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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달
1) 한가위 전날, 손자들과 함께한 행복한 하루 2025.10.5.(일)
내일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이다. 재작년부터 어머님이 명절 차례 의식을 삼성암 절에 올렸다. 집에서 준비하는 일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집사람과 제수씨가 제일 좋아했다. 자연히 자기 가족끼리 모임으로 바뀌었다. 94세 어머님의 탁월한 선택에 늘 감사의 마음이다. 고령이지만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남다르다. 시대 변화를 읽고 후손들에게 짐을 주지 않으려는 결정에 고개를 숙인다. 오전 11시30분. 우리 가족 7명이 ‘맨인더키친’ 양식점에서 오찬 모임을 가졌다. 손자들이 어리기에 적당한 음식점을 고르기가 어렵다. 나는 양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온 식구가 함께하기에는 무난하다. 며느리와 아들이 한참 숙덕거리더니, 까르보나라, 고르곤졸라, 새우 베이컨 볶음밥, 치킨 크림 펜네를 시켰다. 7살과 4살짜리 손자는 어디서나 신이 난다. 가만히 있으라고 연신 주의를 주어도 잘 안된다. 두 놈이 손님이 없는 테이블 사이로 연신 돌아다니며 장난친다. 우리가 앉은 단체석이 일반인 자리와 떨어져 있고 아직 다른 팀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사 후,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내가 추천한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첫째 손주 **는 어릴 때 그곳에 가서 자주 놀았지만, 둘째 **이는 한 번도 함께 가지 못했다.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흐린 날씨고 명절 전날이라 사람들이 적었다. 처음 와 본 **이는 신이 났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멋지고 좋은 곳이다. 8만 평의 넓은 부지에 잘 가꾼 잔디 정원, 물레방아와 분수가 있는 연못, 곳곳에 수많은 정자와 어린이 놀이터, 민속 그네 등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민속 그네에 잠시 앉더니 어느새 투호 던지는 곳으로 뛰어간다. 물 만난 고기랄까? 좀 더 일찍 데리고 올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참 뛰어놀다가, 삼성현역사문화관 실내로 들어갔다. 2층에는 원효실, 설총실, 일연실로 나누어져 전시하고 있지만, 1층은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 쉬는 곳이다. 디지털로 게임하는 방에서 터치로 즐기고 사진도 찍다가, 옆방의 나무 막대로 조립하는 곳에 들어갔다. 조립기구를 이리저리 만져본다. 손자 각자 나름대로 여러 모형을 조립하고 웃는 모습이 정겹다. 그때였다. 갑자기 둘째 **이 표정이 얼음이 되었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아뿔싸! 그만 실수를 한 것이다. 바지 밖으로 옷이 푹 젖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급히 직원에게 달려가 얘기를 하고 물휴지로 말끔히 처리했다. 둘째는 3돌이 지났지만, 아직 낮잠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소변 처리도 미숙하다. 집에서는 쉬 하겠다고 말하면 조처하곤 했지만, 조립 놀이에 너무 집중해서 그만 방심한 모양이다. 화장실에서 옷을 벗기고 씻겼다. 잠시 뒤에 정자에서 쉬던 아들이 여벌 옷을 가지고 와서 갈아입혔다. 그제야 방긋 웃으며 기분이 돌아왔다. 새삼 더 귀엽다.
한참 놀아도 집에 가려니 아직 이르다. 어디로 갈까? 경산 대형 카페 ‘삼성현로 투썸’으로 옮겼다. 이곳은 내가 가본 카페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주차장도 넓다. 우리 집에서도 가깝고 2층 3층 복층으로 다인실이 몇 군데나 있어, 온 식구가 가도 편안하고 부담 없는 곳이다. 삼성현 가기 전 ‘빽다방’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가져갔지만, 또 들어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카페 순례하는 문화가 되었을까? 나는 술 담배를 안 하기에 집사람과 카페 순례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곳에 대형 신상 카페가 생겼다 하면 한 번쯤 찾아가서 보고 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기서도 손자들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손을 잡고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민폐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다닌다. 다시 한쪽에 앉아 삼촌과 같이 휴대전화으로 ‘포켓몬 게임’을 보여주며 시간을 보낸다. 한참 바라보며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이게 21세기 현대인이 살아가는 모습인가? 곳곳에 둘러보아도 혼자 오거나 친구와 같이 온 사람들 대부분 휴대전화 삼매경에 잠겨있다. 앞으로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해갈까? 기계의 노예가 되거나, 기계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삼촌도 왔고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번 주는 금, 토, 일 계속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아내가 힘이 들지만, 손자를 사랑하기에 가능하다. 요샌 손자들이 제집보다 더 익숙해한다. 보통 오후 4시 좀 지나면 와서, 8시 반 지나면 보낸다. 어떤 날은 내가 피곤해서 좀 일찍 자기 집으로 보내려고 하면, 큰놈이 평소 가던 시간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오늘도 저녁 7시쯤 가라고 하니 “평소 가던 시간에 갈게요.” 이런 말을 한다. ‘허 참! 맹랑한 놈’ 하면서도 귀여운 것이 속마음이다. 처음에는 같이 재미있게 놀아주다가, 욕심이 있어 수학이나 국어 공부를 시키려고 하면 슬슬 도망가 버리는 첫째 손자다. 나도 그랬을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아쉽다.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야지만 욕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도인이나 성인도 보여주는 것이 그렇지 않을까? 실상은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어영부영 또 하루가 이렇게 가뭇없이 지나간다. 고마울 뿐이다. 오늘 무사히 즐겁게 보낸 하루가 감사하고 자잘한 개인의 일상을 여기에 기록해 남긴 하루가 아름답다.
2) 평범해서 더 고마운 하루 2025.10.14.(화)
한의원에서 치료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일주일에 세 번 침을 맞고, 치료 한약도 부지런히 먹었다. 처방대로 매일 걷기 운동도 빠짐없이 했다. 한 달이 지나니 아픈 다리도 좋아지고 곧 나을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라면 두 달쯤 되면 다 나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좋아졌다가, 다음 날이 되면 오른쪽 다리가 계속 아파 걷기가 힘든다. 과욕인가? 어제도 아침에는 괜찮은 듯 좋았는데, 저녁 산책 중 다리가 저려 쩔쩔맸다. 어쩔 도리가 없다. 마음이 잿빛이다. 한참 생각에 잠겼다. 욕심을 버려야 하나? 받아들이고 함께 안고 가라는 뜻이 아닐까? 석양의 나이엔 완치보다 완화가 정답이다. 아직 예정했던 석 달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치료하는 수밖에…….
새벽부터 비가 세차게 내린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우산을 챙겨 산책을 나왔다. 비가 온다고 일상 습관이 바뀔 수 없다. 요즘에는 매일 6:10분에 일어나 가까운 매호초등학교 운동장 걷기를 한다. 다른 사람은 대부분 맨발로 걷지만, 나는 발바닥이 아파 신을 신고 걷는다. 척추 치료를 하면서 일주일에 대여섯 번은 실천하고 있다. 무엇보다 습관의 중요성을 존중하기에 열심히 한다. 다른 재능은 별로 없어도 성실이라는 무기가 내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 아닌가? 가는 도중 우산 속으로 비가 몰아치고 옷이 푹 젖는다. 운동장은 온통 진흙탕이다. 늘 만나는 분 두 분이 장대비 속 우산을 쓰고 맨발로 걷고 있다.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아니, 한 폭의 싱싱한 삶의 수채화이다. 동문 쪽에는 직원 주차장이 필로티로 되어 있기에 우산이 필요 없다. 백여 평 정도로 널찍하다. 교직원이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비를 피하면서 걷기 운동을 하기에 좋다.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칼럼을 음미하며 걷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오전 10시. ‘만촌 스마트빌리지’ 강의장에서 ‘시낭송’ 수업이다. 오늘은 동시 낭송법을 강의한다.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강사의 열정이 대단하다. 몸짓이나 목소리가 강사로서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동요대회에 참석한 어린이 마냥 말투나 몸짓이 남다르다. 내 짐작대로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분이다. 경상도 사람은 닮기가 어렵다. 동시에 대한 정의는 일반론과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동시는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고와 정서에 맞게 쓴 시란다. 어린이가 쓴 시는 동시라고 부르지 않고 ‘어린이 시’라고 한다. 텍스트로 보인 동시도 내가 보기로는 너무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든다. 배우러 왔기에 말없이 경청했다. 논어의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란 구절을 떠올리며 들었다. 소개해 준 J 회장님의 고운 마음이 늘 고맙다.
어제저녁부터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 따끔하고 아팠다. 물을 마시거나 가만히 누워 있으면 괜찮으나 움직이면 꺼끌꺼끌한 게 이상했다. 가시가 걸렸나? 며칠 동안 생선은 먹은 적이 없다. 그럼 가시는 아닐 텐데. 편도선이나 목구멍에 무슨 좋지 않은 혹이 생겼나? 후두암에 걸린 사람도 생각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수업 시간에도 내내 목에 신경이 쓰였다. 정확하게 시 읽기도 힘이 들었다. 오후 12:30분. J 선생님과 추어탕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잠시 시간이 남았다. 병원에 가서 원인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신매광장의 ‘이서이비인후과’에 갔다. 목이 좀 부었다며 목구멍을 한참 관찰하더니 집게로 무엇인가를 뽑아냈다. 1cm 길이의 생선 가시였다. 아니, 웬 가시가 박혔나? 낚시 바늘같이 살짝 휜 가시가 목에 걸려있었다. 어제 낮에 돈가스를 먹었고 그 외에는 의심나는 것은 먹은 적이 없는데……. 언제 어디서 들어간 지 알 수가 없다. 이제 목이 아프지 않다. 다행이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치료는 되었으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고마울 뿐이다.
저녁에는 손자들이 오는 날이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우리 집에 온다. 둘째 **이는 혼자서 잘 논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작은 차 장난감을 내어 죽 줄을 세우고 중얼거린다. 음식을 잘 먹지 않아서 먹이려고 늘 씨름한다. 첫째 **는 오자마자 포켓몬 카드로 할아버지와 숫자 놀이 하자고 조른다. 각각 150장씩을 가지고 따 먹게 하는 게임이다. 판돈을 걸듯이 적당량의 카드를 같이 내놓고, 게임 할 나머지 6장 카드를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먼저 석 장을 가져가고, 진 사람이 석 장을 가져가서 뒤편의 체력 숫자 합을 더해서 많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카드 숫자 합을 암산하게 하는 게임이다. 뒤집어 놓은 카드 숫자는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거의 행운싸움이다. 오늘도 내가 한판, 손자가 한판 이겨 일승일패로 비겼다. 손자는 무엇이든지 경기를 좋아한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가 없다. 지는 법을 많이 알려주고 싶지만 잘 안된다. 욕심을 부려 책 잘 읽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훈련하고 싶은데,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잘 안된다. 다시 작은방에 가서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를 가져와 유혹했다. 주인공에 대해 잠깐 설명해 주니 반응이 온다. 손자가 유비나 조조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기에 묵독으로 80p까지 진도가 나갔다. 다음에 와서 뒷부분을 읽으라고 했다. 힘이 들지만 또 이렇게 아름다운 하루가 지나간다. 평범하게 탈 없이 지낸 오늘이 고맙다.
