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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확대와 광주학살 소식으로 모두 숨을 죽이고 있던 1980년 5월 말, 광주의 희생자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원 풍모방 노동조합의 노조원들이었다. 노조원 1,700명은 4백70만원을 모아 6월 초 광주 의 대주교 윤공희에게 이를 직접 전달했다. 당시의 공포 분위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풍모방 노조는 70년대에 활동한 민주노조 가운데서도 가 히 전설적인 노조였다.
원풍노조는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절 금지된 72년, 파업농성을 통 해 10년간의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한 74년에는 노조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한국전쟁 이후 초유의 사례를 만들며 회사 정상화에 기여했다. 어용화된 섬유노련 본부에 대항해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내던 지 부(산별노조 체계하의 기업 단위노조 조직) 답게 80년 봄에는 ‘한국노총 민주화와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전국궐기대회’를 주도적으로 열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최강의 민주노조였던 원풍노조도 5공화국의 폭압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광주에서 피묻은 손을 거두어들인 신군부는 80년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 보위)를 설치했다. 실질적인 최고통치기구였던 국보위는 8월 이른바 ‘노동계 정화조 치’를 단행했다.
한국노총 위원장 김영태를 비롯한 대표적인 노동귀족들을 자진 사퇴시키는 요식행위 로 본질을 희석시키려 했지만, 정화조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민주노조 파괴였다. 이 조치로 청계피복·반도상사·콘트롤데이타·원풍모방 등 유신정권 아래서도 살아 남았던 민주노조의 핵심간부들이 대거 현장에서 쫓겨났다.
이와 함께 국보위는 산별노조 체계를 기업별 체계로 바꾼다는 방침에 따라 노총 산 하 106개 지역지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어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구 성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80년 12월31일 노동관계법을 개악했다. 제3자 개입 금지, 노조 설립요건 강화, 기업별 체제 전환, 유니온샵 제도 폐지 등이 노조의 조직역량 과 투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표적 개악조항이었다. 이러한 탄압조치가 어떤 결과 를 낳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자동차노조의 경우다. 80년 7월말 4,000개 가 까운 사업장에 18만명가량이던 노조원이 81년 2월말에는 540개 사업장 8만여명으로 급감했다.
정화조치로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제거하고 노동법 개악으로 노조의 조직기반을 무너 뜨린 신군부는 5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81년 들어서는 노동부와 공안기관, 공권력 을 직접 동원해 그때까지 남아 있던 민주노조를 깡그리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결성돼 70년대 노동운동의 정신적 구심역할을 한 청계피복노 조에 해산명령서가 날아든 것은 81년 1월이었다. 전태일의 모친이자 ‘노동자들의 어 머니’로 불리던 이소선이 구속되고, 이어 간부 8명이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뒤였 다. 경찰이 사무실을 강제 봉쇄하자 청계피복 노조원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자유노 동기구’ 한국사무실을 점거하고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경찰은 사무실 벽을 뚫고 소방 사다리를 동원해 농성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다국적기업의 한국지부로서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결혼퇴직제 폐지, 하후상박 임 금인상제, 주 42시간 노동제 등을 선구적으로 쟁취한 한국콘트롤데이타 노조도 그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82년 3월 회사는 정화조치로 이미 직권정지중이던 지부 장 이영순과 부지부장 유옥순을 포함, 6명의 노조간부를 해고했다. 노조원들은 파업 농성으로 대처했고, 6월에는 미국 본사에서 부사장이 내한해 직접 협상에 나섰다. 부 사장은 복직시킬 의사를 비쳤으나 오히려 노동부가 완강히 반대했다. 경찰은 부사장 과의 교섭 현장에 난입해 노조원 50여명을 연행해갔다. 회사가 공장철수 의사를 밝 힌 가운데 7월에는 경찰의 사주를 받은 남성 관리자들이 노조간부들을 집단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회사는 7월20일 공장을 폐쇄했다.
