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4호선
동래부 동헌
동래구청
동래향교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한 지방학교로 종6품 교수1명이 학생70명을 가르치던 곳
태평원 시비(太平園 詩碑)
태평교 다리 아래 태평원에는
정원의 풀과 꽃이 날로 무성해 지네
돌 위엔 큰 글자 셋 새로이 새기었고
길가에선 한 지방 애기 많이도 듣는다네.
멀리 가는 수레도 변방이 괴롭지 않으니
농사꾼도 모두 임금의 은혜를 아네.
촌 늙은이 살펴보니 머리는 눈 같은데
느릅나무 우거진 곳에서 손자 아이와 유희하네.
태평원 안의 만년대에는
도후부사 외영(外營)을 물가에 열었네.
경치 좋은 곳에 아지랑이와 안개 쉽게 거느리고
언덕 둘러 꽃나무도 손수 새로 심었네.
⇒ 1867년(고종4)부터 7년간 동래부사를 역임한 정현덕*의 시비로 동래 칠산동 동래유치원 안에 있다.
* 정현덕(鄭顯德) 본관은 초계(草溪).자는 백순(伯純),호는 우전(雨田).1850년(철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862년 부사과로 되었으며, 고종초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형순(徐衡淳)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인물로서 동래부사가 되어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신정부(明治新政府)의 국교재개 교섭을 서계문제(書契問題)를 이유로 끝내 거부하였다. 일본과의 암거래를 하는 무리를 엄중단속하여 박승달(朴承達)을 외화 소지혐의로 참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뒤에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척족정권에 의하여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1882년(고종19)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다시 파면되어 원악도(遠惡島)로 유배된 뒤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동래 부사 재임 중에 동래의 인정과 경치를 노래한 시「봉래별곡(蓬萊別曲)」이 전한다.1872년(고종 9) 국청사의 승려 명신평윤이 경내에 정현덕 부사 영세 불망비[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 25-1]를 세웠고,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정현덕 부사 흥학비가 동래구 명륜동 221번지에 남아 있다. 태평원 시비(太平園詩碑)와 금강원 시비(金剛園詩碑)[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0-12 금강공원] 도 남아있다. 2002년 부산광역시에서 선정한‘부산을 빛낸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내성축성비(萊城築城碑)
1751년(영조7)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해 1735년 건립한 비로 경상도 65군에서 52,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둘레 1.4㎞, 높이 3.9m이었던 것을 둘레 3.8㎞, 높이 5.1m로 확장 축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의(簡儀)
간의는 행성과 별의 위치 시간의 측정은 물론 고도와 방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대표적 천체측정기기다. 처음에 나무로 만든 것을 1434년(세종16)청동으로 제작하였고, 간의는 혼천의를 간략히 만든 천문기기로 오늘날 적도의식 망원경 시스템과 동일한 기기이다.
청계천 수고를 재던 수표
동래부사 유심(柳沈)의 전생 이야기
1649년부터 3년간 동래부사를 지낸 유심이 전생의 어머니를 동래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로 “동래읍성 서문 근처에 홀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살았는데 어느 날 성대한 동래부사의 행차를 보게 된 어린 아들은 자신도 커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흉내를 내고 다니다가‘너는 상놈이라 꿈에도 될 수 없다’는 어머니 말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 얼마 후에 죽었다. 어머니는 슬피 울다가 잠들었는데 꿈속에 죽은 아들이 나타나‘어머니 울지 마세요 소자는 서울에서 재상인 유씨 집안에 태어나 잘 잘고 있으며 상놈 소리 듣지 않고 벼슬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아들이 죽은 날이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서울의 유심은 생일날이면 꿈에 동래로 가서 제사음식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어른이 된 유심이 동래부사로 오게 되는데 꿈에 보았던 길을 따라 제삿밥을 먹던 집을 찾아가 보니 할머니가 제상을 차려놓고 울고 있어 연유를 물으니 할머니 아들이 죽은 날과 자신이 태어난 날이 같고 죽은 아들이 서울 유씨 집에 태어났다는 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유심은 할머니가 바로 전생의 어머니임을 알고 돈과 음식을 주고 부사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는 땅까지 주어 잘살게 했다고 한다. ⇒ 동래부사 유심의 선정비는 부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데 우리나라 선정비로는 큰편에 속한다.