3) 추리극 속에서 되살아난 어린 시절의 향수 2025.10.16.(목)
중국 드라마 ‘당조궤사록: 서행’ 40부작 마지막 편을 오전에 다 보았다. 이 작품은 첫 회부터 푹 빠졌다. ‘당 왕조의 괴이한 사건을 기록’했다는 제목처럼 고전 수사극, 추리극이고 판타지 작품이다. 중국 당나라 때 가장 유명한 수사관 ‘적인걸’ 제자인 ‘소무명’과 4대 명문가 범양 노씨의 적통 ‘노릉풍’이 주인공이다. ‘당조궤사록’ 36부로 만든 첫 작품도 있지만 우연히 이 작품부터 보게 되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괴이한 살인사건을 맡아 서로 다투고 협조하면서 해결하는 것이 주된 이야기이다. 탄탄한 서사구조가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 치밀한 사건 진행과 곳곳에 깔린 복선으로 마지막까지 진범이 누구인지 쉽게 상상할 수 없게 된 구성이 맛깔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사건, 평범하거나 얼토당토않은 결말은 없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작품으로,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읽는 분위기이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왕실에서의 권력 암투, 탄탄한 무공, 요괴, 전설 속의 동물들, 괴이한 사건이 얽힌 구성에서 시청자들에게 기묘한 긴장감과 궁금증을 주어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적인 사건을 수사하는 느낌이 더 매력적이다.
전체가 8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서로 관련이 없지만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겪는 일들이다. 1화 ‘항마변’은 성불사라는 절 벽화를 그리는 중 마지막 점안을 두고 고민하는 중에 벽화 속 마왕이 현실세계에 나와 살인사건을 일으킨다는 음모로 시작되고, 2화 ‘오작의 죽음’은 도굴꾼을 막는 기관 장치 만드는 장인인 독고 오작(부검의)의 살인사건, 3화는 ‘풍설 마가점’. 폭설로 인해 우연히 들런 산장의 비밀, 4화는 ‘천중도’. 천중도라는 나루터에서 일어나는 사건, 5화는 ‘통천서’(코뿔소), 6화는 ‘운정취(술)’ 야시장의 비밀. 7화는 ‘상선방에서 온 편지’ 8화는 ‘공양인’으로 되어 있다. 잘 짜여진 구성과 끝까지 범인을 알 수 없게 만든 사건의 전개, 반전과 위기가 강한 호기심으로 푹 빠지게 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8화가 제일 구성이 치밀한 듯하다. 서역의 돈황석굴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가족 모두가 아들의 살인사건과 관련되어, 다 범인인 것 같지만 결국 진범은 한 사람으로 압축된다. 유산 다툼에서 벌어지는 복선이 압권으로 생각된다. 예나 지금이나 돈 때문에 생과 사가 넘나든다. 씁쓸하지만 삶의 진리 중 하나가 아닌가. 극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조씨 가문은 나이 60이 되면 소위 ‘환갑장’이란 환갑잔치를 하고, 그날 지정된 동굴에 들어가서 삶을 마감한다는 ‘고려장’ 같은 문화를 가지고 엮어내는 에피소드다.
‘당조궤사록: 서행’ 40부를 보름가량 시청했다. 잘 낫지 않는 척추 협착 때문에 운동 부족과 우울한 시간을 잊게 하는 드라마였다. 중학생 때 고모 집이 삼덕동 삼덕초등학교 부근에 있어 자주 갔었다. 검은색 나무판자가 떠오르는 적산가옥의 넓은 정원엔,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부엌을 지나 큰방이 있고, 미닫이로 된 중문을 열면 탁 트인 다다미방이 나온다. 나는 주로 이 방에서 엎드려 책꽂이에 꽂힌 한국 문학과 중국 고전을 읽곤 했다. 그중 어떤 중국 고전은 괴상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많아서 무서워하면서도 호기심에 숨죽이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이 드라마가 그때의 아련한 향수와 재미를 불러오기에 더욱 몰입하지 않았을까?
요즘도 이따금 책장의 책 몇 권 빼내어 읽어본다. 30여 년 전 아이들을 위해 구입한 책이다. 이사하면서 대부분 책은 버렸지만, 이 책은 다행 버리지 않았다. 채지충이란 대만 천재 만화가가 그린 전체 55권으로 된 만화 중국 고전이다. 당시 아이들에게 보라고 샀지만, 거의 내가 심심하면 읽은 책이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신비한 것이 바로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문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있다. 지금 돌아보니 당시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어렵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노자(老子), 장자(莊子), 당시(唐詩) 같은 학문적인 것도 많았지만, 요재지이(聊齋誌異), 육조괴담(六朝怪談), 백사전(白蛇傳), 세설신어(世說新語), 귀호선괴(鬼狐仙怪) 같은 고전은 기상천외하고 귀신, 여우, 뱀, 신선 등 신기하고 괴상한 이야기가 궁금하고 재미있어서 종종 읽었다. 이런 이유로 이 중국 드라마가 내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여건이 되면 다시 처음부터 한번 더 볼 예정이다. 이제 첫 작품을 봐야지.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4) 가을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과 삶의 순간들 2025.10.17.(금)
짙어가는 가을 하늘이 색다르다. 점심을 먹고 운동화를 신었다. 가까운 대구간송미술관으로 산책하러 갔다. 지난번 ‘화조미감(花鳥美感)’ 행사가 끝나고, 광복80주년기념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 - 매, 죽, 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전시중이다. 역시 평일은 관람객이 적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지난번에 전시된 산수화가 많이 바뀌었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이 많다. ‘청금상련’(가야금 소리를 벗하며 연꽃을 감상하다)은 여름날 후원에서 풍류객들이 연회를 연다. 운치 있는 기생의 가야금 음률 속에 세련된 옷차림의 지체 높은 양반이 의관을 벗어 던지고, 여인들과 거리낌 없이 놀면서 연꽃을 감상하는 장면이다. ‘이승영기’(비구니가 기생을 맞이하다)는 버들가지에 새잎이 돋아날 무렵, 화사한 복색의 여인이 연둣빛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삿갓을 쓴 여승이 합장하며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그림이다. ‘유곽쟁웅’(유곽에서 사내다움을 다투다)은 기생집 앞에서 한량들의 주먹 다툼이 오가는 상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을 두고 벌어지는 광경의 그림을 보며 무슨 일일까? 상상하는 재미도 미소 짓게한다. ‘임하투호’(숲속의 투호놀이)는 숲속에서 여인을 옆에 두고 투호놀이를 한다. 한 선비는 체면도 잊은 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갓도 벗어 던지고 경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오늘의 특별전시는 공재 윤두수의 ‘심산지록(深山芝鹿)’이다. 보물로 지정된 그림을 한참 감상했다. 풀숲에서 사슴 한 마리가 아래쪽을 향해 뛰는 형상이다. 제화사에서 그는 봄의 숲을 노래하고 있다. 비바람 몰아치는 밤은 당시 당쟁의 소용돌이를, 숲속에 숨어든 사슴은 처사의 삶을 비춘다고 한다. 지하 1층에서 열리는 광복기념 기획전시인 ‘삼청도도’. 광복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 자존의식과 내외적 노력 때문에 맺어진 결실이다. 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힘을 삼청(매, 죽, 난) 그림을 통해 우국지사들의 정신을 되새겨 보자는 의미이다. 나이탓일까?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니 힘이 든다. 특히 중요한 눈이 피곤해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감상하기로 했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옆 동의 대구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에 본 ‘근대미술전’과 ‘이광소’ 화백 회고전은 그냥 휙 둘러보고 나왔다. 후문 쪽으로 나오며 ‘모유진’ 작가의 “잠시---들렀다 갑니다.”를 감상했다. 투명하게 뒤가 보이는 하늘하늘한 넓은 천에 사진 같은 그림들이 염색된 작품이다. 천정에 걸개처럼 죽 늘어뜨려 놓기도 하고 벽에 걸기도 했다.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인사말을 천천히 음미한다.
“누군가의 창가 놓인, 오래된 컵, 우연히 마주친 풍경 속 바람의 흔들림, 무심코 적어 내려간 메모 한 줄, 삶은 언제나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만, 찰나의 감정과 형체를 붙잡아 조용히 응시하는 일은 결코 소소하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존재, 관계, 기억에 대한 파편들을 모아낸 작가의 감성적 기록입니다. 그저 잠시 들렀다가 지나가는 일상일지라도, 그 안에 머무는 순간만큼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도 조용히 머물러 주기를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해거름 시간이다. 오늘도 별일 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퇴직 선배 동료의 가슴 아픈 소식만 카톡에 뜬다. 시나브로 삶이 이렇게 지나가나보다. 내일도 오늘 같기만 기도하며 감사한 하루를 매듭짓는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5) 미래의 문 앞에서, 가을 꽃밭에서 2025.10.25.(토)
며칠 전 수요일(22일)이다. 오전 하빈 큰집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J 선생님 전화가 왔다. 산격동 엑스코에서 ‘이미 시작된 미래, All on AI’란 주제로 ‘2025년 미래혁신기술박람회’ 초대권이 있으니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AI’라는 말에 관심이 있어 선뜻 승낙했다. 오후 2시에 만나 J 선생님의 차로 엑스코로 향했다. 가는 도중 **대 차기 회장을 수락하려는데, 함께 일할 사무국장과 행정실장 선임에 애를 먹고 있다고 의견을 구한다. 나는 순리대로 가면 좋은 분이 나올 것이라고 하며 긍정적인 답을 했다.
오후 3시쯤 행사장에 도착했다. 올해 행사는 모빌리티, 로봇, ICT, 스타트업 등 미래산업을 아우르는 전시회다. 다양한 전시가 있었지만, 첨단 분야에는 문외한이라 그냥 수박 겉핥기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먼저 ‘AI 와 스타트업’에 대한 외국인의 좌담회가 눈에 들어왔다. 빈자리에 앉아 대담을 들었다. 싱가포르에서 온 4명의 패널이 앉아 얘기하는 것을 앞의 대형 스크린 3개로 보여준다. 중간 스크린에는 한글로 동시통역이 되어 전문 내용은 몰라도 화면으로 조금 이해가 된다. 돌아다니면서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로봇 분야다. Tv 에서만 보던 ‘개 로봇’이 여기저기 다니며 묘기를 부리고, ‘인간 로봇’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유니트리 휴머노이드 G1’은 국내 최초로 로봇 복싱 경기를 하는 것으로 압권이었다. ‘영인모빌리티’ 명찰을 달고 복싱 경기장에서 청백으로 나누어 복싱하는 코너에는 관람객이 빼곡하다. 사회자의 멋진 중계로 재미있고 신기하게 관람했다. 경기중 홍 코너 로봇이 KO가 됐다. 심판이 텐 까지, 카운터를 세는 것이 극적인 재미를 준다. 또 다른 생각이 든다. 무서운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내내 흥미도 있었지만 신기하고 두렵다. 어차피 맞아야 할 미래 세계가 아닌가? 손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동영상을 찍었다. 초대권이 남아있으니, 토요일에 가능하면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었다. ‘로봇커피제조기’로 내린 커피도 한잔하고, ‘로봇아이스크림 제조기’로 주는 아이스크림도 얻어먹었다. 두어 시간이 가뭇없이 지나갔다. 집에 오니 해가 지고 별이 총총하다. J 선생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한 날이다. 늘 고마움과 감사함을 보낸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어제저녁에 계획한 일을 실행했다. 대구광역시 뉴스룸에 보니 24일부터 28일까지 금호강 하중도에서 “2025 대구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K-가든의 미래, 대구에서 찾다!’라는 주제로 여러 기관이 참여한다고 홍보한다. 시민, 학생, 기업, 기관 등 118개 참여정원이 선보이고 있다. 재작년에도 가을 축제에 참여했다. 그때는 아들과 맏손자 **도 함께 와서 돌아본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는 승용차로 왔고, 교통이 복잡해 사람의 홍수에 떠밀리다시피 하며 돌아다녔다. 올해는 집사람과 둘이 나섰다. 검색하니 다행 올해는 만평역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고 한다. 2호선 신매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청라언덕역에서 환승, 3호선 만평역까지 여섯 코스면 도착한다. 셔틀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운행하니 정말 멋지고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닌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운전기사는 15분 만에 행사장 입구까지 편안하게 실어준다.
