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청산하여 민족정기 바로잡자 |
|
[한글 살리고 빛내기49] 반민족문제연구소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다 |
나는 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넘었으며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4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말글살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을 넘어 화가 났다. 또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했다. 왜 우리말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가 좋은데 안 할까? 지난날은 중국 눈치를 보고 중국 문화와 유교에 빠져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은 왜 그럴까?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터인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 일본 식민지 국민으로 태어나 그 식민지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이들 때문이었다. 몸은 한국인 피가 흐르지만 정신은 일본인으로 자란 일본 식민지 세대가 정치인, 공무원, 학자, 언론인, 기업인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말글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걸 잘 몰랐는데 한글운동을 하면서 그걸 뚜렷하게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68년 한글날에 전국국어운동학생회 회원들이 덕수궁 세종대왕동상 앞에 모여 한글사랑을 외치기로 했었다. 그런데 우리학교 국문과 후배들이 안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국문과 이병주 교수가 덕수궁 한글운동 모임에 못 가게 학생들을 여주 세종대왕릉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한글운동을 방해한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수업시간에 스스로 이완용 손자라고 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친손자도 아니면서 그랬다. 그리고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이숭녕 교수가 한글전용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는데 그분들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 앞잡이 양성소인 경성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정치인 김종필과 박태준이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데 친일 성향 인물이었다.
조선일보가 한글전용을 강력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도 친일 성향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았던 정재도 선생님 말씀에 1970년대 일본 정부 사람이 신문사 편집국장들에게 식사대접을 한다고 해서 나갔더니 한자혼용을 부탁하는데 그 자리에 한자 혼용파 우두머리격인 남광우 교수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때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이들 뒤에는 일본과 친일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91년 친일파 청산을 하자는 반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청량리 그 사무소로 찾아갔다. 김 소장을 만나보니 내 생각과 같아서 기뻤다. 그도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면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야 하는데 자료 수집과 조사도 힘들지만 그 출판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 소장은 돈이 많은 재벌이나 정부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막막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민중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니 김봉우 소장도 공감하고 “선배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마음이 간절하고 따뜻하고 겸손해서 바로 손을 잡고 후원회 조직을 시작했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20여 년 동안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을 한 경험을 살려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먼저 후원회원을 모집하여 회원들이 뭉치게 하려고 한 달에 한 번씩 산에 가는 모임을 가졌다. 그 때 권중희 선생과 함께 하는 이들도 후원회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들이 그 뒤에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를 잡아 혼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한글학회가 ‘한글 새소식’이라는 회보를 내고 정신무장을 한 것처럼 ‘민족정기’라는 회보를 냈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도를 시작으로 전국에 지회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다.
여름에는 수련회를 열어 회원들이 모여 뜻을 다지고 앞으로 활동 계획도 의논했다. 뜨거운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니 힘이 솟았다. 돈 많은 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이 일을 해내자는 내 벌떼 작전은 성공할 수 있다는 빛이 보였다. 나는 국어운동을 시작할 때에 내 농촌운동 뜻벗들부터 설득하고 함께 한 일이 있는데 전부터 함께 한글운동을 하는 이봉원, 한효석, 김슬옹 들 뜻벗들도 참여해주어 힘이 났다. 김봉우 소장도 자신감을 가지고 반민족연구소라는 이름을 민족문제연구소로 바꾸고 조직을 확장 개편하기로 했다. 한글학회 허웅 회장님도 내 뜻에 공감하고 연구소 고문으로 참여하고 밀어주었다.
연구소 직원들과 연구원들도 내 뜻을 잘 따라주고 밀어주었다. 북쪽은 친일파 청산이 되었는데 남쪽은 그게 안 되어 나라가 일어나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어서 나라일이 꼬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개미떼처럼 줄을 서서 찾아왔다. 그렇게 4년 여 고생 끝에 후원회원이 늘어서 서울은 동부지회, 서부지회 식으로 만들고 경기도부터 수원지회처럼 도시별로 지회를 조직해갔다.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우리 연구소 회원들은 탑골공원에서 우리 주장을 외치고 정부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함께 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그날 한글단체도 “나라 찾은 50년, 한글사랑 나라사랑 민족정기 드높이자.”는 펼침막을 들고 광복절 거리행사에 참여했다.
▲ 종로거리 광복절 행사에 참여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왼쪽)들과 한글단체 회원들(오른쪽) © 리대로
그날 광복절 종로거리 행사 때 서울방송(sbs) 기자가 내게 광복 50돌을 맞이하는 소감을 물어 방송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소리는 온 나라에 퍼지고 내 벌떼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내 뜻대로 잘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연구소 직원들과 연구원들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김봉우 소장이 무언가 신상에 변화가 생겼는지 직원들 모두 사표를 내라고 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절대로 연구소를 떠나면 안 되고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하고 나는 후원회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나 본업인 한글운동에 전념하기 마음먹었다. 내가 너무 앞서가고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뭉치는 것도 모임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일본식 한자혼용을 하자는 자들이 한글과 한글학회를 거세게 짓밟고 있었기에 한글이 연산군 때 다음으로 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원장직은 내 놓고 한글운동에 전념했다. 그 뒤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는 운영위원회로 이름도 바뀌었고, 회보 이름도 ‘민족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대학생 때부터 한글운동을 한 이봉원(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초대 회장)과 여러 뜻벗들이 남아 열심히 활동을 했고 이봉원군은 다음에 운영위원장까지 맡았다. 그리고 연구소 소장도 내 동국대 선배인 한상범 교수님이 맡아 친일인명사전 내는 일을 마무리했다. 모든 일이 처음 시작이 힘든데 연구소를 만든 김봉우 소장이 초창기 연구소 기틀을 잘 다져놨기에 그 뒤 모돈 일이 잘 풀렸다고 본다.
비록 나는 한글이 위기였기에 민족문제연구소 일에 손을 뗐지만 초창기 4년 여 동안 김봉우 소장과 박한용, 김민철 연구원들이 협조를 잘해서 내 벌떼 작전이 잘 시행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자력으로 성장한 모범 시민단체가 된 것을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처음에 나는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민족정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민족개조운동을 해서 이 나라에 뿌리 깊게 박힌 사대주의와 일본 식민지 교육 찌꺼기를 쓸어내고 자주통일과 자주문화를 빛내는 겨레모임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동양평화와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그렇게 자라고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기 바라고 빈다.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8627§ion=sc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