황령산과 배산
의적 정봉서와 아내 이야기
옛날 동래부에 몹시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정봉서라는 이가 살았는데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힘도 장사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의원을 찾아가 물으니 개 천마리를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여 닥치는 대로 개를 잡게 되었다. 이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큰 도둑이 되었는데 어느 날 동래성내 사람들이 기장 쌍고개 험한 고개를 넘다 도적떼를 만나 잡혀가 떨면서‘우리들은 모두 동래성에 살고 있습니다’고 말하니 두목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부하를 시켜 음식을 대접하고 노자까지 주어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도둑질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깊은 산에 본거지를 두고 도둑의 두목이 된 정봉서는 부잣집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는 의적이었다.
의적으로 백성들 입에 오르내리던 정봉서도 말년에 동래 포졸에게 잡혀 먹을 것을 주지 않자 15일 만에 굶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봉서의 아내가 동헌으로 달려가 하마석을 뽑아 들고는‘이놈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관헌이라고 하지만 너무 하지 않느냐. 내 가장이 비록 도둑이지만 의적인 것을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죽이는 법이 어니 있느냐?’며 고함치면서 동헌 대문을 하마석으로 때려 대문이 박살이 났다고 한다. ⇒ 그 동헌 대문의 기둥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 어느 건물을 짓는데 쓰였다고 하는데...
부산의 3.1 독립운동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들이 자주독립을 온 천하에 선언하자 부산에서도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1 밤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좌천동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 의거는 부산지방 3.1 독립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3.13 동래장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민중이 봉기가 있었으며 3.18과 19일 동래시장 시위에는 범어사의 명성학굥와 지방학림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시위를 벌였다. 3.29 구포장날에는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대규모 군중집회가 경찰 파출소 습격이 있었다.
4.5 기장 장날에 1천여명 궐기하였으며 잇달아 장안면과 일광면 정관면에서도 농민과 장꾼이 합세한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4.10 명지의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이밖에도 부산상업학교, 부산진보통학교, 영도옥성학교 학생들의 구국거사와 의열 청년들의 열차투석, 전차운전자들과 철도직공들의 항일 동맹파업 및 시민들의 항쟁이 5월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산의 독립운동 투쟁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된 인원이 2백명을 넘었고 실형선고를 받은 이가 1백50명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민족투지는 조국독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6.3.1. 이대길 최해군 짓고 조영조 쓰다
청동방울
일본의 하니와(墳輪)
일본에는 고분 주변에 하니와라고 하는 토제품 혹은 목제품을 둘러 세웠는데 3세기 후반 전방후원분과 동시에 나라(奈良)분지에서 출현하여 7세기 초 사라졌다고 한다. 하니와는 나라현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북쪽의 이와테(岩手), 남쪽의 가고시마(鹿見島)까지 분포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호남지역의 옹관고분과 전방후원분에서도 확인되기도 한다. 하니와는 다양한 형상의 인물과 동물, 물건 등으로 만들어 졌다.
박권농과 도둑 이야기
임란 직전 동래에 살았던 박권농은 비천한 몸으로 술 마시는 일이 오직 낙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너무 취해 오늘날 동래역 근처 모래밭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도둑이 몰래 권농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때 순찰하던 순라군이 이 광경을 보고‘박권농이 아니냐 무엇하고 있느냐?’고 소리치자 잠에서 깬 권농이‘이분은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이온데 술에 취한 저를 집까지 업고 가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도둑이 감격한 어조로‘감사하오 당신이 만약 나를 도둑이라고 말했다면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하며 쥐고 있던 돌맹이를 내던지고‘집까지 모셔드리리다’고 하면서 권농을 업고 집으로 갔다.
권농의 집에서 권농이‘나는 자식이 하나뿐이니 아들이 되어 달라’고 하자 도둑은‘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고 하고 돌아간 며칠 뒤 권농을 찾아온 도둑 즉 양아들이 안부를 여쭙고 돈 200량을 만덕고개 어디에 묻어 두었으니 가져와 쓰라고 하여 권농은 그 돈을 가져와 잘 살았다고 한다. 한편 임란 후 동래 명문 서동김씨 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에 보자기를 쓴 듯 껍질이 덥혀서 괴물같이 생긴 노처녀가 있었는데 처녀에게 권농의 아들이 청혼을 하였다고 한다. 결혼식날 신랑은 대(竹)로 칼 모양을 만들어 신부의 몸에 덥혀 있던 껍질을 벗기자 처녀는 놀랍게도 절새미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로 부부사이가 좋았거니와 서동 김씨 세력으로 박권농의 집안이 크게 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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