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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운영해 온 이유는 브렉시트와 관련 보다 더 정확하고 심층적인 정보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제가 개인적으로 연구하던 것들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분들과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요. 전문적 지식을 갖춘 네이버 블로그의 여러 이웃분들 덕분에 이제 어느 정도 제 정리에 확신이 생긴 참입니다. 또 이제 브렉시트는 앞으로 정말 큰 '이변'이 없는 한 엔드게임으로 흘러갈 겁니다. 그러므로 굳이 브렉시트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참입니다. 더불어 앞으로는 브렉시트 그 자체보다는 브렉시트 이후 유럽, 영국, 유라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정치적이고 미래적인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내노라 하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빈번히 빗나가는 요즘 시대는 우리 같은 '매니아'들에게는 일종의 축복입니다. 누구라도 큰 부담이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 있으니까요. 브렉시트에 대해 포스팅을 하고, 제 주된 관심사가 영국 정치와 영국 경제라고 말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듣습니다. "대체 영국은 왜 브렉시트를 한 거죠?" 아주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이지만, 그만큼 브렉시트와 관련해 가장 많은 오해가 얽혀든 주제이기도 합니다. "대량 이민 때문이다", "인종주의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포퓰리즘 때문이다", "보호 무역 때문이다", "자유 무역 때문이다", "EU 규제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정말정말 사랑하는, "러시아가 해킹을 했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저도 이 주제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포스트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쓰기 애매하더라구요. 그래서 포스트 야마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불현듯 이 질문은 애초에 부적절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체 영국은 왜 브렉시트를 결정한 걸까?" 이것은 마치, 영국에게 'EU 잔류'와 'EU 탈퇴'라는 옵션이 주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영국에게도, EU에게도 애초에 선택권은 없습니다. 영국은 EU를 탈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EU는 영국을(미래에는 비유로존 유럽 연합 국가들을) 탈퇴시켜야만 합니다. 그게 이번 포스팅의 주제입니다. "영국은 왜 노딜 브렉시트를 해야만 하는가?" 1. 검은 수요일 모든 것은 1992년 9월 16일, 이른바 영국의 '검은 수요일'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 시절이었던 영국은 ERM(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유로화가 만들어지기 전, 유럽 공동체(유럽 연합의 전신)는 ECU(European Currency Unit, 유럽 통화 단위)라는 기구를 통해 환율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ECU는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 소속된 회원국의 통화의 평균값으로 환율을 맞췄지요. 따라서 ECU의 통제하에서는 ERM 회원국들의 환율 변동폭이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이 수준을 벗어나면 각국 중앙 은행들이 개입해서 자기네 통화 변동폭을 제어해야 했지요. 검은 수요일 자체는 이제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되자 ERM에 소속된 국가들이 변동폭 유지를 위해 금리를 올렸고, 이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하자 다른 나라들이 못살겠다며 마르크화와의 연동을 폐기합니다. 당시 영국 중앙 은행인 영란 은행은 환율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지 소로스를 필두로 헤지펀드들이 가담해 파운드화를 대폭 투매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파운드가 영란 은행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하락했습니다. 영란 은행은 더는 금리를 올려 환율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ERM을 탈퇴하고, 지금의 변동 환율제로 돌아옵니다. 파운드에 대한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그 가치가 자동으로 조정되는 지금의 아름다운 시스템입니다. 영국은 ERM에서 탈퇴한 뒤, 당연히 ERM의 궁극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유로화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영국은 유로존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유럽 금융 위기 2010-2012년, 유로존은 전례 없는 금융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국가 부채 위기는 곧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으로 번지면서 금융 시장에 거대한 불안을 가져옵니다. ECB는 이들이 무너지도록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오 '괴물' 드라기 ECB(유럽 중앙 은행) 총재는 그 유명한 명언 "유로화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말로 뭐든지 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독일 최대의 은행 도이체방크는 자사 투자 은행의 스캔들, 부채 전환형 자산(liabilities) 비율, 너무 낮은 수익률, 그로 인해 떨어지는 주가, 즉 파생상품 관련 리스크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문제는 도이체방크가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데 현재 그게 안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도이체방크가 살아남으려면, 독일 정부에게서 대대적인 금융 지원 패키지를 받거나 혹은 좀 더 급진적인 정책으로, '국유화'되는 방법 정도밖에 없습니다. 