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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11.19.PM7시)
유마경 관중생품
일체법의 실상 / 중생의 생사 / 보리의 무소득
오늘 유마경 공부시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관중생품(觀衆生品) 다섯 번째 시간이다.
관중생품 안에서도 ‘일체법의 실상’을 공부할 차례인데, 저는 경전의 단락 나누기를 좋아한다.
본래 경전에는 무슨 품, 무슨 품 품까지만 나눠져 있는데 그 품을 낱낱이 쪼개는 것은 이해하기 쉽도록 분단을 나누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뜻을 요약해서 제목을 붙이는 경우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금강경은 단락이 하나도 없다. 5천여 자 밖에 안되는 경전이지만 그것을 소명태자(昭明太子)라고 하는 중국의 유명한 분이 32분(分)으로 나눴다. 서른두 단락으로 나눴는데 만고의 절창이다.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눈 이후부터 누구하나 거기에 이의를 달지 못하고 그대로 따른다.
금강경을 서른두 단락으로 나눠놓고 보니, 이해하기 쉽고 적절한 표현이다 라고 본 것이다.
화엄경 같은 경우는 39품이고, 유마경은 14품이다. 대개 경전에 있는 것은 본래 품으로만 나눠져 있다. 법화경은 28품이다.
거기까지 나눈 것은 인도에서부터 본래 되어있는 경전나누기의 형식이다. 그것을 좀더 우리가 잘 이해하게 하도록 세분화해서 나눠본 것이 저의 단락나누기다. 저는 경전을 세분화해 놓고 다시 이해해 보고 그 나머지 것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는데 그것이 저 나름대로 경전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관중생품 안에서 오늘은 ‘일체법의 실상’이라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겠다.
8. 일체법의 실상
사리불(舍利弗)이 언(言)하되 여하이부전여신(汝何以不轉女身)고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대는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누구하고 대화하는 것인가?
유마거사방에서 12년간 있었던 천녀, 보살이라고나 할까, 하늘의 여자, 선녀 이렇게 내가 표현했는데, 유마거사를 시봉하는 젊고 아리따운 여자 보살이다, 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분과 사리불의 대화가 쭉 이어진다.
사리불이 천녀에게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하고 엉뚱하게 질문을 하였다. 벌써 소승적인 소견이다.
불법에 남녀가 어디 있고 노소인들 어디 있는가? 흑백도 없고 남북도 없다. 동서도 없다. 누구나 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고,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평등하게 다 깨달을 수 있고,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 불교의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사리불이 엉뚱하게도 ‘그대는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아리따운 여자의 몸으로 부처님 같은 유마거사를 시봉하고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일단은 재미있다.
천(天)이 왈아종십이년래(曰我從十二年來)로 구여인상(求女人相)하되 요불가득(了不可得)이니 당하소전(當何所轉)가
천녀가 말하였다.
“나는 12년 동안 여인의 모습을 구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어떻게 바꿔야 합니까?”
큰 방망이를 얻어맞은 격이다.
‘내가 12년동안 유마거사 방에서 시봉하고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여자의 몸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무엇이 여자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구태여 여자의 모습을 구하려고 해보지도 않았고 구해봤자 여자의 몸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바꾸라는 말이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여환사(譬如幻師)가 화작환녀(化作幻女)어든 약유인(若有人)이 문하이부전여신(問何以不轉女身)고하면 시인(是人)이 위정문불(爲正問不)아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을 하는 사람이 허깨비 여자를 만들었다고 할 때 그때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바르게 물은 것이 되겠습니까?”
마술을 하는 사람이 여자의 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때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바르게 질문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
사리불(舍利弗)이 언불야(言不也)라 환무정상(幻無定相)이니 당하소전(當何所轉)가
사리불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허깨비는 고정된 모양이 없는데 왜 바꿔야 하겠습니까?”
