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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 #좌파 #교과서 #
🍀 교과서에 기술된 6·25전쟁 2-1
2020년 6월 25일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일으킨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근 초·중·고 교과서에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는지, 이 전쟁이 갓 시작된 대한민국을 어떤 위기로 몰아넣었는지 등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교과서로 인해서 다음 세대의 주역인 젊은이들이 6·25전쟁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많이 해 온 영산대 정경희 교수를 모시고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편향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정경희 교수는 <미국을 만든 사상들>, <토머스 제퍼슨>,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공저)>, <1948: 대한민국 건국이야기(공저)> 등을 저술했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에 국정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21대 총선 에서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양일국 박사가 맡았습니다. 양일국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자유총연맹 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김주성 전 교원대 총장 등이 주관하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대안교과서 제작에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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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국 : 교수님,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교수님은 교과서의 편향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많이 해 오셨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경희 : 저는 본래 ‘미국사’를 연구했습니다. 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했고, 석사·박사 학위 논문도 미국 역사에 관해 썼습니다. ‘미국사’를 30년 넘게 연구한 셈이지요.
그러다가 2012년에 저희 대학 은사께서 저에게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니까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사 교과서 분석 프로젝트를 2년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한국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이 마치 우리 민족의 정통한 국가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겁니다.
1948년에 남한과 북한에 하나씩,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성을 지닌 국가라고 믿고 있었는데 교과서를 열어보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 정통성을 지닌 정부인 것처럼 쓰여 있었습니다.
또 교과서 서술 방식을 보니까 북한의 역사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 <현대조선력사>,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들을 살펴보니 우리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방식이 북한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습니다.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제시대’라고 배웠는데 요즘 교과서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아보려고 이기백 교수가 쓰신 <한국사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보았는데,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통사> 책에 보니,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일제강점기’, 그 이후를 ‘미제강점기’라고 표현하고 있더군요.
북한은 해방군인 소련군이 들어와서 자기네들은 해방이 되었지만 남한은 미제가 강점(强占)하고 있으니까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6·25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남한을 미제강점기로 인식하고 있는 세력들이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양일국 : 지금 대한민국의 상태를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프레이밍하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정경희 : ‘일제강점기’라는 용어 자체도 국제법 등을 근거로 정당한 용어인지 엄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인데, 그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 용어가 ‘미제강점기’를 전제로 하고 있고, 북한에서 사용한 용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덧) 한사련은 이제까지 사용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버리고 일제식민지기를 공식용어로 사용합니다. (송산)
한국사 교과서를 쓴 사람들이 북한의 역사교과서를 보고, 용어까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일국 : 지난 박근혜 정부 때 이렇게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어서 이를 바로잡고자 국정화 시도를 했었지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가 교과서를 왜곡한다고 반발했었습니다.
당시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국정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참여하셨는데, 어느 부분을 주로 기술하셨는지요?
정경희 :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양 근대사 부분을 주로 기술했습니다. 제가 원래는 18세기 이후의 서양 근대사, 특히 서양 사상사를 전공했기 때문이지요.
양일국 : 그럼 이제 오늘의 주제인 6·25전쟁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 나눠보지요. 이번에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이라는 책의 공저자로 참여하셨습니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에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서술이 안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과 소련에 가서 지원을 요청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 교과서에는 어떻게 소개되어 있는지,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경희 : 우리 학생들 가운데, 6·25전쟁을 누가 있으켰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전범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좌파 역사학자의 학술서적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을 했다든가, 전쟁 통에 도망을 갔다든가 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런 겁니다. 북한의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이 함께 1949년 3월에 기차를 타고 소련 모스크바 역에서 내립니다.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으러 간 것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당시 동유럽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일성과 박헌영이 집요하게 찾아가 설득한 데다, 1949년 10월에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국제 정세가 바뀌자 스탈린은 비로소 남침을 허락합니다.
단, 남침했을 경우 북한군만으로 승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김일성에게 먼저 마오쩌둥을 찾아가 지원군에 대한 확답을 받으라는 조건을 내겁니다. 김일성은 시키는 대로 마오쩌둥을 찾아가 지원을 약속 받고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중공군의 개입을 1950년 10월로 알고 있지만 사료를 보면 팔로군 출신의 중공군이 이미 6·25전쟁 초반부터 전쟁에 참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을 일으킨 주범 김일성이 대한민국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빠져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전히 많은 국민이 ‘6.25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거나 혼용해 쓰고 있으나, 왜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고 ‘6.25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하는 정경희 교수.
양일국 : 심지어 젊은 학생들은 6·25전쟁을 남한에서 먼저 침공해서 남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도 제대로 안 가르친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6∙25사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남조선인민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지요. 수정주의적 견해를 제시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고 ‘6.25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정경희 : 예전에 사용하던 ‘6·25사변’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상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이고 북한은 국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의 이천이백만 동포를 ‘북한 국민’이라고 부르지 않고, ‘북한 주민’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북한 주민은 헌법상 우리 국민인 것입니다.
