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물곰탕
박연희
추석 연휴에 가족과 함께 속초로 떠났다. 이른 아침, 여덟 시쯤 물곰탕 식당에 갔다. 이십칠 년 전통 맛을 굳게 지켜온 Y 식당이다. 그날따라 '물 곰 없음' 하고 바깥벽에 공지가 붙어 있었다. 주인은 비가 와서 고기를 잡지 못했다고 열 한 시에 다시 오라고 했다. 실망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맛이 부드럽고 깊다는 '물 곰탕' 한 번 먹기 참 힘들다.
열한 시에 다시 식당을 찾았다. 바닷가의 작은 집이 오두막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님은 없고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식당 가족들이 명절이라 한집에 모인 듯 보였다. '대청이 좁아 대청 옆에 대청을 이어 붙여 늘리듯' 앞바다에 배 띄워 평상을 하나 놓고 식당을 더 넓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곰탕'이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 물 곰탕의 물 곰은 이름 그대로 물에서 사는 곰이란다. 지역에 따라 곰치, 미거지, 물메기, 라고 불리기도 했다. 홍게를 잡다가 같이 딸려 나온 물곰,못생겨서 텀벙 내동댕이치며 버려져서 붙은 '물 텀벙'이라는 이름도 재미있었다.
이 뭉툭한 물 곰이 흐물흐물한 속살을 다 드러내겠지. 속살을 드러내기까지 물 곰의 생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남편은 맛도 보기 전에 대뜸물 곰 같은 여자가 좋다고 했다. '고집이 없고 부드러운 여자가 물 곰같은 여자가 아닐까, 라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음식도 먹기 전에 입맛이 사라지는 듯했다. 좋은 자리라 솔직한 내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물 곰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주인장이 정성 들여 삼십여 년의 긴 시간을 집밥하듯이 끓여 내놓는 음식이라니 더욱 기대감이 컸다.
양은 냄비엔 물곰탕이 끓어오르고 끓는 냄비 속은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듯 요동쳤다. 속살이 파도 속에 휩쓸려 위로 아래로 들썩거렸다. 국물 위로 보이는 속살이 눈에 띈다. 국물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혀가 대일 정도로 뜨겁다. 왠지 국물은 속살보다 숟가락 순위가 늘 뒤로 밀리는 것 같은데 물 곰탕의 국물은 기다림의 맛 같은 의미로 혀 속에 스며든다. 속살은 국물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듯 주인공으로 우뚝 선 듯 보였다. 끓는 국물에도 흔들리는 곰치살, 순두부보다 더 야리야리한 속살은 씹을 것도 없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처음 먹어보는 물 곰탕, 생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흐물흐물한 살결, 그 새로운 맛, 특별한 맛이 금세 익숙한 맛처럼 자주 먹어본 것 같았다. 그러면서 조금 전 남편이 한 말이 부드러운 속살에 겹쳐 느껴졌다.
그렇지. 내가 집에서 하는 음식이 늘 그 맛이 그 맛이었는데 물 곰탕을 먹고 놀랐다. 맛을 내 혀에 깊게 베이게 하고 싶어 한 숟가락 먹고, 또 떠먹고, 떠먹었다. 크게 국물 한 입 떠먹으니 끓일수록 깊은 국물에서 맑고 시원한 맛이 났다. 청양고추도 작게 썰어 넣어서 은근하게 칼칼함까지 더했다. 게다가 바닷바람으로 무친 듯한 해조류와 여덟 가지 반찬은 뜨끈하고 시원한 물 곰탕과 이후렸다.
이번엔 입을 꽉 다물고 한 줄을서 코로 가져갔다. 바다향에 묻혀 그런지 비린내라곤 없었다. 물 물은 계속 끓었다. 불도 활활 타올랐다. 나와 남편과의 대화는 식은 국물묵이다. 침묵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끓일수록 뜨거움 속에 시원한 닷바람이 일고 닫힌 입속에서도 바다의 깊은 향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일까.
오래 끓여서 가장 느린 음식이라고 했다. 바다에 배 띄워 날생선 잡아끓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테다. 물 곰탕의 자랑은 바로 잡아 즉석에서 끓이는 거라고 하니 신선한 생물을 잡는데도 얼마나 오래공을 들여야 할까. 동해안에서 바로 잡힌 그 신선함을 느끼는 것은 덤이다. '부드러운 속살에 신선도 유지, 푹 끓여내야 제맛이 나오는 물곰탕!'남편은 이 조건을 다 갖춘 여자를 바라는가, 꿈꾸는가.
이번 추석 연휴엔 손끝도 까딱하지 않고, 내 입에 딱 맞는 물 곰탕을 먹긴 했다. 내가 하지 않은 것 때문인지 더 맛이 있어 먹고 또 먹었다. 불현듯 안동에서의 지난 추석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달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하는 명절 음식들. 조상님과 대가족을 위해 만드는 음식은 맛과 향을 피우기에는 매번 벅찼다. 물 곰탕같이 맛과 격식, 음식의 품격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모이는 가족들이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많이만 준비했다. 그래도 온갖 정성을 다하긴 했는데 이런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은 남편이 서운했다.
제몸 푹 끓여 섞이고 포개지며 흐물흐물해져야 깊은 맛이 나는 물 곰탕, 부드러운 물곰탕. 가족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했고 거친 바다를 헤쳐온 삶을 살아왔지만, 남편 말대로 물 곰탕 같은 부드러운 여자가 되지 못한 건 맞다. 내가 나의 부족함은 보지 못하고 내 멋에 취해 살아오기만 했는가. 내가 특별한 맛, 새로운 맛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나를 찾기 위해서인가.
음식을 하느라 내 손끝이 늘 젖어 거칠었나. 부드럽게 마음 다지기를 덜 했던가. 갖은 음식 재료로 달이고, 고고, 볶고, 지지고, 끓여 물 곰탕 이후의 내 음식도 새로운 비법으로 달라져야겠다. 음료와 과자, 채소와 고기, 해산물과 고기, 장류와 조미료, 술과 절기 음식에 이르기까지 부드러운 여자의 품성을 담아 흉내라도 내야겠다. 내 손에서 나는 음식 냄새도 좀 더 향기로워지리라. 물곰탕 먹고 곰탕 향이 밴, 깊은 바다향을 내면서 식구들의 젓가락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빈 접시에 나를 담아내리라.
박연희<인간과문학) 수필등단(2020) 저서 <검은솥)eeksw@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