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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쓰는 하노이 기행문
1996년 12월 22일부터 29일까지 7박 8일 동안 베트남 하노이와 하롱베이에 다녀왔다. 다녀온 뒤에 기행문을 쓴다 해놓고 지금까지 시작하지 못했다. 짐을 정리하다가 그때 남긴 메모와 자료를 바탕으로 늦게나마 기록을 남긴다. 아무리 늦어도 기록으로 남기는 게 필요하다. 실로 11년 만에 쓰는 베트남 기행문이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을 9년 만에 썼다.
영영 사라져 버린 기억은 되살릴 방법이 없지만, 여러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기행문을 완성해볼까 한다.
나는 1994년 4월부터 피시통신 천리안에 문화유산답사동호회 <우리얼>을 만들어 국내 답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문화유산 답사를 통한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는 목표로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다. 우리 문화 유산은 대부분 불교의 영향을 만들어진 유형 문화재를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유적과 유물을 찾아다니면서 좀더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과연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문화 유산은 우리 민족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어느 나라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게다가 고등학교에서 한국 지리와 세계 지리, 세계사를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이 실제로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점점 깊어갔다. 그래서 직접 가보기로 했다. 1994년 여름 처음으로 일본 여행을 떠났고, 두 번째 해외 여행 목적지가 베트남이 되었다. 동창과 후배가 하노이에 살고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1996년 12월 22일 15:00 인천에서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으로 출발하는 베트남에어라인 항공료는 588,000 원이고 비자는 70,000 원이 들었다. 귀국 편은 12월 29일 08:00. 포항의 여행사를 통하여 항공권 예매와 비자 대행을 했기에 조금 비싼 비용을 치렀을 것이다. 지금은 보름간 무비자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지만, 이 때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베트남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얻어야 했다. 나처럼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 여행사를 통해 대행해야 하므로 비자 4만 원 외에 1인당 3만 원 정도의 별도 수수료를 지불하였다.
내가 베트남 여행을 떠나면서 다음 내용을 여행 주제로 삼았다.
1. 하노이의 역사
2. 베트남의 역사 및 문화
3. 베트남의 교육 제도 및 학생들(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의 생활
4. 베트남의 소수 민족
5. 베트남의 자연 및 인문 지리(지형, 기후, 식생, 인구, 도시, 경제, 남북 베트남 통일 후 문제점)
6.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하노이에서 방문할 곳을 정해보았다. 호치민 묘, 호치민 박물관, 역사 박물관, 군사 박물관, 동쑤언 시장, 베트남 일반 가정, 장례식 또는 결혼식, 민속 놀이, 베트남 음악, 수상 인형극 등이다.
하루 전인 21일 토요일 포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김포까지 갔다. 서울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시 김포에서 국제선을 이용하였다. 인천공항이 완공되기 전이었다. 포항에서 김포까지 항공요금 32,500 원이었다. 당시 교사는 10% 할인이 되어 나는 29,550 원. 국내선 공항세 3,000 원을 별도로 냈다. 서울 지하철 요금은 400 원이었고, 국제선 공항세가 9,000 원 들었다. 2007년 12월 24일 현재 포항-김포 항공권은 58,400 원이고, 공항 이용료는 4,000, 지하철 기본요금은 900원이다. 물가는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우리가 들고 간 책은 김재민의 <한국사람 베트남가기(1994)>였다. 그전에 일본 갈 때 <한국사람 일본가기>를 가지고 갔었다. 피씨통신 여러 게시판에서 베트남 관련 자료를 뽑은 프린터물도 챙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베트남에 대한 기록은 아주 빈약하다.
1996년 12월 22일(일) 첫째 날
늦은 아침을 먹고 김포 공항으로 갔다. 표를 받고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한다. 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도 모르고 있어 여권을 보고 찾아주었다. 비행기에 탈 때 한 할머니는 이게 "베트콩"으로 가는 건가 물어본다. 대부분 한국 사람에겐 '베트남'이나 '베트콩'이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20B와 20C 좌석을 배정받았다. 분홍색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승무원들이 물수건을 나누어준다. 날씬한 몸매의 남국 미인들에게 눈이 자꾸 간다. 한국 여성에 비해 순진하고 천진스러운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베트콩’의 나라로 가는데 미인들에게 홀려서 될지 모르겠다.