헌법상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이기에 6·25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사변’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좌파 쪽에서는 이 용어를 집요하게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변’이 아니라 ‘전쟁’으로, 그것도 ‘한국전쟁’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6·25사변’을 ‘6·25전쟁’으로 바꾼 것은, 헌법과는 달리, 이미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좌파들은 나아가 ‘6·25전쟁’을 ‘한국전쟁’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좌파 학자들이 쓴 책은 하나같이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6·25전쟁’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6월 25일에 남침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과 국내의 좌파 학자들은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쟁 전부터 남한과 북한의 충돌은 자주 있었고, 어느 날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이므로 이것은 내전(內戰)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남침을 인정하게 되면 전쟁의 책임이 100% 북한에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충돌하다가 어느 날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하면 전쟁의 책임이 양쪽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50%만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죠. 이게 저들이 남침을 부정하는 까닭입니다.
양일국 : ‘남침 유도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북한은 전쟁을 할 의도가 없었는데 미국과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인데요.
북한을 추종하는 분들은 ‘무오류설’이라고 해서 북한 김씨 왕조는 절대 잘못하거나 실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침을 유도했다고 해서 남침을 하고 승리하지도 못하고 졌다면, 가장 중대한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요?
정경희 : 저들 말대로 우리가 남침을 유도했다면 서울이 어떻게 사흘 만에 점령됐겠습니까?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었어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장교클럽 개관식 파티가 있었습니다. 파티 후에도 2차를 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겁니다.
사병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침 6월이 모내기철이라 사병들을 모내기 도우라고 집으로 대거 휴가를 보내놓았습니다. 이런 것만 봐도 남한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침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일국 : 2018년에 반미단체 관계자들이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한반도가 북한 주도로 통일될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 분들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바르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보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경희 :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했다는 것이 바로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낙동강 전선에서 밀려서 더 이상은 갈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오면서 우리는 이미 국토의 90%를 뺏긴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특단의 작전을 시도했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곳인데 물이 빠지면 상륙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타고 가서 수만 명의 군인들이 인천에 상륙을 해야 하는데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으로 매우 짧았습니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성공 확률이 1/500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천으로 상륙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밀고 나갔고, 실제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단숨에 바꿔놓은 겁니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맥아더 장군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사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6∙25전쟁을 매우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에 대한 폭격을 주장하고, 유엔군을 더 파병해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맥아더 장군에게 거리를 두기도 했습니다.
양일국 : 6∙25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 장군이 한강 전선을 시찰하다가 소년병 하나가 참호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통역병을 통해 소년병에게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당연히 소년병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소년병은 자신에게 총과 탄약을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내가 반드시 너를 도우러 돌아올 것”이라 약속했고 이것이 6·25의 판세를 뒤집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정말 영화 같은 일입니다.
정경희 : 맥아더 장군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도 유엔군을 파병하는 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양일국 : 건국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기와 같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소련, 중국, 북한의 공산세력은 대한민국을 무력 침공한 것인데, 이를 막아낸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한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 다리를 끊고 혼자 도망갔다는 등,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했다는 등 온갖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통일의 기회임을 포착하고 38선 돌파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시지요.
정경희 : 사실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갔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렇다면 9∙11 테러 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국가 원수의 역할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을 버리고 피난 갔다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이 전쟁 중에 중국 땅으로 도망친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국군이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김일성은 국군이 평양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평양을 버리고 평안북도 강계로 도망을 갔고, 나중에는 아예 중국 땅 퉁화(通化)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에 비해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한때 전세가 악화되자 미군에서 제주도로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가지 않았습니다.
양일국 : 오늘날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막론하고 과도하게 중국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6∙25전쟁 당시 중국 공산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반도 전체가 자유진영이 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은 6∙25전쟁과 한반도 분단의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 교과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어 있는지 궁급합니다.
정경희 :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라는 지구상 최초의 공산국가가 생겨났습니다. 1919년에 소련의 레닌이 Communist International, 줄여서 Commintern(코민테른) 이라는 국제공산당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공산주의자들도 소련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모셔왔으며, 심지어 그 가운데 일부는 소련을 자기 조국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고 이어서 소련이 붕괴됐습니다. 이후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국내 좌파들은 중국이 시장경제 를 일부 수용해서 경제가 좀 발전하는 듯싶으니까 이제는 중국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받드는 겁니다.
하지만 좌파들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20세기에 공산주의를 70년 정도 했는데, 이 현실 공산주의 나라들이 망한 겁니다. 망하는 걸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당연히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사실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망하고 나자 좌파들은 공산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는 북한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북한은 2009년에 헌법을 개정해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회주의’로 다 바꾸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만든 한국사 교과서에도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써놓았습니다.
정치인 가운데는 ‘파리가 만 리를 갈 때 말 궁둥이에 딱 붙어서 가지, 혼자 날아가진 못한다.’면서 중국을 말, 우리나라는 말 궁둥이에 붙어 가는 파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친중 세력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1992년 이전에는 중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중공(中共)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공은 중국공산당의 약자입니다.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가 중국 이라고 부른 나라는 타이완입니다. 그러니 6∙25전쟁에 대해 서술할 때는 중공군의 개입이라고 써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는 중국군의 참전이라고 쓴 책도 있습니다. 중국군이 우리를 도와 ‘참전’했고 거꾸로 미군이 ‘개입’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거지요.
(2-2로 계속)
출처 월드뷰 06 JUNE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