도이체방크가 왜 중요할까요? 도이체방크는 독일 최대의 소매 은행이며, 유로존 전체에 거대한 소매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은행입니다. 이 은행의 몰락은 유로존 전체에 거대한 금융 쇼크웨이브를 안겨줄 겁니다. 그런데 왜 도이체방크가 이렇게 된 걸까요? (앞서 마리오 '괴물' 드라기 씨를 기억하시나요?) ECB는 현재 예금 금리를 무려 -0.4%까지 내린 상황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만약 여러분이 은행에 계좌를 만들어 거기에 돈을 집어넣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이션에 의해 자동으로 줄어드는 가치를 제외하고) 점점 돈이 깎여나간다는 겁니다. 그 유명한 "네거티브 금리"입니다. 왜 ECB가 이런 선택을 한 걸까요? ECB는 유럽 시민들의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습니다. 마리오 '괴물' 드라기는 유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사유 재산을 소유한 사람의 선택권을 간접적으로 침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ECB가 이런 처방을 했음에도 유로존은 여전히 수출 의존적이며, 전체 GDP에서 내수 소비가 차지하는 양은 지난 수 년 동안 큰 변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집니다. 바로 예금 금리가 마이너스, 일반 금리가 제로에 맞춰짐에 따라 유로존에 위치한 소매 금융사들, 특히 대출 은행들의 수익률이 현저히 낮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덕분에 유로존의 대형 은행들에서 하나, 둘, 부채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알람벨을 가장 크게 울리고 있는 은행은 도이체방크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소시에테 제네랄도, 그리고 '시한폭탄' 이탈리아 은행들도 위기에 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마리오 '괴물' 드라기에 이어 새롭게 취임한 ECB 총재 크리스틴. 프랑스 재무 장관 시절 거액의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으나, ECB 총재로 임명됨에 따라 취임 기간 동안 면책권을 얻었고, 어쨌든 금융 전문가 출신은 아니지만 상관들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 라가르드는 다시 한 번 유로화를 살리기 위해 "어떤 선택이든"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로존의 대출 은행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상관없이 ECB는 언제라도 기쁘게 금리를 내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0.5%는 어떻습니까? -0.75%는? -1.0%는? 만약 그게 용납된다면 -2.0% 금리가 안 될 이유도 없겠지요! (이탈리아 은행들의 악성 대출에 노출된 EU 각국 은행들) (ECB가 금리를 더 낮출 경우 예상되는 유로존 은행 수익률 타격) (국채 수익률이 -0.7%로 내려간 독일 10년물) 아시다시피 국채는 그 나라 안전 자산 중에서도 최후의 보루입니다. 당신은 당신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 나라 기업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 나라 은행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 나라 통화 기반 자산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집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남은 것은 정부입니다. 어쨌든 정부는 최후의 최후까지는 살아있을 테고, 그럼 당신이 가진 돈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 정부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되는 방법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국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내려간, 즉 국채 투자자들이 손해를 보는 현 상황에서조차 사람들이 국채에 투자하고 있다는 겁니다. 조금씩 가치가 깎이는 안전 자산이 그 나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실체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이건 광기입니다. 4. How did we get here?! 그런데, 우리는 브렉시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노딜 브렉시트에 대해서요. 그런데 왜 갑자기 유로존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유로존 위기는 브렉시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봅시다. 유로존이 두 번째 금융 위기를 목도하고 있는 참이라면,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유로존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정답: 유로존은 금융 안정성을 높여야 합니다. 유로존 국가들은 서로 다른 경제 사이클을 가졌고, 서로 다른 화폐를 보유했으며, 산업 경쟁력 수준도 제각각이었고, 문화도 달랐고, 경제를 운용하는 관행마저도 판이하게 달랐던 여러 나라들을 강제로 하나로 묶은 통화 연방입니다. 따라서 그 금융 시장은 이렇게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금리만 봐도 그래요. 모든 나라는 제각기 상황에 맞추어 거시 경제 정책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과 스페인의 상황이 다른데 어떻게 두 나라에 '똑같은' 금리를 집행합니까? 유로화 자산도 그렇습니다. 유로존은 유로를 사용하는 각 국가들이 범유럽 차원에서 유로화 결제를 원활히 하기 위해 TARGET2 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정작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대규모 자본 유출이 일어날 때, 스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놓지 않아 스프레드가 태평양처럼 벌어진 상태입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EU의 롤모델인 미국을 봅시다. 