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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판단하기로, 무 태후는 옛날의 신비한 전설이나 기담奇談, 혹세무민하는 술사들의 허언과 예언 따위를 잘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명신검 두 자루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것은, 곧 하늘이 자신에게 천하를 맡겼다는 뜻으로 그녀가 해석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손만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근데 그 비의전승의 진원지는 우리 고려입니다.”
“그래서요?”
“고려 사람들은 그 전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명신검은 우리 고려인, 즉 여기 계신 고조영 장군의 조부이신 고려거사께서 자발적으로 무 태후에게 바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고려인들은, 천명신검을 소유한 무 태후가 천하를 얻은 것으로 믿고, 오직 무 태후를 결사 옹위할 뿐입니다.”
총명한 고조영과 좌중의 모든 남녀 영웅들이 그녀의 내의內意를 금방 알아차렸다.
“아하, 그래서 어젯밤에도 이해고 장군의 제의로 우리가 ‘태후 마마 결사 옹위!’를 외친 게 아닙니까?”
사비우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손만영 귀성주자사의 생일에 함께 모인 우리 고려인들과 거란인들은, 마침 천명신검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 태후를 결사 옹위하는 게 하늘의 뜻이라 굳게 믿고, 무 태후 만세를 부른 거죠.”
이해고의 말에 손만영이 대꾸했다.
“아직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네.”
동시에 손만영이 갑자기 양손을 들고 외쳤다.
“황태후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일행이 일제히 따라서 소리쳤다.
“황태후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태후 폐하 결사 옹위!”
“하지만 이건 너무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발상이 아닐까요?”
고조영이 조심스레 여미아에게 묻는다.
“맞습니다. 우리의 시각에 따를 경우, 그것이 구실치고는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무 태후에게는 이런 것이 결코 어설픈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확 잡아당기는 매우 신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해주는 뭔가 신비로운 하늘의 징조를 무척이나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미아의 추정은 옳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듬해인 688년 4월에 무승사가 남몰래 흰 돌을 깎아 제작해 놓고서, 낙수洛水(낙양성을 가로지르는 강)에서 얻었다고 떠벌린 “천수성도天授聖圖” 하나만 보더라도, 그녀가 자신의 지위에 대한 하늘의 인정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밝혀놓은 당대의 사관史官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판단할 때도, “성모임인聖母臨人 영창제업永昌帝業(성모[무태후]가 인간 세상에 임하여 황제의 업을 영원히 창성케 하도다)”이라 새겨진 “천수성도”는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어린애 장난이었지만 말이다.
여미아는 좌중을 한 차례 돌아본 후 조용하게 덧붙인다.
“진짜 난제는, 적절한 구실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
뭇 영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얼굴에 투사된다.
“만에 하나 우리 가운데서 밀고자가 나타나면, 만사는 끝장입니다.”
“누가 감히?”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료를 의심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장마철의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므로, 우리는 그 때를 대비해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밀고하면 모든 게 끝장 날 터인데, 안전책이 어디에 있겠소?”
손만영의 반문이 옳았다. 당시에는 밀고가 무척 성행했는데, 일단 누군가가 어떤 이들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밀고하기만 하면, 반역모의의 사실여부는 덮어놓고, 혐의자들은 내준신, 주흥, 만국준 등의 무리에게 붙잡혀 일족이 몰살당하며 가산을 죄다 빼앗기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일은 무 태후 추종자들의 과잉충성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았지만, 피차간의 원한 관계로 인해 발생하기도 했다. 즉 원수를 죽이고 싶으면, 원수가 반역모의를 했다며 밀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 태후 자신이 누군가를 처형하고자 할 경우, 이런 저런 죄에다 반역모의까지 엮어 넣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나라 황가 종실의 이씨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족멸族滅당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 태후가 누군가를 죽이려 작심하는 일이고, 그 다음은 누군가에게 밀고를 당하는 것이었다. 길에서 서로를 만나도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못하고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며, 두 사람 이상이 모여 밀담을 나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험악한 시절에, 이 두 가지 재앙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여미아는 좌중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하늘을 믿고, 또 하늘과 교통하며 살았던 성현들의 지혜를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찬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저의 외조부께서 저를 타관으로 내보내실 때, 저에게 ‘연연세세’라는 시문을 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사의 위기가 닥치거든 이 시 속에 생로가 있으니, 거기서 살 길을 찾아라.’ 그리고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가슴 판에 새기라며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가씨의 외조부님이 탁월한 고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외조부님의 말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십이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이해고가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장군님의 의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의 외조부님 말씀에 따르면, 그 얘기는 자신의 고조부로부터 내려온 가문의 전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문은, 이 시를, 죽음의 기로에서 생로를 찾아주는 하늘의 계시처럼 받들어왔습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말해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제 이야기를 믿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리 선조들이 생로라고 믿었던,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만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 때 고조영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작년 이른 봄, 이루하와 여미아를 고가장으로부터 계성의 집까지 배웅할 때, 여미아가 비단 종이에 쓴 시문 “연연세세”를 암기투척 수법으로 자신에게 날려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시문의 끝자락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生 死 逢 岐 路 생 사 봉 기 로
生 路 求 此 詩 생 로 구 차 시
생과 사의 갈림길을 만나면, 살 길은 이 시에서 찾으라
여미아는 “연연세세”라는 시문을 방안의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려주고 그 뒤의 이 문구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아가씨는 그 시문의 어디에 생로가 있음을 깨달으셨습니까?”
