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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오랜만에 가산산성을 찾았습니다. 십 년도 훨씬 지난 듯합니다. 진달래 흐드러진 어느 봄날이었지요.
문학 공부를 하는 몇몇 사람들과 소풍 와서 화전을 붙여 먹던 기억이 납니다. 폐허로 버려졌던 그때의 가산산성과는 달리 지금은 잘 보수되고 정비되어 전혀 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남문의 위용은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한겨울이어서인지 인적 끊긴 산성은 적막강산이었습니다.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카랑카랑한 날씨였습니다.
성벽도, 성벽 위의 햇살도, 해원정사의 목탁소리도, 솔숲 오솔길도, 찬 하늘 나뭇가지도 카랑카랑했습니다.
사람은 가고/성터는 남아/무상함이 이리도 새삼스럽다//무너진 성돌 위에 푸른 이끼/세월이 남기고 간 슬픈 얘기여(황금찬, <접동새>부분)
한 시인의 노래처럼 성을 쌓은 돌 틈 어느 사이에도 세월이 남기고 간 슬픈 얘기들이 카랑카랑 숨어 있을 것이었습니다.
◆ 요새 위에 세워진 유일의 삼중성
가산산성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번지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석축산성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천혜의 요새인 가산(901.6m)에 쌓은 국내 유일의 삼중성(내성, 외성, 중성)으로 된 산성입니다.
인조 18년(1640년) 경상북도 관찰사 이명웅이 내성을 쌓고,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 후인 숙종 26년(1700년) 당시 관찰사 이세재가 외성을 쌓고, 내성과 외성 사이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가 쌓아서 완성된 가산산성은 약 11.041㎞에 이릅니다.
내성은 성벽 둘레가 약 4km. 성곽에는 동, 서, 북문과 8개 암문, 포루 4개소, 장대 1개소가 있었고, 성안에는 우물과 샘 21개소, 4개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외성은 성벽 길이 약 3km에 문루 1곳, 암문 3곳, 군기고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외성을 쌓은 이듬해에는 천주사를 짓고, 이곳에 승창미를 보관했다 합니다.
천주사터에 새로 들어선 절이 지금의 해원정사입니다. 당시 천주사에서는 승려들에게 궁술을 연습시켜 이들로 하여금 성 일부의 수비를 담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중성은 약 460m의 짤막한 성입니다. 한때 이곳 가산산성은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고 종3품 도호부사를 두어 군위, 의흥, 신녕, 하양 등 네 현을 관장하기도 했던 조선시대 국방 최우선 행정의 중심이 된 곳이었습니다.
가산산성의 성벽은 내성, 중성, 외성의 건축 잔존물이 아직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벽에 내었던 문의 흔적도 남문, 동문, 중문 서문 및 암문 15개가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동문과 동암문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산산성 성 내에 천주사지, 보국사지 등의 사찰 터와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지가 조사되었고, 우물 9개소, 못 4개소와 성 내 비석 13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중수기 편액이 남문루에 걸려 있습니다.
약 100여 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축성된 가산산성은 가산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石城)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그야말로 ‘영남 제1관방’이 되었고 1971년 3월 26일 사적 제216호로 지정됩니다.
옛사람들의 역사(役事) 현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가산산성에서도 생사를 걸고 성을 쌓던 당시 민초들의 애환과 고충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습니다. 저 많은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옮겨왔을까요? 운반수단이라야 고작 우마차가 아니면, 등짐지기였겠지요. 망치로 두드려 돌을 깨는 소리는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민초들의 울력을 뒷받침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에 앞서 왕을 섬기는 백성으로서의 도리이거나, 조정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민초들의 체념 어린 숙명의 힘으로 얻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울력에의 동원이 차라리 호구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오기도 합니다.
◆ 성벽 구석구석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
외침을 막던 가산산성 또한 여느 산성과 같이 관광지로 그 역할이 바뀌었고,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대구 시민들의 사랑 받는 등산 코스로 존재 이유가 조정된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벽 구석구석에 살아 있는 역사의 숨결을 잊어서야 어찌 후손될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과거 없는 현재, 현재 없는 미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와의 대화가 소중한 이유이지요. ‘가산산성 자진 아리랑’은 산성의 변모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이 민중들의 애환과 비애의 노래이고 보면 변모 또한 그들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사태로 느껴져 노래를 불렀겠지요.