가을의 중턱이지만 오늘은 햇살이 쨍쨍, 바람도 없고 조금 더운 여름 수은주다. 입구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전통 코스모스의 바다, 노란색 코스모스의 향연에 입이 딱 벌어진다. 에메랄드빛 하늘에는 층층 하얀 뭉게구름, 벌써 마음은 선계에 풍덩 빠진 듯 황홀하다. 건너편 금호강 윤슬이 춤을 추고 물에 잠긴 짙푸른 하늘은 신천지를 보여준다. 키를 훌쩍 넘는 허연 물억새가 끝없이 펼쳐지고, 곳곳에 손짓하는 노란 국화 조형물이 나그네를 유혹한다. 개장한 지 둘째 날이고 정오를 살짝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는다. 세 시가 지나면 복잡하지 않을까? 불타는 가을, 숨넘어갈 듯 아름다운 꽃의 정글에 빠지면 누구나 멋진 모델이 된다. 여기저기 독특한 나름의 자세로 사진 찍으며 추억만들기에 바쁘다. 외국인도 많다. 오가는 사람 구경도 쏠쏠하다.
앞서가던 나를 갑자기 집사람이 부른다. 돌아보니 파동 대자연아파트에 사는 S 부녀회장과 박 선생님이 딸, 손자와 와 있는 게 아닌가. 우와! 정말 반가웠다. 여기서 만나다니! 사실 파동 아파트엔 37년이나 살았기에 정든 사람이 많았다. 감성적인 나는 이사 오기 전 용두골의 추억이 안타까워 한참 몰래 울기도 했었다. 2년 전에 시지로 이사 온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또래의 P 선생님은 같은 교직에 있었기에 더 친하게 지냈었다. 잠시 안부를 묻고 다시 꽃밭 관람을 나섰다. ‘가을 앞에 서면 소녀가 된다.’ ‘에코 정원’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곳곳에 이름표를 달고 주제를 나타낸 작은 정원도 아름다웠다. 좀 불편했지만, 아직 건강한 다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감사한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 남짓 꽃의 바다에서 항해한 아름다운 내 삶의 화양연화였다.
6) 다시 만난 삼청의 아름다움, 가을 속에서 찾은 문화와 여유 2025.10.31.(금)
보름 전 눈이 피곤해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광복80주년기념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 - 매, 죽, 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를 다시 보러 간송미술관으로 향했다. 월드컵대로는 가을이 성큼성큼 걸어 다닌다. 울긋불긋 물든 가로수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듯 동화 속 같다. 승용차 안 오디오에선 ‘잊혀진 계절’이란 노래가 가을남자의 마음을 더 훌쩍거리게 한다. 금요일은 늘 조용하다. 천천히 오래 감상하기엔 최상이다. 지난번에 흘낏 지나간 작품에 빠진다. 김희겸의 ‘산정일장山靜日長(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다)’는 깊은 산골의 은사가 낮잠을 즐기고, 마당을 거니는 학, 닫힌 싸리문, 무성한 버드나무가 속세와 차단된 여유로움을 풍긴다. ‘산처치자山妻稚子(아내와 어린자식)’은 전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에서 식사 준비가 한창인 그림이다. ‘아내와 아들이 죽순과 고사리나물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내다’라는 설명을 보며 감상한다. 중앙에 진열된 백자와 청자에 눈이 머문다. 대부분이 둥근 자기이다. 그중 사각으로 된 청화백자산수문사각병(靑華白瓷山水文四角甁)이 색다르다. 19C 작품인 사각 직사각형의 몸체인 이 병은 물레에서 성형한 것이 아니라, 병의 각 부분을 별도로 제작하여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몸체에는 세 등분으로 나누어 산수를 그렸고, 어깨 부분에는 난초와 국화로 장식하고 목 부분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萬壽無疆) 글자가 쓰여있다. 한참을 돌아가며 요리조리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앞면에 산이 겹겹이 있고, 뒤로 돌아가서 보면 또 다른 산과 나무와 집이 나타난다. 글과 그림이 멋지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병을 보며 조선시대 선비의 망중한도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덤이다. 방에 가만히 앉아서 자연을 즐기는 멋진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집에 이런 가보 하나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이 생긴다. 두고두고 감상하며 당시의 선비 입장도 그려보는 재미도 좋을 탐나는 백자이다.
광복80주년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는 지하 1층 4, 5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광복이란 오랜 민족의 자존의식과 항일활동의 노력으로 맺어진 결실이 아닌가? 여기에 삼청 그림을 통해 우국지사의 정신적, 문화적 힘을 보여준다고 한다.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보물 첫 코너는 탄은 이정의 작품이다. 보물로 지정된 삼청첩(三淸帖) 그림이다. 처음에는 컴컴한 배경에 금빛 작품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화선지에 그린 보통 사람들의 작품과는 달라서 의문이 많았다. 해설을 보고 이해를 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왕족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전투에서 오른팔을 심하게 다쳤다. 부상에서 회복 후 검은 비단에 금으로 매화, 대나무, 난초를 그렸다.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그린 매, 죽이 색다르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자세히 보아야 겨우 보인다. 다음 코너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한음 이덕형의 ‘묵죽’과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하다 청나라로 끌려가 순국한 3학사 중 한 사람인 오달제의 ‘묵매도’를 감상한다. 모르는 내가 봐도 한음의 ‘묵죽’은 댓잎이 굵고 곧아 강인한 느낌으로 지조와 절개가 있다. 마지막 방에서는 항일 지사들의 삼청을 만난다. 눈에 강렬히 들어오는 작품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진우의 작품이 우뚝하다. 그의 대나무 ‘허심수덕(虛心樹德)’에는 창칼을 닮은 고결한 기개가 배어난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지운영의 ‘천태선거(天台仙居)’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중국 절강성 천태산을 한 폭에 담은 대관산수화이다. 그 치밀한 구성과 세세한 필치에 입을 딱 벌리게 한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첩첩이 서린 봉우리 사이로 다양한 바위, 신선이 모여 마을에서 담소하는 장면, 다리 위, 정자 등 곳곳에 묘사된 사람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고 보람 있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온다.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온 모양이다. 조용하던 전시장이 웅성웅성한다. 그림 관람이지만 활기가 돌고 살아있는 것 같다. 그냥 획 지나가는 학생, 자세히 보는 학생, 같이 함께 의견을 나누는 학생, 저마다 예쁘고 다양하게 관람한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도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일찍 우리 정신적 문화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접하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젊음의 에너지와 긍정적인 힘이 함께 하는 것같이 즐겁다. 다음에 한두 번 더 와서 돌아봐야겠다. 좋은 작품은 여러 번 많이 자세히 볼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돌아오는 월드컵대로의 단풍이 그새 더 풍성해졌다. 짙푸른 가을하늘과 구름이 가슴에 파고든다. 다리 아픈 것도 잠시 잊게 한 시간이다. 이렇게 저렇게 하루가 간다.
9부.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달
1) 반백 년 우정, 가을밤 달빛 아래 다시 피어난 추억 2025.11.4.(화)
가을 대학동기회 날이다. 추워진 날씨 걱정을 했지만, 다행 쾌청한 전형적인 멋진 가을 날씨이다. 힘들게 준비한 L 교장의 마음을 하늘도 감동한 모양이다. 지난 8월, 뜬금없이 P 전 회장의 사퇴로 L 교장이 일을 맡게 되었다. 돌아보면 졸업 50주년이 내년 봄이 아닌가. 그간 어렵게 돈독히 쌓아온 우정을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날려 보내면 안 된다는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고맙다. 오전 11:30. 집결지인 수성못 ‘상화동산’에 서울, 영주, 원주, 경주, 포항. 창원에서 10여 명이 날아왔다.
낮 12시. 수성호텔 별관 5층. 식당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열기가 확 밀려온다. 패밀리 레스토랑 ‘포시즌’ 안은 재래시장 사람 무리 속에 던져진 듯 시끌시끌하다. 평일 점심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대다니,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자 손님이 대부분이다. 점심 특선 29,000원. 깔끔하게 차려진 음식은 마음에 들지만, 식당 안이 너무 시끄럽다. 단체로 온 객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난봄에 방문한 아래쪽 입구의 ‘쿠우쿠우’와 비슷한 가격대다. 그곳에는 주로 가족이 많이 온 듯하나, 여긴 단체 모임으로 많이 찾은 듯 느껴진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 식당 안을 둘러보니 빈자리가 별로 없다. 이런 곳에 올 때마다 소식하려고 다짐하지만, 실천이 어렵다. 적지 않은 식대를 생각해 열심히 먹다 보니 또 과식이다. 쉬운 말로 본전 생각하다가 망하는 경우다. 언제까지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까? 후회할 줄 알면서도 되풀이하는 자신이 좀 한심하다. 내 잘못을 인간의 속성이라고 둘러대면 비겁한 변명이 아닐까.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은 되풀이에 빠진 어설픈 삶이다.
수성못 ‘둥지섬’ 앞의 데크길 산책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멋지게 익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와 갈대숲은 발걸음 옮길 때마다 감성을 자극한다. 예전 파동에 살 때 자주 오던 곳이지만 대학 동기들과 걷는 오늘은 새롭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먼 지역에 살고 있기에 아득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늘 함께 걷는다. 버스킹 장소 난간에서 내려다본 연못 안의 잉어가 징그럽다. 아이 다리보다 굵은 놈들이 한데 모여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내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작고 아담한 크기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리아나 호텔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했다.
오후 3시. 예정대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문시장역에 내렸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에 나섰다. 먼저 동산동 동산의료원 안으로 들어갔다. ‘청라언덕’ 탐방길이다. 위로 죽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선교사 챔니스 고택이 나온다. 대구 최초라고 알려진 사과나무도 있고(지금은 새로 심은 나무다), 옆으로 돌아가면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생각’ 시비도 만난다. 그 노래 속에 ‘청라언덕’이란 가사가 나오기에, 한때 작사가 이은상의 고향인 마산과 청라언덕을 가지고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던 이야기가 생각나 미소 짓는다. 고장을 발전시키려면 멋진 소재를 누가 먼저 스토리텔링 하여 부각하느냐가 참 중요하다. 부근의 계성학교에 근무한 나, 신명여고를 나온 H 선생님은 이곳이 익숙하고 정이 든 곳이다.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 교무실 아담스관 창으로 보면 이곳이 바로 보였다. 지금은 새 아파트가 들어서서 시야가 완전히 가려 안타깝다. 당시의 추억도 도란도란 얘기하며 청라언덕 아래 만세운동 계단을 천천히 걸었다.
