5인이 전세계 사진 공급 회사인 매그넘 포토사를 설립한다. 이는 사진가들이 특정 매체의 압력이나 틀에 벗어나 창작의 자유와 개성을 살리기 위해 설립한 국제보도사진가 회사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 있고 영향력 있는 사진통신사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1954년 이틀 간격으로 베르너 비숍이 페루 산악지대에서 자동차 사고로, 카파가 불인(佛印) 전장에서 지뢰를 밝아 각각 사망하였고 1956년 수에즈운하 상륙작전 중 데이빗 시모어가 취재 중 사망하여 큰 타격을 입었으나 매그넘은 그 후 젊은 사진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규모가 더 확장되었다. 그러나 브레쏭은 1966년 매그넘을 탈퇴한다. 1948년부터 50년까지 3년 동안 브레쏭은 극동지방을 여행하면서 인도에서는 간디의 죽음을, 중국에서는 국민당 전권에서 공산당 정권으로 넘어가는 혼란을,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국가의 독립을 맞는 등 아시아 근대사의 현장을 촬영을 하게 된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 브레쏭은 1952년 그의 대표작이 된 불후의 명작 순간의 이미지’(Images a la sauvette)를 발표하게 된다. 이 사진집의 표지는 당대의 화가 앙리 마티스가 만들어 주었고 나중에 영어판으로 결정적 순간들 (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되었다.
1954년 로버트 델파이(Robert Delpire)와 함께 협력하여 발리섬의 댄스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였고 데땅트 운동을 한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소련에 입국이 허용되었을 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955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유럽인 (Les Europeens)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연다. 같은 해에 하나의 중국에서 또 하나의 중국으로와 모스크바 사람들 같은 작품집도 출간한다. 이어 1959년에 중국 공산당 창설 1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3개월간 체류하면서 작품세계에 몰두한다.
60년대에 들어서도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계속된다. 63년 라이프지를 위해 쿠바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고 65년도에는 아사히 신문 초청으로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작품에 몰두한다. 66년 인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67년 IBM사가 후원하여 인간과 기계라는 작품집을 출간하고 또 다시 인도로 간다. 69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사의 요청으로 프랑스를 여행하며 프랑스 (Viva de France)라는 작품집을 출간했으며 미국에서 CBS 뉴스 다큐멘타리 2편을 감독하였다. 1972년에 소련을 방문하여 사진 촬영을 한 그는 1974년부터는 미술에 몰두하게 된다.
*브레쏭이 일본까지 와서 한국에 들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한국인들도 참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프랑스라는 작품은 삼등 분할법을 이용해 대칭을 만들고 수평과 수직선을 이용해 안정감과 강렬함을 두루 표현하였으며 여백의 미를 살린 브레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브레쏭은 1975년 뉴욕에서 사진이 아닌 회화로 처음 전시회를 갖는다. 이 이후에 사진집을 출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사진기를 놓은 것은 아니다. 전세계를 계속 여행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1981년 그에게 프랑스 정부는 그의 예술적 공로를 인정하여 훈장을 서훈한다. 그 외에도 독일과 미국의 사진가 협회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고 7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는다.
그는 2004년 8월 3일 프랑스 프로방스지방에서 숨을 거둔다. 거장은 떠났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사진의 선승(Zen master)라고 부른다.
브레쏭의 사진세계
브레쏭은 평생 라이카와 50mm 렌즈 하나로 그만의 사진 세계를 펼쳐왔다. 어떠한 보조 기구나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그의 오관(五官)을 이용해서만 촬영했다. 철저하게 자연광을 이용하고 심지어 플래시 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기 위한 연출 따위 - 예를 들면 여기 있어 라든가 웃어라 하는 등 -는 하지 않았고 사진을 짤라(트리밍) 구도를 바꾸는 행위를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그의 행위는 비록 결정적 순간이지만 우연히 찍힌 사진들은 절대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되고 기다림 끝에 얻어낸 결과이다. 그의 작품집 ‘결정적 순간들’의 서문에 있는 그의 글을 보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본다.