출발 시간을 이십여 분 넘겨서 비행기는 천천히 움직이며 활주로로 간다. 하지만 김포 공항 이륙장은 체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칼(KAL), 자스(JAS), 아시아나 등을 따라 줄을 서 있다가 세 시 오십 분에 겨우 한국 땅을 떠날 수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깼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니 중국 대륙의 산과 강이 보인다. 서편에는 빨갛게 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기내에서 나누어주는 와인과 위스키에 약간 정신이 흐릿해진다.
작은 창 밑으로 내려단 하노이 상공은 어두운 편이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어두운 도시였다. 아마 평양도 밤에 도착하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노이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 여덟 시 삼십 분이었다.
노이바이 공항, 무척 긴장이 된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깃발, 붉은 바탕에 노란 별을 보는 순간, 아! 공산주의 국가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인민군복처럼 생긴 복장을 입은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의 무표정한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했다. 사실 입국 수속이 무척 더디게 진행되었다. 비행기가 늦게 도착한 데가, 탑승할 때 맡겨둔 맥가이버 칼을 찾지 못해 지체되었다. 요즘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지만, 해외여행 경험이 부족한 우리는 맥가이버 칼을 가방에 들고 가다 걸린 것이다. 어렵사리 칼도 찾고 김포 공항에서 누군가 부탁한 짐을 하나 들고 나왔다. 요즘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누가 부탁해도 거절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작은 짐을 대신 들고 갔었다.
봉고차를 몰고 나온 마중 고등학교 동창은 한 시간 삼십 분이나 기다렸다고 투덜댄다. 한복에 배낭을 메고 나타난 나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가족들은 오늘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하러 갔다고 한다. 그는 베트남과 LG가 합작하여 만든 전화교환기 생산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노이에는 대우에 근무하는 대학 후배가 또 한 명 있다. 공중전화를 걸려면 신청하고 해야 한다고 해서 후배와는 아직 통화를 하지 못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왔다.
친구가 안내하는 아리랑 식당에 들어갔다. 종업원들이 문밖에 줄을 서서 인사를 한다. 식당 규모에 비해 종업원이 무척 많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베트남은 모든 사람을 노동 현장에 배치하기 때문이다. 1994년 일본 도쿄에 갔을 때 노숙자(홈리스)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 일본의 그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업이 제일 큰 문제다. 요즘 우리 나라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하고, 비정규직이 늘어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은 국가가 할 일 중에 아주 큰 일에 속한다.
2층으로 올라가 곱창 전골을 먹었다. 한국 식당이라 한국식으로 옥수수차가 나온다. 진로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우리가 식사를 할 동안 종업원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음식을 덜어주거나 잔심부름을 해준다. 당시 한국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수저싸개도 한국제품이다. 그런데 성냥과 재떨이가 아주 조잡하다. 친구는 베트남에 대하여 여러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 나라 사람이 서독에 가서는 눈물을 흘렸고, 베트남에서는 피를 흘리고, 중동에서는 땀을 흘려 외화 획득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동창은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식사 때 문을 닫아놓아서 그런지 실내가 후덥지근하다.
식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혼자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우리가 남긴 음식을 종업원들이 주워 먹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하룻밤 숙박비로 그들이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받는 월급을 쓰고, 한 끼 식사로 그 이상 호사를 부리고 있다.
나도 어릴 적에 무척 배가 고팠다. 하지만 손님이 오면 좋았다.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반찬을 더 만들었다. 밥도 넉넉히 했고, 보리보다 쌀이 더 많이 들어갔다. 그리고 과일과 과자도 준비하기 마련이다. 잔칫날 마냥 우리는 기뻤다. 손님이 오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은 우리 차지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열리는 구역 예배를 무척 기다렸다. 찬송, 설교, 기도가 마치면 간단한 음식을 내놓는다. 어른들이 음식을 먹을 동안 아이들은 옆방에 가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창호지 구멍으로 우리 남매는 손님들이 음식을 얼마나 남기는가를 살펴본다. 이런 사정을 아는 어른들은 대개 과일이나 음식을 남긴다. 하지만 어떨 때 그릇을 깨끗이 비우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남은 음식은 모두 우리 몫이었다. 손님 대접하느라 깎아놓은 사과 껍질도 먹었고, 귤껍질도 먹기도 하였다. 깨끗이 먹는 습관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동태찌개도 오래 끓이면 지느러미만 남고 뼈까지 다 먹는다.
