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홀(Hall) 일가의 선교와 사랑이야기|작성자 물길손길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홀 일가의 선교와 사랑이야기
1890년 뉴욕시 메디슨가 빈민의료선교에서 만난 닥터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평양 최초의 감리교 의료 선교사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그의 아내 닥터
로제타 홀. 로제타는 뉴욕출생으로 어려서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1886
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감리교 여성 디커니스 홈에서 선교훈련
을 받으며 뉴욕시 빈민가에서 봉사를 하였다. 당시 병원의 선교 책임자는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이었다. 그는 첫눈에 로제타에 반해 프로포즈했다.
1889년 한국에서 보구여관을 세운 메타 하워드가 질병으로 떠나자 한국의
감리회는 여자의사를 찾고 있었다. 로제타는 1890년 한국으로 떠났고, 닥
터 홀은 중국선교사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1891년 12월 조선 땅에 도착했
다.
두 사람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식(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닥터 홀은 평양
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게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광성학당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복음을 전했다. 1894년 7월에
평양은 청일 전쟁의 전쟁터가 되었다. 닥터 홀은 많은 사람을 치료하다 자
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홀은 ,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양화진 존 헤론의
묘 옆에 묻혀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찍은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홀(Hall)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를 하던 집 (돌보는 고아들과 함께)
1895년경 한강변 양화진 닥터 홀의 무덤
로제타는 1890년 10월 13일 제물포에 상륙,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에 머물며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 첫날 4명
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명 이상을 치료했다. 3년간 1만4천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로제타의 피부로 수술을 받은 화상 환자
로제타는 처음부터 "여성을 위한 여성의 선교"에 충실했다. 그녀는 화상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피부를 띠어 이식하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알
려져 많은 조선인들이 감동을 받았다.
닥터 홀이 사망할 당시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가 있었고 딸 에디스는 태중
에 있었다. 아들은 닥터 셔우드 홀은 결핵 전문 의사로서 한국에 다시 온
다.(1898년 이전 사진)
로제타는 남편의 순직을 기념하면서 재산을 털어 1894년 평양에 병원을 세
웠다. 그리고 1895년 미국으로 돌아가 에드스 마가레트를 낳았다. 이때 보
조로 일하던 에스더와 박유산을 데려 갔다. 그 뒤 폴웰(Follwell,E.D.)이 이
병원의 원장이 되어 1897년 2월에 개원하였다.
초기 홀기념병원(평양에 설립되었던 여성병원, 1894) 기휼병원으로 발전
1897년 봄 한국에 돌아온 로제타는 1898년 평양에 광혜여원(1986.6)을 설
립했다. 그해 온 가족이 이질에 걸렸고 1898년 5월 23일, 4살 난 딸 에디
스는 하늘나라로 갔고 양화진 아버지 옆에 묻혔다. 로제타는 참석하지 못
했고 장례는 아펜젤러 목사가 집행했다. 로제타는 그 고통을 신앙으로 극
복하면서 1898년 6월 18일 이 병원 문을 열었다.
평양감사 민병식은 아내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감사로 병원이름을 지어
주었다. 민병식은 선교초기에 닥터 홀과 교인들(한석진 , 김창식 등)을 극심
하게 매질하며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여자의사 김점동(에스더 박)
14세의 점동이는 1890년 감리교선교사 닥터 로제타 셔우드의 보조원이 되
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로제타로부터 김 에스더라는 세
례명을 받았다.
1892년 로제타와 홀이 결혼하던 해, 로제타의 중매로 16세의 점동이는 닥터
홀의 조수 박유산과 결혼하였다. 한편, 1895년 의사를 꿈꾸던 에스더(점동이
)와 박유산은 로제타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에스더는 Liberty 공립학교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뉴욕시의 "Nursery
and Child's Hospital"로 진학했다.
1896년에 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 (Johns Hopkins)에 입학하
여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첫 한국인이 되었다.(Wow! How bright was she!)
에스더와 박유산 Dr. Rosetta Hall, Sherwood, Edith
1895년 9월 미국에서 찍은 사진
에스더는(1877-1910) 1900년에 의사(M.D.) 학위를 받고 귀국했으나 박유산
은 결핵으로 사망했다. 에스더는 로제타와 함께 10년간을 의사로서 교육자
로 정열을 다해 일을 하였다.
1910 년 봄, 전성기의 꽃을 피우던 에스더는 폐결핵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
나고 말았다.
로제타 홀의 헌신
로제타는 오봉래라는 학생에게 처음 점자를 가르쳤다.