픽처 스토리
그는 어떤 주제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 핵심까지도 보여 주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 픽쳐 스토리라고 이야기 한다. 이를 위해 연출을 한다면 그것은 독자를 속이는 짓이라고 규정하고 권투 심판과 같이 득점과 횟수를 계산하여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항상 긴장시키고 몸의 유연함을 간직하고 있으라고 주문한다. 또한 사진에 담을 사람들과 품위 있는 말과 태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참을성과 여유를 강조하고 있다.
<한 주제로부터 모두 함께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은 대다수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강제로 모아두는 작업이 연출이고, 또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은 속이는 짓이다. 그런데 주제의 불꽃뿐만 아니라 그 핵심까지도 보여주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픽처 스토리인 것이다>
<촬영하는 동안에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암실에서 그 결과를 조작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관찰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
< 때로 사진을 찍는 데에는 수 초가 걸리기도 하고 혹은 몇 시간,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작업의 출발점을 이루는 규범적인 구상이나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항상 긴장시키고 있어야 하며, 또한 몸의 유연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장면을 대하고 있는 동안 사진작가는 아무런 빈틈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정녕 그 장면의 의미에 대해 전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표현을 부여했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모든 표현수단들 중에서 사진은 특정적이고 일시적인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진이다>
<촬영하는 동안에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암실에서 그 결과를 조작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관찰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의 자연광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실제의 빛이 조금도 없는 경우에 조차도- 플래시 라이트의 도움으로는 어떤 사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주제에 대하여
주제에 대해 그는 이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에는 주제가 있다. 그러나 그대로의 사실들은 거의 아무런 흥미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주제란 여러 가지 사실들의 수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진에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훌륭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사소하고 인간적인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라이프 모티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보고 또 보여준다. 그러나 형식의 유기적인 리듬을 발생시키는 것은 하나의 사건 그 자체이다 라고 설명한다.
인물사진에 대하여
인물 사진에 대하여는 인물 그 자체 보다 그를 에워 싼 삶의 환경을 사진 속에 담아야 한다고 강조 한다. 또한 이러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복잡한 장비들이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한다. 항상 눈, 마음 그리고 머리를 한 축에 두고 사진을 찍으라고 하는 브레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말이다.
<인물사진에 있어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 사람의 신분을 추적해 불 수 있도록 해 주는 점이다>
<인간의 연속성은 그를 구성하는 모든 외부적인 사실들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인물사진 속에는 개인의 삶의 환경 -인간에게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삶의 환경이란 것이 있으므로- 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복잡한 장비들과 반사판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기재들은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어느 특이한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은 대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사진작가는 언제나 그가 찍고자 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첫인상을 실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인물사진은 용모의 수려함이나 추함을 강조하지 않고 다만 성격을 반영한다>
구성과 기술 그리고 색체에 대하여
<흑백사진은 하나의 변형, 다시 말하면 하나의 추상이다. 거기서 모든 가치는 전이되고, 또 이것은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고 주장한 브레쏭은 컬러 사진의 복잡성과 상대적으로 미숙함 때문에 예측이 어렵고 따라서 정적인 대상에 범위가 한정되거나 인공조명 사용의 남발로 사진 본질의 훼손을 우려함과 동시에 구성이 엉성해 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구성에 있어서도 트리밍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고 눈을 제외한 어떠한 구성을 위한 보조 도구 사용을 부정한다. 또한 사진 촬영 기술에 대해서는 오직 매뉴얼에 충실하고 조작에 익숙해 지는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하고 기법보다는 보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권고하면서 사진에 있어 시각적 구성은 오직 훌륭한 직관으로만 생겨날 수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만약에 당신이 잘 만들어진 사진을 잘라내거나 가린다면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상호비례작용에 대한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짓이다> <재구성했을 때는 이미 시각의 성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튼 사람들은 기법에 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많이 생각하지만 보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작가가 자기의 카메라를 다루기 쉬운 것으로 느끼기만 하면,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그 카메라가 적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진에 있어서 시각적인 구성은 오직 훌륭한 직관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
나는 이번에 20세기 사진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 순수함 그리고 천재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감탄하였다. 지금 포토샵을 써서 사진의 결과를 조작하고 길거리에 얼굴이 뽀사시하게 나오는 사진관이 즐비한 서울 거리를 브레쏭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물론 이러한 작업들도 언젠가는 예술의 한 장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함의 상실에 대하여는 무어라 설명 할 것인가? 그의 사진 세계에 경의를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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