미국은 서로 다른 경제 사이클을 가졌던, 서로 언어도 인종도 달랐던 50여 개 나라가 뭉쳐져 만들어진 연방국입니다. 그들은 달러라는 통화를 쓰는 통화 연방입니다. 그들은 단일 시장(Single Market)과 관세 동맹(Custom Union)으로 묶인 공동 시장(Common Market)입니다. 각 주들은 서로 국경이 다르지만, 미국 시민들은 각 주를 대체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달러 결제 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통화 결제 체계이며, 유로존의 TARGET2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안정적이고 탄탄합니다. 미국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침을 겪는 주의 달러 자산이 다른 주의 은행으로 홀라당 날아가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한 주가 경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폭등하면 그 주의 노동자들이 다른 주로 자리를 옮겨갔다가 나중에 상황이 나아졌을 때 다시 돌아옵니다. 미국은 EU가 의도했던, 그러나 EU가 총체적으로 실패했던 모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훌륭한 연방 국가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미국은 강력한 선출 중앙 정부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5. EU의 문제 드디어 이 주제까지 왔습니다. 미국에게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 은행이 있습니다. 덕분에 서로 다른 경제 사이클과 문화를 갖춘 여러 주들이 한 국가로 묶일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수십 개의 다양한 기관이 있습니다. 그들 중 EU를 대표하는 5개 기관, 즉 EU 집행 위원회(EUCO), 유럽 사법 재판소(ECJ), 유럽 의회(EP), 유럽 이사회(EC), 유럽 중앙 은행(ECB)을 'EU의 다섯 기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기관에서 위임된 위원장(President)을 두고 'EU의 다섯 위원장(EU's Five Presidents)'이라고 부르지요. 이들이 제각각 권한을 위임해 가지고 있고, 이들이 EU를 대변합니다. EU의 권한, EU의 의무, EU의 각종 조약과 규제 등은 이 여러 기관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직접 유럽 시민에 의해 선출되는 곳은 유럽 의회, 즉 EP뿐입니다. 하지만 유럽 의회도 제대로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의사 결정 권한은 없습니다. 유럽 의회는 집행 위원회(행정부)가 발의한 법안에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에 대한 권한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유럽 의회에 올라가는 의원(Member of European Parliament)들도 실제 투표 계산법은 복잡하기 짝이 없으며,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 정당들이 서로 연립한 형태로 있기 때문에 제대로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의회는 태생적으로 '정체된 선출 기관'이고, 정체된 선출 기관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의나 정치적 의사 결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정치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바로 22,000명 이상의 관료들과 EU의 고위 인사의 비밀 추천을 받아 뽑히는 집행 위원장입니다. 집행 위원장이 바로 EU의 진정한 실세입니다. EU 공동 시장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맡고 있고, 새로운 규제안을 만드는 일도 담당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은 선출 권력이 아닙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가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기관의 수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우선 반민주적이고 비도덕적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겠다면... 이 사람은 최근까지 집행 위원장을 맡았던 '장 클로드 융커'입니다. 한때 룩셈부르크 총리를 지낸 인물이며, 당시 룩셈부르크 스파이들을 동원해 라이벌 정치인들을 사찰한 혐의로 조사받던 인물입니다. 2014년 극적으로 EU 집행 위원장으로 발탁되면서 면책 특권을 얻어 혐의가 무마됐습니다. 이 사람은 새로운 집행 위원장으로 위임된 '우르술라 본데어라이엔'입니다. 메르켈이 몸담고 있는 독일 기민당 출신 정치인으로 독일 국방 장관 출신입니다. 그가 장관을 맡던 시절 독일군의 명성이 땅에 추락했지요. 그리고 물론 다양한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실로, EU는 부패하고 무능한 조직입니다. 그건 유럽 대륙에서 그다지 새로운 사실도 아닙니다. 그들의 최고 사령관부터 이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EU가 얼마나 사악한 기관이냐"에 대한 게 아닙니다. 저는 영국인들의 브렉시트를 부추긴 원인 중에는 장 클로드 융커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전체 유권자 비율 중 극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겁니다: 왜 EU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의 가장 높은 위치를 이토록 무능력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 차지하게 될까요? EU 집행 위원장은 '위임직'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특징은 국가에게서 민주적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 리더가 된다는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적 위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는 우리에게 어필하려고 갖은 공약을 연구하고, 치열하게 캠페인을 벌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끔 잘못된 리더를 뽑을 수도 있습니다. 