80년 8월 노동계 정화조치로 지부장 방용석(전 노동부장관)과 부지부장 박순희가 수 배당하고 간부 4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등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노조활동을 해오던 원풍모방 노조에 최후통첩이 날아든 것은 추석을 며칠 앞둔 82년 9월26일이었 다. 이날 회사는 노조간부 4명을 해고한다는 공고문을 붙인 뒤 게시판 위에 철망을 치고 경비를 세웠다. 노조원들은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정화조치 이후 회사는 갖은 억지와 트집을 잡아 노조를 흔들었고, 언론은 ‘도시산업선교회(도산·都産)와 손잡고 회사의 도산(倒産)을 획책하는 극렬세력’을 규탄한다면서 대표적 사례로 원 풍모방을 들먹였다.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 노조간부들은 일단 27일 오전 노조 사무실에 서 대의원모임을 갖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현장 담임들과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뒤섞인 40여명의 남자들이 문을 부수고 사무실로 난입했다. 그 들은 간부와 대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낸 뒤 위원장(산별 노조가 기업별 체계로 전환하 면서 지부장 명칭도 위원장으로 바뀜) 정선순과 노조사무원을 사무실 안에 둔 채 출 입문에 못을 박았다. 노조원들이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폭행당해 나뒹구는 사이 방송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극렬 불순노조의 행태’를 찍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치밀하 게 계획된 작전이었다.
위원장이 감금당한 채 밤새 사표를 강요당하는 동안 600여명의 노조원들은 퇴근을 하 지 않고 검사과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탄압의 규모나 강도, 치밀함으로 보아 이 제는 마지막 싸움이 불가피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노조원들은 ‘파업은 오히려 회사 측에서 바라는 바이니 작업은 계속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상황 전개는 마지 막까지 노조의 도덕적 정당성을 지키고자 했던 노조원들의 이런 안쓰러운 노력을 비 웃었다. 남자 사원들이 현장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제는 ‘도산’의 앞잡이에게 속지 맙시다!”며 노노 갈등을 연출하면 기자들이 이를 찍었고, 방송과 신문은 “도 산위기 맞은 원풍모방” “일부 과격근로자들 집단행동” 등의 제목으로 이를 대대적 으로 보도했다. 회사는 고향의 가족들을 동원해 농성 해산을 시도하는 한편 농성장 의 물도 끊었다.
9월30일, 농성이 나흘째로 접어들었다. 다음날은 추석이었다. 계속된 단식으로 노조 원들은 지쳐 있었고, 회사의 엄포를 듣고 달려온 수십명의 가족들이 딸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농성장을 헤맸다. 오후가 되자 회사 밖에 대기중이던 기동경찰이 증원 됐고 회사 안에 들어와 있던 사복경찰과 낯모르는 폭력배들도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 리고 오후 5시 200여명이 각목을 휘두르며 농성장으로 난입해 노조원들을 끌어냈다. 끌려나간 250명의 노조원들은 회사 앞에서 필사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노조원 수 의 몇 배에 이르는 정·사복 경찰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대림동 일대는 차량 통행이 차단됐다. 밤 10시에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고 두 차례에 걸친 폭력해산 과 정에서 200여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이제 농성장에 남은 노조원은 50 여명에 불과했다.
10월1일 새벽 5시, 한가위 달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수백명의 사복경찰들이 마지막 까지 버티고 있던 노조원들을 덮쳤다. 비명과 통곡, 울부짖음…. 경찰의 몽둥이에 쫓 긴 그들은 인적조차 없는 회사 앞 6차선 도로를 맨발로 내달렸다. 도로 위 육교에는 ‘선진조국 창조’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원풍모방의 최후를 두고 노동계 인사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70년대 민주노조 운동 의 마지막 깃발이 내리는구나!”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그들이 깨 진 바로 그 자리에서, 더 넓고 더 강한 80년대 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 없다/한맺힌 우리의 가슴들은/땅끝까지 퍼져나갈 희망이 되 어/꺾여도 짓밟혀도 죽을 수 없다/고귀한 생명의 뿌리를 뻗기 위해/흩어져 서 있는 자리 자리마다에서/힘차게 피어날 의지가 되어야 한다.”(원풍모방 노조원 장남수, ‘9·27 2주년에’)
경향신문 2004-03-14 18: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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