여미아가 천정을 쳐다보며 사색에 잠겼다가 손만영의 물음에 답했다.
“소녀가 비록 우둔하나 깊이 연구해본 결과, 그 시 속에 생로를 가리켜 주는 핵심 문구가 두 개 들어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그 두 문구는 다름 아닌, ‘진보眞寶’와 ‘연연세세’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 두 글귀가 어째서 생로의 문을 여는 열쇠인지 알려면 먼저 다른 시 하나를 분석해야 하는데요, 그 다른 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의를 집중한 채 귀를 기울였다.
“이 가운데는, ‘별유진보別有眞實’라는 시를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단군조선의 이십이 세 색불루 임금(재위 서기전 1285-1238)의 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조영이 물었다.
“맞습니다. 삼칠성三七城의 성주 묘고미향苗孤美香이 청사의 지하 석실에서 막대한 양의 보물들과 함께 발견한 그 시입니다.”
고조영은 여미아의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몹시 놀랐다.
“아가씨가 어떻게 우리 고려 황가에 전해 내려오는 비사秘史를 알고 계십니까?”
여미아가 고조영을 향해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해맑은지 사람의 가슴을 티끌 하나 없이 환하게 맑히는 것 같았다.
“저도 다물 임금의 ‘행심록幸心錄’과 해모수 임금의 자서전을 읽어보았습니다.”
묘고미향의 아들이었던 해모수 임금의 자서전에, 그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방 안에 앉아있는 젊은이들은, 귀성주자사 손만영을 제외하고 “별유진보”라는 시를 여미아의 입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수개월 전 소녀는, 별유진보가 무엇인가를 여기 모인 분들의 대다수가 듣는 가운데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별유진보는 다름 아니라, 경교의 신인 그 메시아 예수라는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사비우 장군님은 기억력이 참 좋으시군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시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별유진보와 관련해, 뭔가 내밀한 뜻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 긴장된 낯빛으로 여미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천하를 유혈로 얻어 이름을 드날리고 만금을 얻어 기뻐해도 이슬 같은 인생이라, 천년의 세월도 한 잔 술 마시는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가버리고 만다는 이 시는 삼행三行까지 분명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지막 행에서는 분위기가 반전해 전혀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삼칠 중에 참 보배가 따로 있다는 거였죠.”
여미아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보며 물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좌중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후 조영이 살며시 입을 연다.
“그건 세상에서 보배처럼 여기는, 입신양명과 억만금이 인생의 덧없음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니, 참 보배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던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삼칠 중에 있다는 참 보배는, 덧없는 인생을 덧없지 않게 해 준다는 내밀한 뜻이 그 사행四行의 시구 안에 암시되어 있음을 헤아리지 못하셨나요?”
“아, 그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거로군요.”
조영의 대답에 사비우가 물었다.
“그럼 별유진보를 얻을 경우, 이 덧없는 인생이 연연세세 끝없이 길어지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바로 맞히셨습니다.”
여미아는 무언가를 상기하는 듯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연연세세’라는 문구에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문구는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이 문구는 얼핏 들으면 ‘연연세세年年歲歲/世世’ 즉 ‘오래오래, 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이를 통해, 시의 작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별유진보를 얻을 때 덧없는 인생이 연연세세 끝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거죠.”