국민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후보 중 누구를 뽑을지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자신의 시각으로 뚫어보고, 나름대로 검증하고, 토론을 거치고, 마음을 굳히고, 그리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합니다. 총선, 혹은 대선 끝에 우리는 우리의 리더를 선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승리했든, 패배했든, 우리의 리더에게 임무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는 우리를 대변해 우리 국가를 이끌 겁니다. 적어도 4~5년은요.(탄핵시키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구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무을 부여받음으로써 선출된 지도자는 국민을 두려워할 겁니다. 만약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징벌을 가합니다. 그러나 위임직은 다릅니다. EU에는 '세 사람의 대화(Trialogue)'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시나요? EU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밀실입니다. 권력자들이 트라이얼로그를 요청하면, 최소 3명이 모여 'Formal Trialogue Room'이라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절대 비밀이 보장되는 방이고, 여기서 이들은 은밀한 거래를 합니다. 꼭 뮤지컬 '해밀턴'에 나오는 가사 같지요. No one really knows how the game is played,(아무도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른다네) The art of trade(거래의 기술) How the sausage gets made(그리고 소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지) We just assume that it happens(우린 단지 일어나고 있다고 추정만 할 뿐이야) But no one else is in the room where it happens(하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브뤼셀의 야경. '트라이얼로그 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태의 방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진도 거의 없고, 그 사진이 진짜 트라이얼로그 룸일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만약 EU 권력자들이 트라이얼로그를 시작했다면, 보통 브뤼셀에 거주하는 기자(중에서도 EU 고위 정치인들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들이 루머의 형태로 흘릴 뿐입니다. 따라서 몇 번의 트라이얼로그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는 것도 사실 불가능합니다. 몇몇 싱크탱크들은 EU가 어떤 법령을 통과시키거나, 중요한 EU 인사를 위임하는데 동의하기 위해 몇 번이나 트라이얼로그를 신청했는지 각종 소스를 동원해 추산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조차도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트라이얼로그는 EU 입법 과정의 주요 엔진입니다. 보통 집행 위원장이 이 밀실 회담을 통해 결정됩니다. 장 클로드 융커는 메르켈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밀실 회담 끝에 선택한 인물입니다. 어째서냐구요? 융커는 '유럽 연방주의자'입니다. 그가 뽑혔던 2014년, EU는 대대적인 개혁을 두고 크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유럽 연합을 보다 느슨한 연방으로 만들자는 영국의 '유로 회의주의자' 그룹과 유럽 연합을 더욱 강력한 연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럽 연방주의자'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지요. 연방주의가 밀릴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자 사르코지와 메르켈은 융커를 위원장 자리에 앉힘으로써 회의주의자들의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결국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융커는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라며 크게 반발했고, 이 시점부터 영국의 브렉시트 논쟁이 최초로 시작됩니다. 본데어라이엔은? 그는 그냥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메르켈 충성파였기 때문에 메르켈이나 마크롱 같은 인물이 잘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뽑힌 겁니다. 이걸 어떻게 아냐구요? EU 집행 위원장을 뽑을 때는 암묵적인 룰이 있습니다. 바로 'Spitzenkandidat'입니다. 이것은 위원장으로 뽑힐 인물은 반드시 유럽 정치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집행 위원장은 각 EU 회원국 지도자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그들 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자리에 유명세없는 듣보잡이 앉혀지면 당연히 휘둘리게 됩니다. 본데어라이엔이 뽑힌 이유는 현재 EU가 너무 깊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U에는 프랑스-독일 연맹이 있고, 영국이 나간 뒤 '유로회의주의자'의 빈자리를 채운 네덜란드를 위시한 'NEW 한자 동맹'이 있으며, 동유럽과 오스트리아가 결성한 '비셰그라드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유럽 연합의 주도권을 두고 싸우고 있고, 메르켈과 마크롱은 프랑스-독일 연맹을 지키기 위해 메르켈의 측근이었고, 유럽 정치에서 듣보잡인 본데어라이언을 위임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위임직의 문제입니다. 위임직은 선출직보다 너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임직은 권한을 갖추지 못합니다. 