계산 성당 옆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에 들어선다. 한국전쟁 후 대구 중구를 배경으로 쓴 소설 ‘마당깊은 집’의 이야기와 등장인물, 당시 피난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놓은 곳이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주인공 소년 길남이를 떠올린다. 나는 여러 번 와 본 곳이나 다른 지역의 친구들은 초행이다. 잠시 돌아가면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을 만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이상화 시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등의 시비가 환영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참 지식인이 걸어야 할 길을 걸은 민족시인 이상화가 아닌가. 경건한 마음으로 시를 눈으로 읽는다. ‘걸림 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이라는 ‘역천’ 시 한 구절이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는 날이다. 마당 한쪽의 석류나무에 잘 익은 대여섯 개의 붉은 석류가 먹음직스럽다.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 이상오 이 사형제를 용봉린학(龍鳳麟鶴) 이라 일컬은 것 같다. 맞은 편 국채보상운동의 발의자인 독립운동가 서상돈 고택도 들렀다. 오랜만에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무척 아프다. 협착이 심해 제대로 다니기가 힘이 든다. 서글프다. 많은 생각이 난다. 그래도 나보다 더 불편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있지 않은가? 이만하면 다행이라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살아가자. 친구들은 향촌동의 ‘대구문학관’ ‘향촌문학관’ 으로 향하고 나는 저녁이 예약된 ‘남송횟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성못 밤마실에 나섰다. 두산 오거리 ‘동성로 왕찹쌀 꽈배기’ 가게 앞 벤치에 옹기종기 앉았다. Y 교장이 갑자기 가게 앞에서 호떡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혼자 먹기가 뭐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 찬성이었다. 호떡 10개와 꽈배기 한 상자를 자기가 샀다. Y 교장은 “이 나이에 길에서 무슨 호떡이냐?”라는 핀잔이 올 줄 알았는데 모두 대찬성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았단다.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 정겹고 호떡 턱을 낸 친구도 고맙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감정과 사랑을 공유하면서 아름답게 익어가는가보다. 소소하고 별것 아니지만 참되고 따뜻한 우정을 느낀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분수 쇼도 끝났고, 그냥 둑길을 걸었다. 머리 위에는 음력 9월 보름의 휘영청 밝은 달이 우리를 축복해 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린 아무 말도 없이 자연 속에 한 장의 그림이 되어 2025년의 가을에 빠지고 있었다.
아리아나 호텔 4011호실. 반백 년 우정을 이어온 동기들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잠시 뒤 올해 ‘사랑의 저편’ 소설집을 출간한 L 교장, 시조집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을 발간하고 ‘이호우 이영도 시조문학상’을 수상한 S 교육장에게 감사와 격려금을 전달하는 조촐한 식도 있었다. 그리고 레스토랑 ‘포시즌’의 점심 식대를 낸 S 교육장, 호텔 숙박비를 찬조한 L 교장의 마음도 곱고 아름답다. 이제 늘 하던 내 하모니카 연주 시간이다. 전에는 다음 날 아침 간식 시간에 주로 연주했지만, 오늘은 늦은 밤에 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야 했기 때문이다. 준비해 온 하모니카를 풀었다. 올봄에 새것으로 다 바꿔서 유난히 반짝거린다. 작은 MI 스피커를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가을을 노래하는 이정옥의 ‘숨어우는 바람소리’를 첫 곡으로 연주에 들어갔다. 분위기 있는 곡은 사람을 따뜻한 감성의 바다로 밀어넣는다. ‘비내리는 고모령’ ‘석양’ ‘장녹수’ ‘바람’ ‘동백 아가씨’ 등 메들리로 연주했다. 썩 잘 하지는 않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주는 고운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고, 연주할 수 있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저렇게 또 삶의 절정이 지나간다. 내일 아침 간식으로 인절미와 술떡, 과일을 챙겨준 H 선생님이 고맙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다.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기도하며 모두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2) 어머니의 세월, 수목원 국화, 그리고 일상의 기적 2025.11.16.(일)
어제 오후(토) 범물동 어머님 댁에 들렀다. 주로 일요일 오전에 갔지만 내일은 팔공산 단풍 구경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과일과 구운 달걀, 용돈을 준비해서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 계시던 어머님이 “뭐 하러 또 왔노?” 하시며 일어나신다. 말씀은 늘 그렇게 하시지만 속으로는 무척 반가우신 모습이다. 40kg 정도의 마른 몸을 겨우 일으키시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어제부터 이유 없이 왼쪽 다리가 아프네. 월요일에는 병원에 가서 주사라도 맞아야겠다.” 별일 아닌 듯이 말씀하시지만 힘든 모습이다. 가늘고 마른 우듬지 같은 다리를 살짝 만졌다. 자기 한 몸 움직이기도 어렵지만 자나 깨나 우리를 걱정하시고 기도하시는 어머님의 일생. 한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삶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련하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따금 한 번씩 방문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내 민낯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다. 항상 내 마음속은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다투고 산다. 94년의 풍상(風霜)이 작은 삶이 아니다. 20여 년 전 큰 수술한 허리가 아파서 요즘은 휠체어 도움 없이는 몇 발짝도 거동하기 어렵다. 요양보호사 도움 없이는 혼자 살아가기 힘든 몸이 아닌가? 내 다리가 아프다는 것은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마음과 몸이 함께 하지 못하고 허둥거릴까?
일요일 아침이다. 전형적인 코발트 빛 하늘, 파란 물이 짜질 것 같다. 거실에서 본 유건산 단풍도 절정이다. 짜릿한 햇살 속에 펼친 풍경은 울긋불긋한 먼 산에 온 기분이다. 어제까지 아프던 다리도 좋아진 느낌이라 마음이 편하다. 집사람이 팔공산은 다음에 가고 오늘은 수목원 국화축제를 가자고 한다. 수목원은 신매역 입구에서 급행 10번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이른 점심을 먹고 12시에 급행 버스를 탔다. 승객이 거의 없다. 대구미술관을 거쳐 파동 터널을 통과해 가는 코스라 승용차로 가는 것보다 편리하다. 10여 분 달렸을까? 대구미술관에서 얼굴이 익은 한 노인이 승차한다. 앞 좌석에 앉는 듯하더니 우리가 있는 뒤로 오는 것이 아닌가. 대곡동에 사는 큰 처남이다. “아이고 형님, 웬일입니까?” 3년 전에 보고 처음이다. 간송미술관에 고려청자와 백자 전시를 보고 오는 중이라고 한다. 달포 전에 왔는데 12월에 전시물을 철수한다기에 다시 보러 왔다고 한다. 안부를 묻고 내릴 동안 한 20분 예정에 없던 미팅을 했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다. 장인이 돌아가시고 성격이 맞지 않아 소원해진 사이였는데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알 수 없는 삶의 오묘함을 다시 음미하게 한다. 옛글에서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이란 글도 입에서 맴돈다.
수목원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사람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향이 짙은 싱싱한 꽃도 좋지만 부대끼는 사람 구경도 덤이다. 작년 이맘때도 퇴직 동료 모임에서 국화축제를 왔다. 그때도 꽃이 절정이었지만 오늘은 더 황홀하고 화려하다. 작년에는 중앙분수대 분수도 올라갔지만, 오늘은 분수는 조용하다. 노란 국화가 역시 대장 꽃이다. 짙푸른 하늘과 어울리는 멋진 꽃 색깔이다. 붉은 꽃, 흰 꽃, 주황 꽃 등 색색이 온갖 형상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앞발을 쳐든 커다란 말은 기본이고, 긴 상아를 앞세운 코끼리 두 마리, 물 차오르는 듯한 고래, 화려하고 큰 나비, 눈이 크고 코에 장식물을 단 고양이, 귀여운 강아지 등 다양하다. 작년보다 더 다채롭고 아름답다. 매년 발전하는가보다. 여기서는 누구나 순수의 꽃세계에서 아름다운 아기가 된다. 국화 향이 온몸에 가득 밴다. 곳곳에 추억을 남기는 사진찍기에 바쁘다. 황토로 된 맨발 걷기 길을 따라 안쪽 수목정으로 천천히 걸었다. 단풍은 핏빛으로 세상을 수놓고 있다.
한 시간 반 머물렀다. 지친 다리를 식히려 입구의 스타벅스 카페에 들어갔다. 여기도 사람들로 시장판이다. 휴일이라 더 바글바글한다. 운 좋게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케일 사과주스, 프렌치 크루와상을 주문했다. 개인적으로 스타벅스엔 의자가 편하지 않아 주로 투썸 카페를 많이 이용한다. 얼마 전에 총각 시절 초임지 봉화 법전의 옛 제자인 L이 생일 선물로 보내온 ‘스타벅스 e 카드’로 결재했다. 반백 년이 지났는데 잊지 않고 선물을 준 그녀가 감사하다.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구경한다. 삼거리에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차량, 형광봉을 들고 정신없이 교통 정리하는 경찰들이 고맙고 안쓰럽다. 어? 우회전 위반 차량 한 대가 경찰의 제지로 얌전히 가장자리로 정차한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한다. 너무 복잡해 우측 차선에 붙지 못해 우회전 섬을 지나 직진 차선에서 우회전하다가 걸렸다. 직진해서 유턴해 와야 하건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후 3시. 시지행 급행을 타고 귀가하니 4시가 넘었다. 많이 걷지 않았지만 피곤하다. 멋진 곳을 다녀왔지만, 예전과 같은 감흥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시큰둥했다. 나이 탓일까? 세월 탓일까? 이렇게 무감각해지는 내가 싫어진다. 평상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해도 세월은 변하지 않건만, 중심 잃은 내 마음만 낡아간다. 밖으로는 지인의 슬픈 소식이 많았고, 안으로는 허리협착증으로 방황 중이다. 간사하고 좁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까? 그냥 그냥 무덤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알 수가 없다. 손바닥 뒤집어 생각하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얼마나 큰 행복이고 기적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모든 일을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과, 아무 일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지금부터라도 모든 일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자. 고마움을 모르고 산 어리석음에서 빨리 벗어나자.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자.
3) 아픈 마음을 닦아내며 배우는 평상심 2025.11.19.(수)
오늘은 일기예보로 제일 추운 날이다.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갔다. 실제로는 다행 바람이 없어서 그렇게 춥지는 않다. 간밤 퇴직 동료 모임 때 먹은 커피 탓인지 잠을 많이 설쳤다. 하빈 큰집에 출강하는 수요일은 긴장하는 날이라, 전날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어제는 즐기지 않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영향도 작용한다. 7시. 지하철 안은 변함없이 활기가 돈다. 출근, 등교 등 저마다 일상을 이 지하철에서 시작한다. 나도 즐겨듣는 칼럼을 들으려고 귀에 삼성 라이브 버즈 이어폰을 꽂고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지그시 눈 감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나머지는 휴대전화 화면에 빠져 있는 아침 풍경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우울했다. 척추협착증 증세로 다리가 계속 아프다. 마음이 어떨 때는 바다같이 넓더니, 갑자기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이 좁다. 한의원 치료를 한 지 석 달이 훌쩍 지나갔다. L 원장이 예상한 3개월이 되면 거의 완치가 될 줄 알았건만 현실은 한겨울이다. 처음 한 달 치료하니 80% 정도 좋아진 기분이었다. ‘아! 이대로 가면 두 달 정도면 다 낫겠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을 듯 나을 듯하더니 다시 아프고, 오른쪽 왼쪽 번갈아 아프다. 나 원 참! 기대가 무너지니 실망이 갑절로 바뀐다.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마음만 허전하다. “천천히 믿고 기다려봐라.”라는 추천해 준 친구의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힘든다. 평상심이 무너졌다. 병이란 석 달 예상했지만, 한두 달 안에 완치될 수도 있고, 네다섯 달 지나야 완치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이치를 잘 알지만, 막상 내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쉽게 허락하지 못한다. 아플 때는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을 생각하며 위로하지만, 잠시 지나가면 잊어먹는다. 얇고 간사한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빈 큰집은 농촌이라 도심보다 춥지만, 짙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는 상쾌하다. 육중한 철문 대여섯 개를 지나 강의실에 들어섰다. 수강생들이 그림 그린 듯이 말없이 앉아 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세 파트로 나누어 개별 수업에 들어간다. 독방 생활하는 K는 40대 초반의 청년이다. 눈이 소녀처럼 크고 덧니를 가진 그가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신적으로 조금 흔들리지만 명랑하게 수업을 잘 따라온다. 독방에서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업 중에 말이 많다. 필요 없는 질문을 불쑥하기도 해 교도관에게 주의받기도 한다. 밖에서는 운전면허도 가지고 운전하며 지냈다고 하지만, 한글 쓰기는 아직 올챙이 수준이다. 내 첫째 아들과 같은 또래라 더 애정을 갖고 대해 준다. M님의 수업은 방에서 제일 높은 단계다. 그의 일상을 글로 써 오면 맞춤법에 맞게 정리하고 내용을 첨삭한다. 오답 노트를 만들어 습관적으로 틀리는 부분을 정리해 메모해 준다. 오늘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참 마음이 아팠다. 장기수인 그는 10여 년째 감옥살이 중이다. 지금도 매일 꿈을 꾸며 잠꼬대를 많이 하는 것이 걱정이란다. TV에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를 본 날에는 꿈에 맹수가 자기를 공격하기에 큰 소리로 잠꼬대하고, 때로는 벌떡 일어나기까지 해서 잠을 설친 동료들에게 다음 날 계속 사과한다. 얼마나 불안하면 그런 행동을 할까? 지은 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니 너무 측은하고 아련하다. 평상시에는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잔잔하게 말을 하는 분이 아닌가? 무의식 세계인 꿈속에서 늘 쫓기고 공격당하는 그의 정신세계가 내내 안타깝다. 오늘 수업 중 접견이 있어 다녀온 뒤 조금 밝아진 모습에 나도 마음이 펴졌다.