그런데 아까 먹은 곱창전골과 다른 반찬이 좀 남았나 보았다. 그걸 지금 베트남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형제가 많아, 한 번도 새옷을 입어보지 못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60년대, 70년대 청소년기를 거친 현재 중년들은 누구나 그런 가난을 기억한다.
동창 친구가 후엔짱(Huyen Trang Hotel)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항쫑(Hang Trong) 거리 36호에 잡은 호텔 하루 숙박비가 40 달러다. 원래 가격은 100 달러라고 하는데 할인된 가격이다.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방이다. 방은 5 층에 있지만 실제로는 6 층이다. 유럽식이라 그렇다. 엘리베이터가 없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느라 정말 애먹었다.
계단 구석마다 싱싱한 꽃과 열대 식물이 놓여 있고 고급스러운 미술품이 객실에 걸려 있다. 호텔 전체가 은은한 꽃향기가 넘친다. 치자 향내와 비슷하다. 예전의 게스트하우스를 리모델링 하여 호텔로 개조한 듯하다. 싱글 침대가 둘 놓여 있다. 우리에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누가 같이 있어도 되겠다.
세오녀와 결혼을 하고 우리는 신혼여행을 멀리 가지 못했다. 당시 비행기를 타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했는데, 나는 주민등록증을 분실하고 재발급 받지 않아 신분증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 표를 끊지 못하였다. 대구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동생이 부곡 하와이까지 차를 몰고 호텔을 잡아주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다. 다음날 부곡에서 처제가 있는 마산으로 가서 마산역 앞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보통실이 없고 특실만 남아 있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정말로 넓은 방이었다. 더블 침대와 싱글 침대가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처제를 불러서 남아 있는 싱글 침대에 자도록 했다. 너무나 좋은 호텔 방 침대를 비워놓기가 아까웠다.
이 방 안에 텔레비전, 냉장고, 의자도 둘, 옷장과 책상이 놓여 있다. 화장실도 너무도 깨끗하다. 드라이어, 칫솔, 치약도 있고, 온수도 줄줄 흐른다. 게다가 멋있는 욕조까지 설치되어 있다. 깔끔한 나무 침대는 무슨 용도일까? 에어컨도 빵빵하고 금성(Goldstar) 전화기에 텔레비전은 일제 쏘니 제품이다.
10시 30분쯤 객실에서 대학 후배와 통화하였다. 8번을 누르면 시내 통화가 가능하다. 긴 여정에 세오녀는 몸살기가 있는 모양이다.
싱글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각각 모포를 덮고 잠을 잤다. 방안이 너무 고급스러워 잠들고 싶지 않았다. 뜨뜻한 온돌이 아니라 왠지 썰렁하다. 한국에서는 온돌방에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따로 침대에 자려니 영 맞지 않았다. 바깥 소음 때문에 밤새 몇 번이나 잠을 깼다. 그리고 베트남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오녀도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해외 여행 첫날에는 항상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
이후 스무 차례 이상 해외 여행을 하면서 패키지 여행을 빼고 11년 동안 우리가 여행하면서 40 달러 이상 방을 쓴 적은 없다. 지금도 기억나는 화려한 방이었다. 다시 하노이에 가면 한번 찾아가보고 싶다.
* 여행 기간 : 1996년 12월 22일(일)-12월 29(일) 7박 8일
* 여행 장소 : 베트남 하노이-하롱베이
*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부부
* 연오랑의 다른 여행기는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 http://cafe.daum.net/meetangkor 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2009년 다시 하노이에 왔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도착하여 헤매다가 들어간 호텔이 Hoan Kiem Lake Hotel인데, 항쫑(Hang Trong) 거리 29번지. 13년 전에 묵었던 호텔 바로 근처입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예전에 갔던 곳을 찾게 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