때문에 위임직 위원장이 사령탑에 앉아 있는 한, EU는 어떤 진지한 개혁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유럽 의회에서 열린 EU 집행 위원장 선거 투표 용지. '투표 용지'이지만 후보가 단 한 명(우르술라 본 데어 라이엔)밖에 없는 게 인상적이지요. 하지만 유럽 의회에서 이런 형태의 '투표'는 매우 일상적입니다. (이 사진은 영국 브렉시트당의 MEP가 찍어 트위터에 공유한 겁니다.) 6. 유럽 합중국 이제 이 이야기의 최후반부에 들어섰습니다. 제목을 보고 놀라셨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유럽 합중국'입니다. 제 블로그를 오래 전부터 봐 오셨던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저는 EU가 과거 영국이 주장하던 것처럼 '느슨한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유럽 2차 금융 위기와 브렉시트 협상의 전개 과정을 보고 마음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저는 유럽의 보다 완전한 연방화와 더불어 영국이 노딜 브렉시트를 통해 EU와 깔끔하게 분리하지 않으면 유럽 대륙엔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 이 사안을 이해시키기 위해 5번을 길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행 위원장은 왜 위임직일까요? 그것은 각 회원국들의 이권을 투사하려면 집행 위원회가 각 회원국보다는 '약한 상태'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집행 위원회는 각 회원국의 공동 시장과 관련된 규제를 담당할 만큼 강합니다. 그 규제안을 직접 작성하고 유럽 의회가 승낙하게끔 넘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 규제들이 반드시 회원국들에게 일관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그저 관료 기관일 뿐이니 당연합니다) 회원국들은 비토를 할 수 있거든요. 심지어 집행 위원장은 힘 있는 인물들의 밀실 회담을 통해 '연줄'로 결정되기 때문에, 각 회원국 이해 관계에도 노골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집행 위원회를 'EU를 제어할 수 있을 만큼은 강하지만 EU에 어떤 중대한 개혁을 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은 상태'로 만들어 두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집행 위원회가 현재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EU를 분리도, 통합도 아닌 현재 상태 그대로 고정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EU는 더 이상 현상 유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유럽에 절멸적인 위기가 닥쳐오는 현재, 유럽은 선출된 대통령(President)을 가진 강력한 연방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집행 위원회는 EU 행정부로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행 위원장 선거에는 유럽 의회에 있는 각 당의 후보들만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집행 위원장은 EU와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강도 개혁을 단행해야 합니다. EU에는 미쳐버린 TARGET2 시스템에 안전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고강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못하고 있습니다. EU에는 EU 각 지역의 은행에서 위기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유럽 중앙 은행(ECB) 단위에서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 금융 기구를 두어야 합니다. 역시 독일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EU에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통합 재무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출된 대통령이 EU 재무 장관을 임명해야 합니다. 영국처럼 이런 중대한 기관에 임명될 수 있는 인물은 의회에서 선출된 의원이어야만 한다는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을 수입하면 훨씬 이상적일 겁니다. 그러나 독일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못하고 있습니다. EU에는 EU 차원의 국채가 필요합니다. 이탈리아의 포퓰리스트들처럼, 유로존 안에 있으면서 미니봇 같은 것을 만들어 유로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붕괴시키겠다는 망상가들이 나오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EU 집행 위원회는 유로존의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금융 시장에 제대로 된 안전 및 제어 기구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로존은, 완전한 '통합 시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메르켈, 마크롱처럼 유럽 연합 내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확장하려는 리더들의 욕망과 영향력을 차단해야 합니다. 각 회원국의 이권을 넘어 정말로 유럽 국민을 섬기는, 유럽 국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강력한 선출직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집행 위원장은 이들 각 회원국 지도자를 훨씬 능가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EU 회원국들의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로 격하되고, 집행 위원회는 진정한 '초국가 연방의 중앙 정부'로 승천해야 합니다. 앞으로 EU는 이 모든 개혁을 적어도 2025년 안에 마쳐야 합니다. 솔직히 저는 현상황에서 2025년도 너무 관대한 타임 테이블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번 융커 시절 다섯 위원장 리포트에서는 2027년 안에 마치겠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만, 폰데어라이엔이 위임된 이상 그런 고강도 개혁이 진행될 가능성은 현시점에서는 거의 희박합니다. 