문양역 입구에서 사과를 한 박스 샀다. 큼직한 부사가 먹음직하여 승용차도 없지만, 덜컥 욕심을 부렸다. 운반이 문제였다. 큰 비닐봉지에 둘로 나누어 담았다. 운반 도중 잘못 부딪치면 상하기에 조심해서 지하철 경로석에 앉히고 나는 서서 왔다. 바보 같은 짓 같았지만, 흐뭇하다. 늦은 점심 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맑지 않고 멍하다. 이럴 때는 나는 집 청소를 한다. 청소기로 구석구석의 먼지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깨끗하게 걸레를 빨아 천천히 거실과 방을 돌아다니며 바닥을 훔친다. 한참 힘들여 정성껏 걸레질하다 보면, 바닥보다 마음이 깨끗하고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흐릴 때는 집이 깨끗해도 청소로 치유한다. 이따금 모임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퇴직한 후 청소나 설거지를 맡아 하는 남자가 많다. 청소나 설거지가 내게는 취미 겸 최고의 힐링 수단이 된다.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설거지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하며 취미로 즐겼다는 일화가 있지 않은가?
저녁을 먹고 신매광장에 산책할까 하다가 아파트 놀이터에서 걷기로 했다. 운동장보다 좁은 공간이지만 나름대로 루틴을 만들어 실천한다.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걸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무죄지만 살인죄로 몰린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 첫 탈주에 실패해 최악의 독방에 갇힌다. 그 좁은 독방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운동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비교하며 살면 좋지 않지만, 비교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위보다 아래를 보고 살면 모든 것이 따뜻해진다. 내 삶에 긍정적 힘을 주는 비교는 얼마나 좋은가? 좋은 습관이 좋은 삶을 만들어간다. 천성은 변하기 어려워도 습관은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조금씩 비우는 법이 눈에 보이는 듯한다. 실천은 아직 먼 거리에 있지만 친하고싶다. 오늘 밤은 꿀잠이 되지 싶다. 울퉁불퉁하고 자잘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
4) 작은 생명, 큰 인연 2025.11.28.(금)
갑자기 식구가 셋이나 불어났다. 조용하던 집이 분주해졌다. ‘라라’와 ‘민트’ 그리고 ‘코코’가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집사람이 아프리카 달팽이 세 마리를 분양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주일 전에 지인으로부터 달팽이를 키울 수 있냐고 연락을 받았다. 반려견이나 다른 생명체를 집안에서 키워보지 않은 나는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아내는 별생각 없이 덜컥 승낙했다. 손자들이 자주 오기에 달팽이 크는 것을 보면 손자들이 즐겁지 않겠냐가 이유였다. 인터넷에서 사육 방법을 검색하고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생명을 키우는 행위라 여러모로 마음 쓸 일이 많다. 정성과 손이 많이 가야 잘 키울 수 있다. 사흘이나 고민한 뒤 마음을 굳혔다.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달팽이다. 갈색 줄무늬를 가진 백와 한 마리와 밝은 노란색 줄무늬의 금와 두 마리다. 살갗은 모두 아이보리색으로 보기에는 귀엽고 예쁘다. 사육에 계속 반대했지만, 집사람이 집에 데려오니 어쩔 수 없었다. 손자를 생각해 키워 보겠다는데 어쩌랴. 움직이는 생명체이기에 이름을 지어주면 좋지 싶었다. 한나절을 함께 고민한 뒤 이름을 지었다. 백와는 ‘라라’, 금와 큰 놈은 ‘민트’ 조금 작은 놈은 ‘코코’로 정했다. 아내와 첫째 손자와 둘째 손자를 위한 이름이다. 다행히 적응력이 강하고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키우기가 쉽다고 하지만 글쎄다. 나는 식물도 실내에서 잘 키우지 못한다. 예전에 지인에게서 춘란을 열 포기 선물 받았다. 베란다 가득한 춘란을 보고 즐거웠다. 한 해가 지나 꽃을 피워 좋아했지만, 봄가을이 세 번 지나고 나서 모두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때부터 정성이 많이 가는 식물은 키우지 않기로 했다. 창문만 열면 온통 자연이 펼쳐지는 곳인데 답답하게 왜 식물을 실내서 키울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도 펼쳤다. 달팽이는 야행성이다.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이 되면 플라스틱 생활통에 붙어 움직인다. 배설물도 자주 치우고 먹이도 줘야 하기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열대지방 생물이기에 온도와 습도이다. 따뜻한 온도와 70~90% 습도를 유지해 줘야 한다. 새벽에 나도 모르게 분무기를 들고 있는 내가 우습다.
날씨가 추워지니 새벽 운동하는 사람이 적다. 11월 중순 지나니 매호초등 운동장엔 남자들만 보인다. 열심히 맨발 걷기 하던 여자들은 하나둘 나오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이기에 추운 날씨에 자칫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고혈압약을 복용하는 나도 작년 겨울에는 나오지 않았는데 올해는 아픈 다리 때문에 나가고 있다. 한의사의 처방이 계속 30분 이상 걷는 것이 좋은 치료법이라 하기에 가능한 한 실천하려 애쓴다.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가면 나도 새벽 운동은 힘들지 싶다. 다행 오늘은 다리 상태가 좋아 크게 아프지 않다. 이제 다 나아가는가? 기쁨 반 의심 반이다.
약간 싸늘하지만 하늘이 너무 맑다. 아침을 먹고 백자산의 ‘경산 치유의 숲’을 찾았다. 승용차로 20여 분 거리라 가깝고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놓은 산책길이 마음에 든다. 파동에 살 때 용두골에 자주 갔기에 산길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지만, 찾는 사람이 드물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경쾌한 소리와 말라가는 풀꽃들이 늦가을을 지키고 있다. 아늑하고 고요하다. 짙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못해 짜릿하다. 수년 전 용두골 산책을 하며 에메랄드빛 창공을 보며 쓴 글이 떠오른다.
저 용두골 푸른 가을 하늘 / 삼백 평 정도만 사고 싶네 / 맨발로 걷고 / 얼갈이배추도 심어야지 / 앙증맞은 야생화들 / 구절초 산국 쑥부쟁이 / 환한 달밤이면 하늘하늘 / 바람결에 춤도 추리라 / 두 팔 벌리고 / 사뿐사뿐 리듬을 맞추어야지 / 내가 좋아하는 / 벤처스 악단의 경음악을 들으며 / 어차피 삶이란 / 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목 / 어깨 장단에서 나온 에너지 덕분에 / 덩실덩실 / 가을은 사람을 철 들게 하네
붉은 단풍이 병풍처럼 둘러친 숲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잠시 뒤 팔각정자를 만난다. 반들반들하게 청소된 마룻바닥에 햇살이 춤을 춘다. 고요하고 아늑한 풍경이다. 찬 날씨라 정자에는 올라가지 않고 마음만 앉았다가 지나친다. 그믐달처럼 굽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잎은 사라지고 작은 구슬 크기의 말라붙은 이름 모를 열매가 곶감처럼 매달려 산길을 지킨다. 연주황색으로 바싹 마른 수국들도 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는 듯 황량하다. 여섯 구비를 감돌아 올라가는 데크길에 들어섰다. 짧은 길이지만 비탈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올라가게 만든 나무데크는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데크 중간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치유의 숲이다. 백자산 정상으로 난 길은 임도와 연결된다. 가볍게 산책하기는 조금 먼 거리이다. 시간이 넉넉할 때 전체를 돌아보기로 하고 반 시간 남짓 짧은 코스의 숲길을 즐겼다. 완치되지 않은 다리지만 쉬엄쉬엄 살아가라는 삶의 섭리로 알고 산책하니 기분이 좋다. 점심은 K 복지관에서 먹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는 하이라이스다. 오늘도 기적의 하루를 보냈다. 큰 탈 없이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순간이 고맙다.
10부. 무소유의 달
1) 돌아온 민트, 기적 같은 하루 12.02.(화)
큰일 났다. 비상! 아침부터 긴급사태다. 새벽에 거실에 나와 달팽이 집을 살피니 위의 뚜껑이 열려있고, 금와인 ‘민트’와 ‘코코’가 보이지 않는다. 아뿔싸?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난밤 자러 갈 때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 그냥 둥근 생활통 집에 길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안녕 인사하고 취침했는데……. 건조한 밖에 오래 머물면 최악의 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내와 나는 여기저기 정신없이 찾았다. 다행 작은 ‘토토’는 냉장고 옆 작은 소반 뒤에 붙어 있었다. 한숨 돌렸다. 문제는 제일 큰 ‘민트’는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반경 2~3m를 중심으로 자잘한 물건도 치우고, 혹시 높은 곳에 올라갔나 하면서 구석구석 살펴봐도 오리무중이다. 아내의 얼굴이 울상이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연사도 아니고 사고사가 되면 큰일이 아닌가?
