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사공부방(일본 불교사 독서회) | 편지4-77 : 1460독, 범부(凡夫) - 첫 번째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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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게」에서 ‘범부’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은 세 군데입니다. 이들을 한 번 더 추출해서 보겠습니다.
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위의 두 구절은 ‘범부’를 주어로 쓰고 있으며, 아래 마지막은 목적어로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과 세 번째 구절은 공히 ‘선악범부인’라고 하였으며, 중간에서는 ‘염범부’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오염된 범부’는 ‘선한 범부’가 아니라 ‘악한 범부’만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선을 짓는 사람도 악을 짓는 사람도 다 범부임에는 틀림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선한 범부’와 ‘악한 범부’ 사이에는 간극이 큽니다.
선한 범부는 칭찬을, 악한 범부는 비방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비교대상은 ‘악한 범부’와 ‘선한 범부’들 사이의, 어떻게 보면 도토리 키 재기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차원에서의 비교 대상은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과 경쟁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선한 범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미타불 앞에서도 “저는 선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가슴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기나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 앞에서는 모두가 다 범부이다. 이 ‘범부’를 ‘악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아미타불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 범부이자, 모든 존재가 다 악인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일체선악범부인’이라고 말입니다. ‘선을 지었든 악을 지었든 일체 모든 존재가 다 범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이러한 범부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겠습니다.
범부라는 자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왜 어려울까요?
바로 우리 스스로 다 아상(我想, 我相)이 있고, 에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다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범부다’라는 인식은, 내가 잘 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라는 인식 아니겠습니까.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님께서느 《나무아미타불》에서 ‘범부’라는 한 장을 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위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야나기 선생님은 둘이라는 것, 그 점을 싫어합니다.
범부는 둘이라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불이에 들어가면 범부는 아니겠지요. 이미 불보살의 경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만 범부를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언술로서 “모든 존재는 다 범부다”,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러한 인식을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나기 선생님은 ‘천상천아 유악독존’도 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악(天上天下 唯我獨惡)’이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 홀로 높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다 악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악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악하다.” 이것이 ‘범부의 자각’입니다.
이러한 범부의 자각을 정토불교에서 강조한 분으로 야나기 선생님은 선도대사, 호넨스님, 그리고 신란스님을 듭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야나기 선생은 이 ‘범부’의 장에서는 잇펜스님을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죄악이 많아서
생사를 거듭하는 범부이니,
한량없는 겁 이전부터
항상 죽고 항상 윤회해왔으나
그것을 벗어날 인연이 없다.(160-161쪽)
다만 겐쿠(源空, 호넨)같이 아주 어리석은 무리는 더욱이 그(삼학을 닦을 수 있는 – 인용자)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깨닫기는 어렵고 미혹하기는 쉽다.(161 쪽)
진실로 알겠구나.
어리석은 구토쿠(愚禿, 어리석은 까까머리) 신란은
슬프게도 애욕의 넓은 바다에 빠졌으며,
명리의 큰 산에서 헤매면서,
정정취의 무리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진실한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네.
부끄럽고, 슬프도다.(162쪽)
지금 호넨스님을 개조로 받드는 정토종의 사찰에 가보면, ‘우자(愚者, 어리석은)의 자각’이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 범부다, 악하다.
그러면, 그 경지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수행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토문에서는 어차피 해봐도 성공하기는 어렵다.
성공할 수 있다면, 범부가 아니다.
범부이기에, 자력으로는 구원이 어렵다.
수행했다는 의식만 남아서 더욱 그릇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 스스로 범부임을 깨닫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선(禪)에서는 부처의 자각인데, 정토에서는 범부의 자각입니다.
야나기 선생님은 스스로 범부임을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절망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아미타불을 만나는 순간이라 말합니다.
한번 읽어봅니다.
반어적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온전히 범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범부이면서도 범부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망상을 버리지 못한 집착이 슬픈 까닭이다. 그 망집이 구제받는 데 걸림돌이 된다. 범부라고 자각 한다면 몸을 내맡기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럴 때만이 아집이 끊어지고, 그때가 정토에 받아들여지는 때이다. 그러니까 범부야말로 성불이 확약(確約)되어 있다. 공 연히 범부이면서 범부가 아닌 체하기 때문에 그 확약을 쓸모없게 해버린다.(167쪽)
결국 우리의 왕생은 악인으로 돌아가서, 범부로 돌아가서, 우자로 돌아가서 하는 왕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입장에서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악인이고, 범부이고, 우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돌아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아미타불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가 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거리에 나가서 앙굴리말라처럼 악행을 해볼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