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높고 깊은 정신이 제대로 된 풍경을 만나니, 정말 절편의 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방안에서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내더라도, 세상과 만나지 않으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순수와 참여는 없으며, 있다면 이렇게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 순수인 것이지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시 사랑방이라는데를 처음 들어와 봤는데, 어느 시 사이트보다, 문학잡지보다 좋은 시들이 많군요. 시간 나는 대로 자주 들려볼 생각입니다.
시작노트: 평일에다 부가가치세 신고 마감일이라 나종영, 김성범 시인은 자본주의의 인질(?)로 묶여있고, 김준태 형은 집필삼매 중이어서 차마 유혹하지 못하고 임동확, 조진태 두 자유인만 손짓해 화순적벽을 구름같은 물살이 되어 휘돌았다. 막걸리 딱 한 잔 걸쳤을 때의 막 말발이 일기 시작한 천상병 쯤에나 강호에 묻힌 두 시인의 천진난만을 견줄까. 돈 몇 푼만 생기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천하라도 나누어 줄 것만 같은 저들이 아직 가난한 건 다행이다. 대체 저 대책없는 큰손들에게 우주라도 맡겨지는 날이면 시시각각 수백의 천지창조가 이루어져야할 터이니,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피곤에 지쳐 창조력이 거덜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광주는 섬이 되었다. 오천년의 大洋과 5와 1과 8의 內海에 갇힌 섬. 용광로 속의 찻잔처럼 숨죽인 孤島에 오늘도 이륙만 있을 뿐 상륙하는 이는 없다. 그리고 섬을 떠난 이들은 문신처럼, 유년기적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처럼, 감성의 사다리 밑변을 상처로 채우고 있는 객수에 꿈자리가 뒤숭숭하기 일쑤다. 그래서 임동확 시인의 이부자리는 꼭 옅은 상사병을 앓는 듯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돌아와보니, 역시 이서 가는 길 발자국 따라 同席을 아쉬워했던 전류가 찜통더위 과부하를 이기고 쩌릿쩌릿 흘렀을까, 나종영 회장이 "함께 가는 문학" 카페 창 여기저기 외로움과 그리움의 흔적들을 쿡쿡 눌러놓았다.
우리는 아직도 날지 못하는 독수리, 그러나 어디를 가도 광주만큼 사랑스런 둥지는 없다.
# 화순적벽 (시)
잡을 길 없는 도둑이 어느새 주름살 더 깊이 파놓고 달아났다. 먼지 낀 거울이 이방인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크할 때마다 나는 부재다. 생은 나의 실종을 증언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과거나 미래라는 장식을 빌리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의 현재. 어느 심술사난 악동이 막무가내 돌려대는 회전그네에서 내릴 수 없는 그림자 하나. 나는 우주의 모래시계. 그 공회전 소음이 갈수록 둔탁하다. 오늘도 언어만큼의 내가 태어나고 침묵만큼의 내가 죽는다. 제 그림자에 쫓기다가 강물 위 낯선 가면 하나 벗어놓고 간 나그네여*, 원죄는 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나도 인간이라는 욕망의 기호, 아니 시간이라는 불확실성의 부표를 자맥질해대는 또 하나의 원죄인 것을. 그대 어느 날 적벽 흐르는 달이라도 묶어두고 한번쯤 자신을 비추어 보았는가, 나 이제라도 그대가 미처 마시지 못한 푸르른 강, 벌거벗은 채 맑고 잔잔한 노래로 유유히 흐르려하네, 흐르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