아내는 오전 요가 강습도 가지 않고, 전전긍긍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건조한 곳에서 ‘민트’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어진다. 다시 주변을 정리하며 이곳저곳 찾아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하! 재래시장에서 잠시 한눈을 팔다가 아이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달팽이는 배를 밀고 기어가기에 움직이는 속도도 느리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거실에 잡다한 물건은 많지만, 바닥은 흰색이라서 금방 찾지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이 자꾸 지나간다. 오래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 말라붙은 그를 발견하면 큰일이 아닌가. 입맛이 없어진 아내는 아침도 생각이 없단다. 별것 아닌 달팽이 한 마리가 사라져도 이 지경인데, 집안에 큰일이 나면 어떤 마음일까? 매호지 산책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걱정이 되어 다시 카톡으로 물었다. “‘민트’ 찾았나?” “속상해 누웠다.” “할 수 없지. 다 운명이니까. 조금 짧고 길고 차이가 아닌가?”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다.” 찬바람에 걷고 있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이 상한 아내는 범물동 제수씨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집에서 밥 먹을 생각이 없단다. 지난주부터 서로 시간을 맞춰 봤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오늘 다행 약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수씨가 속상해 있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한다. 들안길 ‘진가네순두부보쌈’집을 추천했다. 동생 부부가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맛집인지 오후 1시가 지났어도 손님이 줄을 이었다. 통이 큰 제수씨 덕에 ‘청국장 순두부’와 ‘고등어구이’ ‘들기름 두부구이와 참나물무침’ 등으로 포식했다. 커피는 자주 가던 ‘파동 투썸’을 찾았으나 작년에 문을 닫았다. 다시 스파밸리 건너편 ‘가창 투썸’ 이층 창가에 자리 잡았다. 여긴 창밖이 개울이고 산이다. 창으로 펼쳐진 마른 겨울 산과 푸른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평온해진다. 달팽이 사건으로 속상한 아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아직 찾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베란다로 나가니 초겨울 개울물 소리가 경쾌하게 귀에 걸린다. 물과 산과 하늘을 보면서 자잘한 많은 생각에 빠진다. 살아있는 생명을 키우는 것은 참 어렵다. 달팽이 한 마리가 무슨 문제인가? 내게 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라져도 아무 일도 아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작은 인연이다. 인연의 길고 짧음은 순간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식물이나 작은 미물에도 정성을 쏟고 사랑으로 대하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일부가 된다. 무심히 스쳐 대하지 않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우주가 있고 내 삶이 보인다.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만물의 운명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나직히 읊어본다.
저녁 9시. 휴대전화로 경산 처형과 달팽이 이야기를 하던 아내가 갑자기 거실 창가 커튼 아래를 살펴본다. 처형이 다시 이곳저곳과 베란다 쪽 이불 아래도 살펴보라고 했단다. 에어컨 뒤쪽의 커튼을 살피다가 아내가 갑자기 소리친다. “찾았다!” 깜짝 놀랐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민트’가 커튼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변에 배설물도 있다. 여기는 살던 생활통 집과는 반대편 5~6m나 떨어진 곳이 아닌가. 설마 이쪽 끝으로 온다고는 생각조차 못 한 곳이다. 다행이다. 아직 마감할 운명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인생과 닮았다. 삶은 9할이 운이라는 친구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자기 집에 넣어주고 영양식과 상추, 수분을 듬뿍 주었다. 골든타임이 얼마일지 몰라도 가출 발견한 새벽부터 15시간이 지났다. 집 나간 아이가 돌아온 것 같다. 하루가 꿈같이 흘러간다. 무사한 ‘민트’와 ‘코코’가 고맙다. 지금 여기가 기적이고 행복하다. 깨알 같은 서민의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
2) 창밖에 찾아온 팔공산 2025.12.8.(월)
쾌청한 날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횡재를 한 날이다. 뒤 베란다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태왕 아파트 위로 살짝 보이는 산이 깨끗하게 보인다. 아니, 우와! 비로봉이다. 팔공산 정상이 똑바로 보이는 게 아닌가! 거리를 검색하니 19.5km 정도이다. 거실 서랍에서 망원경을 가져와 자세히 살펴보았다. 왼쪽에는 군부대 통신시설이 있고 옆에는 기업체 통신시설 안테나가 여러 개 있다. 다른 곳은 아파트에 가려 동봉(미타봉) 쪽은 보이지 않지만, 비로봉은 또렷하다. 집에서 팔공산 정상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행운인가? 작은 로또 당첨이다. 왜 일찍 알지 못했을까? 곰곰 생각하니, 전에는 흐린 날 별생각 없이 본 탓이다. 매호동은 북쪽 가까운 곳에 금호강을 끼고 툭 트인 곳이다. 이따금 매호지 산책길에서 팔공산 정상 능선 부분은 자주 본다. 근처 카페 ‘케빈’ 2층에 앉아 통유리 창을 통해 비로봉과 동봉, 넘실대는 능선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산을 좋아했기에 팔공산은 수도 없이 오른 곳이다. 학창 시절 산악회에 가입한 이후 즐겨 찾은 산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휴일이면 자주 팔공산에 올랐다. 단풍이 좋은 가을에는 한 달에 4번이나 찾은 추억도 있다. 당시는 팔공산 순환도로가 개통되기 전이라 동화사를 지나 염불암 가는 길로 자주 갔다. 정상을 가지 않을 때는 주로 염불암까지 산길을 걸었다. 염불암 물맛이 시원하고 감칠맛 났다. 한때는 큰 물통을 가지고 와서 매달 한 번씩 길어올까 하는 생각도 했다.
대학 2학년(1973년) 때이다. 우리가 주축이 되어 팔공산 국어과 등산을 갔다. 염불암 가는 길을 따라 부도암을 지나 30분쯤 올라가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돌아가면 아담한 ‘팔공산장’이 나타난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20여 명이 행사하기 좋은 곳이었다. 산장에 짐을 풀고 등산대장 Y 선배의 인솔로 염불암을 거쳐 동봉을 오른 추억이 아스라하다. 능선길 바위와 바위를 타는 길이 아찔했지만, 회상해 보면 풋풋한 푸른 청춘이 살아있는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이었다. 해묵은 사진첩을 열어 그날을 다시 살펴본다. 동봉을 오르기 직전 6m 높이의 큰 석불입상을 만난다. 서쪽을 보고 있는 거대한 화강암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이다. 팔공산 정상의 대표 불상인 갓바위 부처님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알려진다. 그때는 불상만 덩그러니 있던 기억이 살아난다. 당시 최고봉인 비로봉은 군사지역이라 철조망으로 막았기에 올라갈 수 없었다.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 비로봉은 눈으로만 보고, 오른쪽 동봉을 올라 염불암 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즐겼다. 계곡이 가팔라 나이가 들고는 그 코스는 가기 힘들었다. 집안에서 비로봉을 보며 온갖 추억을 복기해 보는 느낌도 재미있고 좋다. 언제 다시 동봉과 비로봉 정상을 밟을 수 있을까? 마음은 허락하지만, 몸은 어렵다. 다행 군위 부계면 동산계곡을 통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지 싶다. 지금은 군사시설도 해제되고 비로봉 뒤편 하늘정원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다. 언제 핏빛 진달래가 정상을 물들이는 시절 동봉 오를 날을 소망해 본다.
***동기 모임 날이다. 내년부터 A 님이 ***학장을 맡기로 했기에 조촐한 자축연을 갖기로 했다. 청도 이슬미로의 돈가스 맛집 ‘소우주’를 추천한다. 여기는 여름철 아이들 물놀이장으로 유명하다. 나도 2년 전 손자들과 한번 왔다. 당시 첫째 손자 **는 다른 아이들과 물놀이에 정신이 없었고, 둘째 **이는 어려서 유모차에 태우고, 손주 바보인 우리 부부가 돌보미로 어슬렁거린 곳이다. 경산 수정사 입구에서 A 님을 태워 청도로 달렸다. 용암온천 지나 테마랜드 산길 넘어가는 중턱에 있다. 11시 반쯤 도착하니 이른 시간이라 조용하다. 잠시 뒤 팔조령을 넘어온 J 님과 합류했다. 어딜 가나 기계가 손님을 맞이한다. 밖에 설치된 키오스크로 더듬거리며 시행착오 거친 뒤에 겨우 먹거리를 주문했다. 세월이 더 흐르면 기계 조작이 어려워 밥 한 그릇도 주문 못 할까 두렵다. 아날로그의 정겨운 시절이 그리워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공부해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다. ‘샐러드파스타’ ‘목살필라프’ ‘돈가스플레이트’ 로 입을 호강시켰다. 소문대로 간간하고 달곰삼삼한 감칠맛은 추천하고 싶다. A 님은 학장이라는 중책을 맡기로 했지만, 걱정을 많이 한다. ***회장단과의 협조와 조화가 필수조건이다. 봉사한다는 좋은 뜻으로 맡았기에 잘 굴러가리라 얘기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유등지 근처 카페 ‘오브제토’로 자리를 옮겼다. 집사람과 자주 온 곳이라 언제 와도 포근하고 아늑하다. 술 담배를 안 하기에 퇴직 후에는 자연스레 카페 순례가 취미로 자리 잡았다. 10여 년 사이에 청도와 경산에 대형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대부분은 한두 번 가보지만 좋은 곳은 거듭 찾게 된다. ‘오브제토’도 그중 마음에 드는 카페이다. 주문한 라테에 우유로 그린 ‘라테아트’가 앙증스럽다. ‘프리 푸어링’이란 기법의 그림인데, 귀여운 곰인형으로 왼쪽에는 나뭇잎이 다섯 개 그려져 있다. 선뜻 마시기가 아까워 기념 촬영을 하고 한 모금씩 음미했다. 세상살이가 다 비슷하다. 반짝이고 자질구레한 정담에 빠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J 님이 선물로 가져온 ‘포인세티아’가 아름답고 고맙다. 작년에도 ‘포인세티아’ 선물을 받았는데……. ‘축복’이란 꽃말처럼 따뜻하고 행복을 주는 꽃이다. 다들 그냥 그냥 살아간다. 뭔 특별한 일이 있겠는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또 내일이 된다. 지금 여기 무사히 존재하는 삶이 행복이고 기적의 삶이다. 내일도 기적의 삶으로 살고 싶다.
3)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환하다 2025.12.13.(토)
유난히 포근한 주말. 겨울이 잠시 숨었는지 좋다. 오늘은 초등 동기 C와 점심 약속이 있다. 지하철 3호선 서문시장역에 내리니 발 디딜 틈이 없다. 약속 장소인 ‘만남의 광장’ 가는 길에는 사람의 홍수다. 따뜻한 날씨에 휴일이라 그런가. 길게 늘어선 노점 국숫집과, 길거리 호떡집엔 손님들로 시끌시끌하다. 부딪치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사람을 피해 걷는 것도 힘이 들지만 싫지 않다. 마치 1970년대, 통행금지가 하루 없는 크리스마스 날 밤에 동성로를 걷는 기분이랄까. 역시 재래시장의 맛은 간단한 길거리 먹거리가 으뜸이다. 우리는 늘 찾던 ‘선아 국숫집’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아직은 가게가 붐비지 않아 다행이다. 재직할 때부터 즐겨 찾던 국숫집이다. 퇴직 후에도 친구와 서문시장에서 모임을 하면 자주 찾는 단골집이다. 여기서 이따금 Y 선생, S 교장 등 옛 직장동료들도 우연히 만날 때도 있다. 그들도 재직할 때의 옛 맛과 추억을 잊지 못해 찾는 듯하다. C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여기서 미팅한다. 오늘도 뜨거운 칼국수로 배를 달래고 일어섰다.