그 때 고조영이 물었다.
“하지만 ‘연연세세燃戀洗世’의 속뜻은 전혀 다른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속뜻은 ‘별유진보’를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해답인데요, 이건 각도가 약간 다른 문제죠.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별유진보를 얻으면 연연세세 복락을 누리게 되니, 별유진보를 얻는 길이 살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였다가 여미아가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두 편의 시에 어떤 상관성이 있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연연세세’라는 시문 속에, ‘별유진보’라는 시문의 두 글자 ‘진보’가 들어가 있었으므로, 두 편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 거죠.”
좌중은 여미아의 말뜻을 풀이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별유진보’에서 읊은 인생의 덧없음이, ‘연연세세’에서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연연세세’라는 문자의 언어유희에 주의하면서입니다.”
여미아의 말인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별유진보”라는 시는 인생의 덧없음을 읊는 가운데, 별유진보를 얻어야만 그 덧없음이 해결되고, 그 때 허무하지 않은 영구한 인생을 얻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별유진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연연세세燃戀洗世”라는 시에 담겨 있다. 그것도 시문 중의 “연연세세燃戀洗世”라는 문구에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덧없는 인생에서 그 덧없음을 없애버리고 별유진보를 얻어 인생을 “연년세세年年世世” 누리는 비결이 바로, “연연세세燃戀洗世”라는 문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천하에 천 년을 살았다는 도가道家의 인물들이 가끔 있었지만, 모두가 허풍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 아닙니까? 설사 그런 인물이 있다 손치더라도 땅 위에 사람이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 수천 년을 살았다는 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여미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경교의 경전들에서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별유진보이신 우리 임금을 얻는 분들이 누리는 연연세세의 복락은, 금세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내세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내세는 죽음 이후이니, 별유진보를 얻어 누리는 연연세세의 복락은, 현세에서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이 아닙니까?”
이해고가 물었다.
“맞습니다.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비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무의미한 말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해고의 볼멘소리다.
“현세의 목숨에 연연한다면, 어찌 우리가 이 대업大業을 모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나아가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주살당한다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우리의 대업은 어찌 되는 겁니까?”
“우리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할 것입니다. 천하에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뛰고 나는 기인이사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과업을 수행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두려워 벌벌 떨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입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없는 게 아니었다. 여미아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두 눈썹 아래, 역시 보검처럼 빛나는 신비로운 양안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다시 물었다.
“연나라 태자 단丹에게 자객으로 고용된, 유명한 검객 형가荊軻(?-서기전 227)가 진왕秦王 정政을 코앞에 두고도 죽이지 못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거야 형가와 함께 갔던 동료, 어리석은 진무양秦舞陽(?-227)이 진왕 정 앞에서 벌벌 떠는 바람에 시해모의가 간파되어 진왕 정이 경각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 말씀도 옳습니다만, 천하의 검객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잡고서도 오른손의 비수로 진왕을 해치는데 실패한 이유는, 그걸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진왕의 무공이 예상 외로 탁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가 자신도 두려워 떨었기 때문에 그 일격이 실패한 것입니다. 형가는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어서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붙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침착했더라면 형가의 무예로 볼 때 단 일격에 진왕은 저 세상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럼 형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엉겁결에 찌르다보니, 수법이 제대로 구사되지 못하고 진왕이 이를 피할 수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얼 두려워했을까요?”
“아, 그렇군요. 실패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한 거로군요.”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는 그 일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대전大殿에서 구름같이 에워싸고 있는 진왕의 무사들을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래저래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친 거죠. 진무양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웠다면 애시당초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처음에는 굳은 각오로, 애써 용기를 북돋우어 갔지만, 막상 진왕의 쟁쟁한 휘하 장수들과 무사들을 보고 그 위용을 목도하자, 더럭 겁이 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아가씨의 본뜻을 체득했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결국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데 있다는 게 아닌가요?”
“손 대인께서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그 두려움의 돌문을 산산이 박살내버릴 철장鐵杖이 바로, 내세에서 누릴 연연세세의 복락입니다.”
“그렇다면, 별유진보를 얻는 자가 내세에서 연연세세 복락을 누리므로, 별유진보를 획득한 자는 사망의 공포를 극복하게 된다는 뜻인가요?”
“바른 지적입니다. 공포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죽음에 임할 때 오히려 연연세세 누릴 복락을 기대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미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금생의 목숨이 다한다 하더라도 내생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니, 그 길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생로입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참된 생로지요.”