옛터에 청사는 간곳이 없고/만수야 장림만 우거졌다/아리아리랑 시리시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허무러진 성곽은 중수를 하고/폐허된 사찰은 신축이됐다/아리아리랑 시리시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산곡에 나팔소리 자동차가 오고/창공에 우레소리 비행기가 떴다/아리아리랑 시리시리랑/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시대의 변함을 그 누가아나/천지순환 자연이치 무궁도하다/아리당닥궁 시리당닥궁/아라리가 났네/요당강 고개로 날 넘겨주소.
우리 일행은 동문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해원정사로부터 2.1km. 솔숲으로 난 등산로는 하얀 눈길이었습니다.
쉬엄쉬엄 산길을 오르며 산성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몸이 가벼운 방울새 떼가 나무 열매를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저렇듯 평화로운 새떼들은 가산산성의 포성을 기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란 자연의 것이 아닌 인간세의 것이니까요.
◆ 민초들의 생사가 깃든 곳
6·25 때에는 가산산성을 두고 치열한 교전이 있었습니다.
1950년 8월과 9월 사이 55일 동안 지속된 이른바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그리고 유엔군의 수많은 목숨이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석적면 328고지, 유학산 839 고지, 가산면 금화리 741고지, 가산산성 902고지를 연결하는 20km의 방어선을 편 전투는 피비린내나는 것이었습니다.
아군 비행기 폭격에 이어 미군과 국군 포병의 일제 사격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산성 안에 있던 북한군 연대병력은 대부분 몰살되고, 국군의 인명 피해도 커서 180명 중대병력 중 장교 1명과 병사 10여 명만 겨우 몸이 성했다고 합니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부디 일러 다오,/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부분)
눈 덮인 산골짝 어디쯤에서 죽어서 말하는 스물다섯 젊은 목소리가 아프게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10시에 해원정사를 출발한 우리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동문에 이르렀습니다.
동문은 외성 축조 이전까지 내성의 정문이었습니다. 출입문의 정면은 남동향이며 입면 모양은 윗부분을 둥글게 한 홍예문 형식으로서, 좌우에 길이 168㎝의 장방형 홍예기석을 놓고 거기서부터 정상으로 가면서 원호를 이룬 전형적인 홍예문 양식입니다.
출입문의 폭은 275㎝이며, 지대석에서부터 홍예종석까지의 높이는 390㎝, 동문의 좌우 육축부는 방형에 가깝습니다.
카랑카랑한 겨울 날씨 때문이었겠지요. 동문에서 바라보는 하늘빛은 너무 맑고 푸르러 아득한 태초의 그날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아득한 전생의 거대한 물살을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거슬러 오름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무한의 평원, 그 무심의 해원, 모든 실체가 아득히 무화됨을 느꼈습니다. 그 무화가 주는 현현(玄玄)한 평화와 평평(平平)한 해방을 마음껏 즐기는 순간이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에게 가산산성 동문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혼자 보고 말기에는 아까운 시원의 정경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문 사이로 비친 겨울나무 가지가 카랑카랑 하늘에 찍힌 사진이었습니다. 모두가 어디냐고 궁금해했습니다. 한 편의 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눈길을 내려오며 우리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린 저녁 숲가에 서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해 들어 가장 춥고 캄캄한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인가가 멀리 떨어진 깊고 고요한 산길이었습니다. 시인은 타고 가던 나귀를 멈추고 눈 덮인 숲가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 알려진 구절이어서 원문으로 옮깁니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But I have promises to keep,/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숲속에 안주하지 말고, 잠들지 말고, 잠들기 전에 먼 길을 가라고,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밝았다’는 문장 속에는 꿈과 희망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약속과 다짐으로 불끈 쥔 주먹이 보이기도 합니다.
새해에는 대통령이 바뀌고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민생을 살피고 복지를 늘리고 국태민안을 이루겠다는 사자후가 귓전에 카랑카랑 들려옵니다.
찬란한 수사에 너무 자주 속았던 터이어서 정치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겨울 산속의 방울새떼들처럼 말입니다. 가산산성을 떠나오며 생각해 봅니다.
가야 할 먼 길이 어디인지, 지켜야 할 약속이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무릇 약속이란 산성처럼 견고한 것이어야 하고, 등짐으로 나른 돌덩이로 하나하나 성벽을 쌓던 민초들의 마음처럼 오늘을 살 때 가야 할 먼 길은 비로소 내 것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현국
시인·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첫댓글 저두 오래전에 다녀 왔는데 다시 잘 정비되었다니 가보고 싶어지내요
저도 30년전에 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