커피는 길 건너 서문교회의 ‘카페 블레싱’이 좋다. 시장 안의 카페는 장소도 좁고 사람이 많아 너무 어지럽다. 잠시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분위기와 멀다. 교회에서 직영하는 곳이 아니라, 커피값은 대형 커피점과 비슷하다. 넓은 장소에 편안한 의자, 깨끗하고 높은 천장은 조용하게 담소하며 휴식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파동에 같이 살았던 C와는 지내온 안부로 시작해 속에 있는 깊은 얘기도 털어놓으며 서로 힐링하는 사이다. 생각의 결이 비슷하다. 비교적 건강한 체질이지만 그도 조금씩 낡아가는 건강을 털어놓는다. 최근에는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는단다. 무언가 불안한 생각이 자주 생겨 의욕이 떨어지고 정신이 가라앉는 느낌이란다. 아무에게나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한다. 제일 좋은 답은 끝까지 잘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은 경험을 설명하며 긍정적인 길로 안내한다. 칼럼에서 공부한 얘기도 하고, 나름대로 치유한 방법을 편한 마음으로 주고받다 보면 정답이 아니라도 많은 힐링이 된다. 결국 슬프면 울고, 즐거우면 웃고, 걱정이 있으면 걱정하고, 그냥 그냥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다. 한 겹 껍질을 벗겨보면 다들 비슷하게 고민하고 살아간다. 종종 내 안의 불안을 내려놓고 기쁨을 방해하는 두려움과 맞서는 것이 좋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훌쩍 시간이 달아난다.
오후 2시 30분 귀가했다. 참, 오늘은 2시부터 ‘청춘탁구클럽’ 송년회 날이다. 빨리 오라고 관장님의 재촉 전화가 왔다. 급히 구장에 도착하니 푸짐한 먹거리 상이 준비되어 있다. 관장님과 여회원들이 며칠 동안 준비했다. 행운상 상품도 두둑하다. 송년회 모임은 경기도 중요하지만 즐겁게 놀고먹는 것이 우선이다. 오전반, 오후반, 저녁반이 함께 섞어 조를 짜 복식 게임으로 시작했다. 단식 게임은 없다. 20여 명이 참가해 복식 10개 팀을 A팀과 B팀으로 나누었다. 다시 실력이 비슷하게 조를 짠다. 나는 B팀으로 청도 소방관인 A 님과 한 조가 되었다. 토너먼트로 4게임을 해서 승률로 우승 팀을 뽑는 방식이다. A팀 우승 조와 B팀 우승 조가 결승에서 마지막 승자를 가린다. 나는 사실 복식 게임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상대 팀과 실력이 크게 벌어지면 힘들지만, 팀의 조화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공격형이면 실수가 잦고, 수비형이면 득점에 어려움이 많다. 한쪽이 공격형이고 다른 사람은 수비형으로 조를 이루면 제일 좋은 성적을 낸다. 나름으로 열심히 뛰었으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척추협착증으로 석 달이나 놀았기에 실력 부족이다. 다시 모두가 같이 즐기는 색다른 게임을 시작한다. 전체를 10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 경기하는 청백 게임이다. 이 게임은 처음 해 본다. 처음에 양 팀이 순서대로 한 명씩 나와 경기를 시작한다. 점수를 잃는 팀은 다음 선수로 교체한다. 잃는 팀이 먼저 공격한다. 점수를 계속 따는 선수도 5점을 따면 교체한다. 이렇게 죽 돌아가며 순서대로 해 전체 점수가 42점을 먼저 내는 팀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고수가 실수하기도 하고 하수가 네트플레이나 모퉁이 맞는 행운으로 점수를 얻으니 박장대소하며 응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수 출신인 관장님의 제안으로 재미있는 게임 방법을 체험했다.
오후 6시. 행운권 추첨도 끝낸 뒤풀이 시간에 슬그머니 집으로 왔다. 피곤했기에 몸이 힘들다고 신호가 왔다. 끝까지 함께 즐겼으면 좋지만, 무리를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종일 함께 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맑고 환하다. 기적 같은 소소한 삶을 아름답게 누렸으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4) 달팽이에게서 배우는 삶의 본질 2025.12.15.(월)
별 볼 일 없이 사는 듯해도 바쁘다. 낮 12시. 수성못 ‘쿠우쿠우’에서 모임이다. 얼마 전 초등동기 L이 모친상을 당해 잘 치렀다는 감사로 초대한 날이다. “에고! 안 해도 되는데”라고 사양 문자를 보내도 거듭 얘기한다. 고맙게 승낙했다. 동기 얼굴도 보고 살아가는 모습, 겸사겸사 수다를 즐길 시간이다. 승용차보다 버스를 타기로 했다. 편한 마음으로 이어폰을 통해 좋아하는 칼럼도 감상할 수 있고, 유튜브로 전문가의 하모니카 강습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성 6번’을 타면 50분 걸리는 거리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했다. 버스 차창으로 펼쳐진 경치와 사람 구경도 재미있었다. 갑자기 우리 집 새 식구가 된 달팽이를 떠올린다. 이 미물을 언제까지 잘 키울 수 있을까? 생명이기에 정성과 관심을 쏟아야 좋은 결과가 온다. ‘따뜻한 외로움’ 내 글을 읽은 한 대학 동기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녀는 예전에 키우던, 예쁘고 도도한 고양이의 매력을 잊지 못해 기회가 되면 다시 ‘먼치킨’이란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한다. 고양이에 대해 잘 몰라 ‘먼치킨’을 검색해 봤다. 작고 보잘것없는 달팽이와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된다. 크기나 값이나 생명력이나 큰 차이가 있다.
얼마 전 달팽이 가출 사건을 떠올리다가, 달팽이가 사라졌을 경우와 고양이가 명을 다했을 때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했다. 당연히 대부분은 달팽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그때 고려시대 백운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說)’이란 수필을 떠올렸다. 손님과 내가 대화하는 형식의 글이다. 손님은 “개(犬)가 죽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이(蝨)라는 미물이 죽는 것은 하찮다.”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화로에 이를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나는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라고 내가 반론한다. 손님은 다시 “개는 크고 이로운 짐승이지만 이는 미물이고 해로운 것인데, 이를 개와 같다는 것은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모든 생명은 크든 작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한다. 개와 이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내가 당신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나는 대답한다. 크기와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사실(표면)만 보는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모든 생명체는 크기와 관계없이 소중하다는 보편적 깨달음, 사물의 본질(이면)을 보라는 이야기이다. 이 고전 내용을 잘 알면서도 나는 아직 본질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언제쯤 철이 들까? 여든이 넘어도 철이 들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흐른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수성못에 도착했다. 살랑거리며 바람은 불지만, 햇살이 따스해 겨울 같지 않다. 상화동산의 상화시비 곁을 지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를 눈으로 감상한다. 주말의 행사 준비로 무대장치를 만든다고 쿵쾅거린다. 못 둑을 천천히 걸어본다. 눈 가는 곳 따라 마음도 시원하고 맑다. 아름답다. 좋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유럽 이름난 어떤 호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곳이 아닌가. 일렁이는 물결에 윤슬이 반짝이고, 물가 가장자리 허리 굽혀 인사하는 억새들의 몸짓에 미소로 화답하며 산책길을 어슬렁거린다. 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적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소근대며 걷는 발걸음 소리에 을사년은 천천히 저물어간다. 멋지게 단장된 데크길 사이로 보이는 노랗게 물든 가로수의 물결은 한 장의 겨울동화이다. 그때 저쪽에서 얼굴이 익은 사람이 걸어온다. 같이 근무한 S 교장이 아닌가.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근처 파동 코오롱 아파트에 사는 S 교장은 운동 겸, 도보로 지하철 3호선 수성못역으로 가는 길이란다. 서문시장 ‘선아 칼국숫집’에 모임이 있다고 한다. 내가 가까운 파동에 살 때는 수성못에 자주 왔지만, 이사로 몸이 멀리 떠나니 마음도 멀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 수 있지만 현실은 어렵다.
낮 12시. 식당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넘친다. 북적거리는 서문시장 노점의 국숫집에 온 것 같다. 초밥코너에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오찬 25,900원. 온갖 종류의 초밥 음식이 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다. 우리나라가 정말 잘 사는 것 같다. 아니, 잘 사는 사람만 여기 오겠지. 점심 약속을 대부분 11시 30분 정도로 잡기에 사람이 벌써 넘친다. 나도 지금 여기 있지만,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새벽 운동을 나갈 때 간혹 마주치는 파지 줍는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따금 K 복지관에서 점심 먹을 때 긴 줄을 이루는 노인들의 표정도 되살아난다. 빈익빈 부익부가 대를 이어가니 어쩔 수가 없다. 이젠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해야지. 세 테이블에 10여 명이 자리 잡았다. 여자 동기 일이고 평일 낮이라 여자 친구가 많이 왔다. 남자는 겨우 4명. 평소 소식하는 체질이지만, 본전 생각이 나서 접시에 몇 번 담아오니 과식했다. 후회하고 반성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는 시간이다. 식탐은 크게 없어도 고치기가 어렵다. 오늘 음식 중 ‘앙크루트 스프’가 색다르다. 친구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아름답다. 철학박사인 풍수 대가 N의 조상 모시기와 명당 이야기도 재미있고 수긍이 가지만, 20년, 50년 후의 세상을 그려보면 고개를 갸웃한다. 은행 지점장 출신인 K의 생활철학도 좋고, 종친회 회장을 맡아 문중의 궂은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며 지내는 H의 보람 있는 삶도 자랑스럽다. 다들 세월의 흐름에 물결이 되어 건강하게 살아간다. 다시 창밖으로 수성못이 안긴 수성호텔 ‘카페 NOC’로 자리를 옮겼다. 카푸치노와 라테 한잔으로 뒤풀이하며 살아가는 삶을 풀어낸다. 자질구레한 잡담과 수다도 즐겁다. 고희를 훌쩍 넘긴 세월이 아닌가. 동기들의 지난 추억의 일도 돌아보니 아스라하고 재미있다. 내가 쓴 ‘따뜻한 외로움’을 자세히 읽은 친구가 소감도 간단히 전해주며 격려해 준다.
A 의 승용차로 ‘용지’ 역에 내렸다. ‘수성 6번’을 타고 시지로 귀가하니 어느덧 오후 4시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L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청춘탁구클럽’에서 출석하라고 연락이 왔지만 피곤해서 그냥 쉬었다. 아직 완쾌되지 못한 몸이라 조심한다. 쉬엄쉬엄 어슬렁어슬렁 살아가자. 이런 주문을 자주 외우면 실천하리라 생각된다. 기적은 고목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별일 없이 어제처럼 아침마다 눈 뜨고 감사한 하루를 여는 것이다.오늘 하루도 자잘한 기적의 시간을 보냈다.
5) 사람은 가도 예술은 영원하다 2025.12.19.(금)
구름 많은 흐린 날씨다. 아침부터 뭔가 부족한 듯 마음이 찌뿌둥하다. K ***에서 꽃게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대학 구내식당의 학식을 먹는 기분이다. 지난주 복지관의 모든 문화 강좌가 종강했기에 경로식당은 전보다 조용하다. 줄 서서 기다릴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든다. 통계학으로 보면 여자들이 장수하지만, 여긴 대부분이 남자다. 연로한 분도 많지만 젊어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혼자 사는 분도 많지 않을까? 경제적으로는 괜찮은 듯하나 끼니 해결은 어려운 것이 노년의 남자다. 그들의 삶이 고난했다는 것을 하회탈 닮은 표정으로 읽게 된다. 배식 때 밥 양을 보면 하루 한 끼로 해결하는 분도 있는 듯하다. 서글프고 안타깝다.
