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인지 알 수 없다.
어디에서든지, 무엇이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나는 늘 갈등하며 고독하게 지낸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부터인가 조선의 터전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한다. 근세조선은 유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아닌 것 같다. 그 뿌리에는 불교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처를 한자로 佛/佛陀라고 적는다. 이것을 우리의 소리로 읽으면 [불][불타]이다. [부처]와는 동일한 홀소리 닿소리는 [부]이지만, [불]은 아니다.
"부처"는 우리의 옛말로는 "부텨"이다. 여기에 주격 토씨가 붙어서 "부톄"가 되기도 한다. 이 "부텨"가 구개음화현상으로 "부처"로 된 것 같다.
그런데 왜 한자로 "佛"을 쓸까?
현재 중국어로는 [ㅂ]소리가 나지 않고 [fo]이다. 그러니 중국어와는 사실 관련이 없는 것을 그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Buddha가 우리가 말하는 부처이며, 그 소리는 [붇다]이다. 산스크리트로 "깨달은 사람"의 뜻이다.
이 Buddh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佛"인데, 이 소리가 반드시 [붇다] 또는 [붇]이 되어야 한다.
베트남 말에 [but]가 있다. 이것은 한자로 "佛"이다. 베트남어에는 받침으로 [ㄹ]이 없다. 그 나라의 이름도 "越"[월]을 [viet]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고타마 싯달타는 어디에서 살고 깨우쳤든지 간에 그 문화는 "佛"을 [but]로 했고, 이 말이 우리가 '부텨"니, "부처"라는 말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디 샤카무니의 북방불교의 기원보다 1027년이나 훨씬 낮춰잡은 남방불교를 만들어 산스크리트와도 다른 "부처"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다. 이보다는 옛말에 "부텨"라고 했던 말을 쓰거나, 아예 "붇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부텨"는 "붇혀", 즉 "Buddha"를 더 정확히 나타낸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구개음화라는 변명으로 '부텨"를 "부처"라는 말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부텨/붇다를 佛자로 써야할 아무른 까닭이 없다. 소리를 빌려쓴 것일 따름이지, 그 글자 속에 "깨닫다"는 말은 없고 도리어 "어렴풋하다/비스름하다/어기다/거스르다"의 뜻이 있다. 물론 "크다"의 뜻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여 그랬을까?
"부처"라고 하면, 정작 우리 옛글에 "부처뮈다"는 말이 있는데, "부채질하듯 부치어 움직이다"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