그 때다. 바깥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하인이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와 조영에게 말했다.
“바깥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이 밤중에?”
조영의 집에 모인 일행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여미아가 이렇게 말한 후 조영의 낯을 쳐다보았다.
“손님을 모시고 들어오셔도 됩니다.”
사람들은 얼굴에 두려움의 빛이 가득하면서도 나이어린 하녀, 여미아가 태연자약하자, 남아대장부로 자인하던 그들은 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 편, 어느 정도 두려움을 다잡으며 낯빛을 고치려 애썼다.
조영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좌중에는 정적이 깃들고, 사람들의 가슴은 촛불의 떨림을 따라 파문이 일고 있었다.
잠시 후, 조영이 손님과 함께 입실하는데, 그는 무후군의 장수 무유서였다.
무유서가 조영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아마자 방안을 휙 둘러보면서 대뜸 묻는다.
“오밤중에 방문을 휘장으로 가린 채 밀담을 나누시다니, 다들 목이 몇 개라도 달렸습니까?”
그의 직설적인 질문에 아무도 답변하지 못했다.
“태후마마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오늘의 생일연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자정이 넘도록 아직 회합을 마치지 않고 있는 사실조차 손바닥 보듯 훤하게 보고 계십니다.”
무유서의 말은 영웅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여미아는 그의 말 끝에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배가 출출할 터이니 음식을 드시면서 저희들이 나누던 이야기에 동참하셨으면 합니다.”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예전, 영주에 가던 길에 ‘만락객잔’에서 나누던 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하, 그 별유진보에 관한 얘기군요.”
“불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휘장을 친 것은 저희들의 불찰입니다.”
여미아가 그 아름답고 예리한 눈빛으로 무유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유서가 여미아의 시선에 약간 설렘을 느끼며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좌우를 쳐다보았다.
“장군님, 그런데 지금 급히 되돌아가보셔야 하지 않나요?”
여미아의 말이다.
“네, 맞습니다. 아가씨는 연치가 어린데 너무 무서운 것 같습니다. 즉시 가서 태후마마께 보고를 올려야 합니다.”
“가셨다가 꼭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니까요.”
무유서가 좌중에 인사한 후, 조영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일행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고조영이 들어오자 여미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모여서 얻은 결론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우리의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 공포감 극복의 비결은 별유진보를 얻는 데 있다.”
손만영의 말에 여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청동단검의 밀의전승은 피비린내와 천하를 얻는 것 외에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일남일녀를 결합시켜 주는 거라고요?”
조영의 물음에 여미아가 다소 붉어진 낯으로 대답했다.
“그건 표면상의 현상일 뿐, 실제로 전승이 암시하는 바는 다른 내밀한 뜻이라고 대덕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개 전승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요?”
고조영이 묻는다.
“고양원 대덕님께서 언젠가 저와 그 이야기를 나누실 때, 그 비의전승은 우연히 생긴 것 같지만, 실상 그 속에 무언가 하늘의 기운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고 이르셨습니다.”
여미아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피비린내, 천하쟁취, 일남일녀의 혼인. 청동단검 비의전승의 이 세 가지 항목을 옛 사람들이 어떤 시문 속에 표현해 놓았는데, 방금 전에 우리가 이야기한 ‘별유진보’와 ‘연연세세’가 바로 그 시문들입니다. 이건 저도 대덕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알게 된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군요. 하지만 ‘별유진보’와 ‘연연세세’ 속에 생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조영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언젠가 시간이 나서, 그 속에 깃든 오묘한 비의를 함께 토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미아가 바깥의 어둠을 쏘아보며 말했다.
“생과 사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다 보니, 새벽이 오는 것 같은데, 동도東都(낙양성) 탈출의 시기 문제는 꺼내지도 못하고 말았군요.”
“그 문제는 본국과, 그리고 이진영 대인과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지 않습니까?”
손만영의 말에 고조영이 반문한다.
그 때 여미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목하 당면한 문제는, 언제 거사를 하느냐도 아니고, 어느 때에 볼모 생활에서 벗어나 북으로 탈출하느냐도 아니라, 무 태후의 군사들이 들이닥칠 때 두려워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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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1. 24. 겨울
첫댓글 목사님 좋은 지식 정보 감사합니다 😃
하루에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목사님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