불행하게도요. 어쨌든 개혁 사항을 짧게 요약하자면: EU는 각 국가의 세금 권한을 크게 축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중앙 정부 역할을 해야 합니다. EU 위원장은 EU 대통령이 되어야 하며, EU 회원국들, EFTA 회원국들, EEA 회원국들 모두 의무적으로 자국 화폐를 유로화로 바꾸고 솅겐 조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완전히 한 나라로 통합된 금융 시스템 안에서 다른 통화를 쓰는 나라들이 마치 통합 경제 구역처럼 발을 들여놓고 있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FTA, EEA 등 EU와 간접적으로 조약을 맺어 EU 공동 시장에 접근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도 절대로 예외없이 유로화를 사용하고 솅겐 조약에 가입해야 합니다. 이걸 해낸다면 EU는 크게 안정될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되겠지요. 운이 좋다면 EU는 유라시아 대륙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초강대국 중 하나로 떠오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걸 하지 못하면 EU의 금융 시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불안정할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그래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EU 안에서 이득을 본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EU는 사라지고 회원국들은 개별 국가로 돌아오면 됩니다. 7. 회원국들의 선택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EU는 단순히 EU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EU 안에 무수히 많은 미니 조약들이 있고, 각 회원국은 이것을 통해 EU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노딜 브렉시트가 중요한 이유가 나옵니다. EU와 여러 층위에서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많습니다. EFTA에 있는 국가도, EEA에 있는 국가도, 스위스처럼 120여 개의 쌍방 조약을 맺은 국가도 있지요. 하지만 유럽 연합 유럽 합중국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따라서 EU의 공동 시장에 소속된 국가들을 유로화를 도입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럽 공동 시장에서 크게 불이익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EU는 계속 이렇게 불안정한 좀비 경제 상태로 놓여 있다가 결국 엎어질 겁니다. 그럼 이런 선택에 놓여있을 때, 각 회원국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선택이란 걸 할 수 있을까요? EU가 강제적으로 이런 거대한 개혁을 요구받을 때가 오면, 그때는 정말 끔찍한 위기 상황일 겁니다. 국내 정치도 국제 정치도 엄청난 혼란기일 테고, 경제적으로도 쇠약한 상태겠지요. 과연 그런 상태에서 각 주체들이 제대로 된 협상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제가 완전한 노딜 브렉시트, 그것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기운 이유입니다. 애초에 영국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서 탈퇴하고, 유로화를 도입하지 않았던 그 순간부터 영국은 '유럽 합중국 프로젝트'와 연이 끊어진 겁니다. 게다가 영국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자신들의 주권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영국은 유럽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또 애초부터 영국은 자신들을 '(지리학적) 유럽 국가'이긴 하지만, (지정학적) 유럽 국가'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더 먼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국은 얄팍한 조약을 통해 한 발만 EU에 걸친 상태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스위스와 EU 쌍방 협정이 파국을 맞이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EU가 유럽 합중국이 되면 또다시 브렉시트 문제가 영국에게 돌아올 테니까요. 브렉시트를 연기할 여유도 없습니다. 영국은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에서 유로 회의주의가 자리잡은,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정치 지형을 갖춘 국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EU 탈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될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유럽 합중국에 융화되느냐, 혹은 당당히 독립하느냐"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영국은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됩니다. 만약 지금 탈퇴하지 않으면, 지금 '최대한 깔끔하고 완전한 브렉시트'를 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전 유럽 대륙이 혼란 속에서 자맥질할 때 강제로 내쫓길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브렉시트는, 정말로 큰 비극일 겁니다. 한편, EU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다른 회원국들이나, 유로존이지만 여전히 EU에 대한 의견이 갈팡질팡인 회원국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들은 10~15년 후에 끔찍하게 어려운 선택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이 미래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행운을 손에 넣는 것은 아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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