1894년 5월 조선최초의 시각장애아 학교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이
름은 딸의 이름을 따라 에디스 마르리트 어린이 병동이라고 했다.(병원 겸
학교)
일시 미국에 귀국하여 뉴욕점자를 배웠고, 1897년에는 직접 고안한 뉴욕식
한글 점자를 가르쳤다.
1900년 6 평양외국인 학교를 세웠고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아학교
를 세웠다.
오봉래는 후에 유능한 특수교육 교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또한 김성실을
아껴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영문과 졸
업생이 된 그는 통역사로서 늘 홀 여사와 함께 했다. 1993년 문교부에서 발
간한 특수교육백서에 따르면, 로제타는 여러 곳의 병원장이면서 1925년까
지 무려 26년간이나 맹아학교와 농아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했다.
맹아학교졸업식, 1908
평양맹아학교 1910
맹아학교 1930
맹인학교 학생들과 함께
로제타는 192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과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등을 설립하였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
로제타 한국선교 25주년 기념
로제타의 송별식 1933. 10.
아들 부부를 남기고 43년간 일한 한국을 떠났다.
1951년 남편과 딸이 묻힌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송암 박두성 선생의 훈맹정음 점자 발명
로제타의 공헌은 1926년 기독교인 박두성이 훈맹정음 점자를 발명하는 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1941년 신약성서 점자원판의 완성
점자성경을 읽는 시각장애 소녀
셔우드 홀의 한국사랑
셔우드를 말에 태워 왕진가는 로제타
로제타의 외아들인 셔우드 홀은 커가면서 사업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
러나 10대이던 1907년 8월, 원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1907년 기독교 대
부흥기의 주역이던 하디 선교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감명 받았던 하디의 설교 내용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동기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영적 힘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기억하라, 그 힘은 항상 기도함으로써 이루
어진다는 것을.
우리 육체의 힘도 날마다 음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힘
도 오로지 매일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
…우리의 결심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부
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의학도 시절의 메리안
닥터 셔우드 홀과 닥터 메리안 홀
셔우드의 의료
셔우드와 메리안의 결혼
로제타와 메리안의 의료사역
해주 결핵병원 기공식
닥터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며, 최초로 결핵 전문
병원과 결핵요양소를 세운 인물이다.
셔우드 홀이 세운 해주 구세병원
환자치료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
셔우드 홀 박사는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을 도안하여 씰을 발행하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에서는 워낙 이순신장군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놀라서 깰 정도이니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홀 박사는 거북선이 아니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남대문을 도안해서라도 씰을 만들겠다.
닥터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 자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발행한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에는 조선의 상징인
남대문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일본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도안으로 삼으려고 했다. 물론 일제가 허용치 않았
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남대문을 그려 넣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셔우드 홀의 친필(1938.7.7.)
닥터 셔우드와 메리안 홀 부부는 15년간 이 땅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
다.
결국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고 만다. 부산항을 떠나기 직전
셔우드 홀 가족은 눈물 속에 작은 의식을 치렀다.
셔우드는 가족들 앞에 수놓은 아름다운 태극기 한 장을 꺼냈다. 해주를 떠
날 때 조선인 친구가 준 것이었다.
일가족 5명은 나뭇가지에 그 태극기를 걸어놓고 “조선의 진정한 국기를 향
해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허킨스의 시 ‘연의 문(年의 門)’을 낭송했다.
“나는 年의 門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네
빛을 주시오
그래야 내가 미지의 세계로 안전히 걸어 들어갈 수 있소
그는 대답했네
어둠에 들어가시오. 그리고 하나님 손을 잡으시오
그리 하는 것이 빛보다 나으며 뜻 있을 것이오”
셔우드 홀은 자신의 자서전적인 조선회상을 남겼다.
1984년 결핵협회 초청으로 내한한
91세 셔우드, 88세 메리언
부모의 무덤을 방문
정부가 모란장을 수여
서울시 명예시민
1991년 각각 98세와 95세로 세상을 떠난 닥터 셔우드와 닥터 메리암의 유
해가 한줌의 재로 돌아와 부모님과 동생이 묻힌 곳에 안장되었다.
셔우드 홀 박사의 아들과 딸
양화진에 묻힌 홀 가족
1..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am James Hall)
2.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Dr. Roetta Sherwood Hall)
3.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Dr. Sher wood Hall)
4.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Dr. Marian Hall)
5.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
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참고: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8/20041108
0500085/200411080500085_1.html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6661&logId=1780004
[출처]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홀(Hall) 일가의 선교와 사랑이야기|작성자
물길손길
Paul Mauriat ~ Love is 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