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66. 그레고리오 대교황
교황·예수·열 두 제자 함께하는 만찬
‘대교황’ 칭호 받은 그레고리오 교황
교회 음악·미술 발전에 큰 획 그어
발행일2011-03-27 [제2739호, 14면]
▲ 파올로 베로네세,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만찬>, 1572, 477 x 862 cm, 베네치아, 몬테 베리코 성당.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은 위대한(Magnus)이란 의미의 대교황 칭호를 받았는데 역대 교황 중에서 이 칭호를 얻은 교황은 세 분뿐이다.
그는 이미 2명의 교황을 배출한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 조르다노는 원로원 의원이었다. 법학을 공부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일찍부터 당대 최고 지성인의 소양을 갖추었다. 573년에는 로마 시장이 되었는데 이때의 통치 경험은 이후 교황으로서의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573년 부친이 사망하자 물려받은 유산의 대부분을 교회에 봉헌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사업을 했고, 시칠리아에 5개, 로마에 1개의 수도원을 지었으며, 자신이 로마에 지은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들어가서 엄격한 수도자의 길을 갔다.
그레고리오는 578년 교황 베네딕토 1세(575~579)에 의해 부제(diacono)로 임명되었다. 579년 12월 로마가 당시 야만족이라 불리었던 롱고바르도 족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교황 펠라지오 2세(579~590)는 그를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하여 군사적, 경제적 지지를 받아오게 했다.
590년 그레고리오는 로마 시민과 로마 원로원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를 침략한 롱고바르도 족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시켰고, 영국 땅에 자리잡은 이교도인 앵글로색슨 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것도 그였다. 그의 첫 전기가 그가 선교한 땅 영국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교회 음악과 교회 미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성화가 우상숭배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교회 미술을 반대했던 이들에게 그림은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알게 해주는 최상의 매체라며 성화 제작을 지지했는가 하면, 오늘날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불리는 성가를 제정한 것도 이 교황의 업적이다.
모두 854편의 서간문을 비롯하여 <사목지침>, <그레고리오 전례서>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604년 3월 12일 75세의 생을 끝으로 로마에서 영면했다.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이 그림은 그레고리오 교황이 자신의 저택에서 12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식사를 베풀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의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 교황이고, 그 옆의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예수님이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자신의 식사에 초대된 가난한 이들로 그린 것인데 당시 베네치아의 화려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이 도시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베로네세는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더불어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끌어간 3대 화가의 한 사람인데 특별히 교회 역사상 최초로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심문을 당한 화가로 유명하다.
사건의 발단은 1572년에 그린 <최후의 만찬>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난장이를 비롯한 당대인들과 개 등을 등장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작품의 제목을 <최후의 만찬>에서 <레위 집에서의 만찬>으로 바꾸는 기지를 발휘했다. 예술가의 자율성과 교회의 입장이 충돌한 첫 사건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서슬 퍼렇던 종교 재판소조차도 작품 제목을 바꾼 것을 용납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했다. 최고의 예술은 정치적 목적을 초월하여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역사는 말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