마음이 불편한 날은 미술관을 찾는다. 간송미술관으로 차를 몰았다. 한해를 갈무리하는 가로수들이 말 잘 듣는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정렬해 있다. 입구에 오니 즐겁다. 천천히 미술관 계단을 내려갔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몇 번 봐도 잘 모르지만, 예술 작품 앞에 서면 경건함이 생긴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학문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장대한 문학작품을 쓴 ‘스티븐 킹’이나 ‘시드니 셀던’ ‘조정래’ ‘박경리’ ‘최명희’ 같은 사람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어떻게 저렇게 긴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뿐이다. 일생을 신념과 열정으로 치열하게 산 흔적이 아닌가. 며칠 지나면 ‘삼청도도’ 특별기획전도 마감한다. 1전시실에 전시된 산수화 작품 위치가 전과 조금 바뀌었다. 현재 심사정의 ‘여산유서’(여산에 숨어살다.)부터 자세히 감상한다. 초가집 창가에 앉은 선비가 밖의 풍경을 보고 있고, 건너편 절벽 아래 시동과 손님이 개울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오는 그림이다. 중앙의 아름드리 소나무와 배경이 된 첩첩 산세가 압권이다. 작품과 해설을 번갈아 보며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림에 들어간다. 오원 장승업의 ‘난천청산’(요란한 폭포와 푸른 산)은 긴 족자 형태의 산수화이다. 구름 같은, 검고 뭉클뭉클한 바위 모양의 산에서 거대한 폭포가 쏟아진다. 절벽 사이사이에 이상향 같은 기와가 세 채, 아래쪽에는 아담한 초가가 한 채 있고, 개울가 다리 위에는 주인이 왼팔을 들고 손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듯한 모습이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고 좋다.
건너편에 있는 서예 작품은 관심이 많다. 한때 나도 열정을 바쳐 20여 년 심취한 분야이다. 원교 이광사의 유려한 행서 작품은 언제봐도 자유롭고 호탕하다. 글씨도 좋지만, 글의 내용도 마음에 든다. ‘높은 누각에서 새벽에 꽃 한 송이 핀 것을 보고, 봄빛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을 문득 알았네. 따스한 햇살과 갠 구름이 차례로 이를 것이니 동풍이 다시 봄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리.’ 당나라 시인 영호초의 ‘유춘사’라는 작품이다. 이광사는 당시 대중적 인기와 관심을 최고로 받은 작가이다. 옆의 ‘원교진첩’은 이광사가 당나라 시성 두보의 시를 예서와 전서로 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전서는 마음에 드나 예서는 좀 그렇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황화주실’이란 작품을 대한다. 전형적인 예서에서 벗어나 독보적인 추사체의 글씨다. 무궁무진한 예술의 세계에서 수박 겉핥기 감상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중앙의 청자와 백자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 두 점은 국보이기에 더 관심이 간다. 지난번에 대충 봤지만, 다시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려니 직원이 바로 제지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청화백자인물문팔각병’은 둥근 병을 물레로 성형하고 팔각으로 깎아 만든 각병이다. 문양은 대나무숲에서 거문고를 타는 선비와 소나무 아래 바위에 기대앉은 인물을 그려 넣었다. 산뜻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크게 멋진 그림은 아니라고 소개한다. 작품 한번 보고, 해설 보고, 다시 작품 보고, 해설 보고,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눈이 침침하고 힘들지만, 몰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냥 그냥 지내는 것도 편안하고 좋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는 삶의 맛도 괜찮다. 무위(無爲)의 행위가 최선일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세상을 엿보고 호기심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취향이다. 4전시실의 ‘삼청도도’는 지난번에 자세히 보았기에 한번 쭉 둘러보고 나왔다.
대구미술관에 들어가려다가 눈이 피곤해 돌아섰다. 산책로 소나무 숲에 앉아 건너편 팔공산 능선을 우러렀다. 잿빛 구름에 가린 정상은 잘 안 보여도 마음은 편안하다. 조상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보며, ‘사람은 가도 예술은 영원하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잠시나마 선인들의 시대와 교감한 시간이 좋다. 오늘도 고마운 날이다. 지금 여기 내 뜻대로 다닐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6) 추억은 별이 되고, 삶은 계속된다 2025.12.24.(수)
지난 며칠은 우울했다. 주말에 또 비보가 전해왔다. 대학 동기인 L이 하늘의 별이 되었다. 올해 벌써 몇 번째 슬픈 소식인가? 동기와 지인 선배 후배까지 7명이나 된다. 을사년은 마지막까지 정말 잔인하다. 그는 10여 년 전 위암 수술 후 남은 위장으로 힘들게 살았다. 자기 먹는 속도가 느려 불편하다고 모임에도 참석을 꺼렸다. 몇 년 전, 서울 거주할 때는 여자 동기들과 산행도 자주 했다. 앞장서서 산길을 인도하고 힘든 친구의 배낭도 들어주며 건강도 많이 회복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구에 와서도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것으로 알았다. 동기 카톡에 이따금 소식도 올리더니, 순간 별똥별로 사라졌다. 조문 후 친구들과 지하철 반월당역 만남의 광장 2층 ‘브리스톳’ 카페에 앉았다. 포항, 경주, 대구의 친구 5명이 자리했다. 그 친구와의 지난 추억을 얘기하며 아쉬움을 달래다가 우리 또래의 평균 생존율이 얼마일까 설왕설래했다. 한 친구가 AI로 바로 검색했다. 남자 70세 이상 살 확률은 85%가 나온다. 80세 이상은 63%이고, 90세까지도 살 확률은 25%나 된다. 평균수명이 참 길어졌다. 죽음은 언제 누구에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른다. 먼저 별이 된 친구 삶은 안타깝고 슬프다.
L과 나는 대학 1학년 때 겪은 추억이 색다르다. L과 지금 창원의 K교장 그리고 나, 셋이 여름방학 때 청하 보경사 내연산으로 1박 2일 등산을 갔다. 당시 우리는 과 산악회 ‘암충(岩蟲)’이란 동아리 회원이었다. 1972년도 우리가 가진 등산 장비는 정말 열악했다. 무거운 군용 A텐트, 군용 모포, 알코올버너 등 지금 생각하면 이런 장비로 어떻게 갔을까 생각할 정도로 빈약했다. 나는 3학년 때 스웨덴 제품인 ‘스베아’ 석유 버너도 구입했다. 푸른 청춘이라는 패기 하나로 살았던 시절이다. 완행열차를 타고 포항에 내려, 다시 터덜거리는 버스로 보경사 입구까지 갔다. 보경사 경내를 구경하고 상생폭포 무풍폭포 출렁다리 관음폭포와 연산폭포까지 12폭포를 올라갔다. 당시는 구름다리가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폭포 옆 가파른 산길을 어렵게 올라가면 거짓말같이 다시 평탄한 곳이 나타난다. 소금강 쪽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멀리 향로봉을 바라보는 적당한 곳에서 야영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새 소리와 계곡물 소리 검푸른 숲만 친구가 되었다. 당시 야영을 많이 해 보지는 않았지만, 산을 좋아하고 자주 갔기에 야영의 즐거움에 빠질 때였다. 텐트 속 잠은 힘들었지만, 새벽 여명의 숲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이른 새벽 희뿌연 햇살이 소나무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황홀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은 금상첨화였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귀갓길에 포항 북부해수욕장에 들렀다. 해수욕은 하지 않고 백사장만 돌아다녔는데, 문제가 생겼다. 어쩌다가 총무를 맡은 L이 남은 회비를 잃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비상금을 톡톡 털어 대구행 저녁 통근 완행열차 차표를 사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배는 고프고 돈은 없고 처량했다. 포항역 광장 모퉁이에서 알코올버너로 라면 하나를 끓여 셋이 나눠 먹었다. 꿀맛이었다. 지친 몸을 싣고 탄 열차 안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통근 열차 마지막 칸은 해병대 군인들이 탄 열차였다. 해병대 헌병 둘이 우리 칸에 들어왔다. 등산 배낭을 본 그들이 검문한다고 열어보라고 한다. 영문을 모르고 배낭을 풀어 보이니 모포가 군용이라고 압수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사정을 해도 소용없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잠시 뒤 K가 가만히 못 있겠다고 헌병을 찾아 마지막 칸으로 갔다. 대구 도착까지 걸리는 2시간 내내 K가 오지 않았다. 기차가 반야월역에 도착할 무렵 K가 환하게 웃으며 모포를 들고 돌아왔다. 군용 칸에서 K는 모포를 돌려받으려고 살아온 얘기부터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지내다가 결국 받아 온 것이다. 새삼 그의 끈질긴 집념과 열정에 L과 나는 부러움과 경탄한 일이 어제처럼 아스라하다.
오늘 저녁 7시 30분. ‘제7회 수성빛예술제’가 막을 연다. ‘행복수성 뉴스레터’로 검색한 나는 며칠 전부터 손자들을 데리고 갈 계획을 세웠다. 근데 날씨가 차다. 어떻게 할까? 괜히 잘못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다. 한참 망설이다가 혼자 가기로 했다. 잔병치레를 잘하는 아이들이라 득보다 실이 많으면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옳다. 마음으로는 화려한 빛예술제와 멋진 ‘드론아트쑈’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내년을 기약했다. 주말에 경주 풀빌라 여행을 간다기에 다행이라 여겼다. 수성못 행사 참가는 주차가 어렵다. 혼자라 ‘수성 6번’ 버스를 탔다. 천마타운 앞에서 추위를 막기 위해 완전히 무장한 초등학생 대여섯 명이 엄마와 함께 우르르 탄다.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니, 그들도 ‘수성빛예술제’에 가는 모양이다.
저녁 7시쯤 도착하니 개막식장 못 둑에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교인들은 오기 어려워 덜 붐빌 줄 알았건만 예상과 다르다. 빛예술제의 백미는 ‘드론아트쇼’이다. 예전에는 폭죽쇼가 대세였으나, 요즘에는 수백 대의 드론이 빛과 움직임으로 입체적인 온갖 형상을 만들며 비행하는 ‘드론아트쇼’가 축제의 절정이다. 너도나도 멋진 비행에 탄성을 지르며 동영상 촬영에 바쁘다. 사실 귀가해서 블로그로 검색하면 본인이 찍은 것보다 멋진 동영상이 많이 나온다. 누구나 그냥 그냥 찍는 재미일 것이다. 기를 써서 찍는 자체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강물에 작은 물결이 되는 모양이다. 내가 참석하고 촬영함으로써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존재의 기쁨일까. 내년 1월 4일까지 매일 점등식과 빛예술제 전시는 계속된다. 좀 따뜻해지면 손자들과 다시 와야지 생각하고 8시 30분에 시지행 버스를 탔다.
차 안에서 갑자기 재미있게 사는 것이 뭘까? 언젠가 읽은 신문 칼럼이 떠올랐다. 우린 누구나 재미있게 살려고 한다. 근데 사는 것은 원래 재미가 없다고 한다. 재미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재미있게 살려면 재미에 대한 기초가 필요하다. 작은 악기 하나 연주도 재미를 느끼려면,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재미없는 지루한 반복의 고통을 이겨내고 오랜 시간이 지나야 멋진 소리와 함께 성취의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기쁨과 쾌락은 다를 것이다. 비슷한 도파민 현상이지만 쾌락은 쉽게 얻어지기에 순간적이고, 기쁨은 힘든 노력의 결실이기에 지속적이다. 내가 흘린 땀이 즐거움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재미와 기쁨은 함께 다닌다. 석양의 나이에는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힘들고 어렵고 귀찮아서 재미를 찾기 어렵다. 때론 그냥 그냥 사는 것도 좋다. 그럴수록 아이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기심과 단순함이란 무기로 새로 바라보면 좋다. ‘싱크 어게인’에서 애덤 그랜트는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것부터 다시 생각해야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뒤죽박죽 잡생각을 풀었다 감았다 하는 사이, 버스는 집 근처 정유소에 얌전히 도착한다. 오늘도 기적의 감사한 날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