여자의 몸을 바꿨든, 남자의 몸을 바꿨든 그것은 허깨비일 뿐이다. 허깨비일 뿐인데, 허깨비가 무슨 고정된 몸이 있을 까닭이 있는가? 허깨비로 만든 것은 예를 들어서 짚단을 가지고 여자의 몸으로 만들었다, 남자의 몸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와 같기 때문에 ‘허깨비는 고정된 모양이 없는데 왜 바꿔야 하겠습니까?’
천(天)이 왈일체제법(曰一切諸法)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무유정상(無有定相)이어늘 운하내문부전여신(云何乃問不轉女身)고
천녀가 말하였다.
“일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고정된 모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다고 묻습니까?”
천녀가 논리정연하게 소승불교의 대표주자인 사리불을 이렇게 한 방망이 크게 먹인다.
그동안 소승불교는 남녀의 고정관념에 꽉 절어있고, 그런 고정관념에 매여 있는 사리불은 남자가 유마거사의 시봉을 하고 있으면 더 보기 좋았을 것 같은데 하는 속에 깔린 마음이 있었던지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 그렇게 했다가 천녀에게 ‘12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여자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었다.
‘12년 동안 여자의 몸을 구하였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여자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뜻이다.
대승불교는 승속도 차별이 없고, 남녀도 차별이 없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차원이 이렇게 다르다.
우리가 그런 차원에 이르느냐, 못이르느냐 하는 것은 각자 몫이고 이론인즉슨 대승불교의 이론과 소승불교의 이론은 그와 같다는 것이다.
남녀의 상을 떠나는 경지에 우리도 이르러야 하고 그곳에 이른 분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크게 그렇게 어려운 경지는 아니다. 남녀의 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거나 힘든 경지는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여기 간단한 대화인데 일체 법의 실상에 대해서, 남자다 여자다, 그 외 다른 모든 현상들까지도 그 실상의 입장에서 보면 밖에 드러난 현상 차별은 거짓, 가짜 이런 것이다.
실상을 보라, 그 사람의 실상을 보라, 하는 뜻이다.
참사람, 참마음자리에 무슨 남녀가 있으며 노소가 있으며 흑백이 있으며 남북이 있으며 승속이 있으며 그런 차별이 있겠는가. 참마음 자리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이렇게 오늘 유마경 내용을 듣고 있는 그 실체 그것이 참마음 자리다. 유마경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실체 이 참주인공은 그것은 남자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스님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일반 신도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남쪽 사람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북쪽 사람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다.
아무 조건이 없다. 오직 참사람이 있을 뿐이다. 참마음이 있을 뿐이다.
참마음 참사람은 절대 평등의 경지다.
부연설명 하면 거기까지 말씀드릴 수가 있겠다.
즉시(卽時)에 천녀(天女)가 이신통력(以神通力)으로 변사리불(變舍利弗)하야 영여천녀(令如天女)하고 천자화신(天自化身)하야 여사리불이문언(如舍利弗而問言)하되
그때에 천녀가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변화시켜 천녀와 같게 하고 천녀는 스스로 몸을 변화시켜 사리불과 같게 하고 나서 물었다.
더욱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뜻이다.
하이부전녀신(何以不轉女身)고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반대로 사리불은 천녀로 만들어 놓고, 천녀는 사리불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천녀가 사리불에게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
사리불(舍利弗)이 이천녀상이답언(以天女像而答言)하되
사리불이 천녀의 모양으로서 대답하였다.
사리불이 바뀐 천녀의 모습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아금부지하전이변위여신(我今不知何轉而變爲女身)호라
“나는 지금 어찌하여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떨결에 이렇게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 기가 막힌 도리다.
사리불은 부처님의 상수제자, 제일가는 제자인데 자기 몸이 여자의 몸으로 변해져 있는데 이것이 어찌된 심판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물론 경전 결집자의 손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대목만 봐도 대승적 안목과 소승적 안목은 차원이 이와 같이 다르다. 그런 것을 우리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천(天)이 왈사리불(曰舍利弗)이여 약능전차여신(若能轉此女身)하면 즉일체여인(則一切女人)도 역당능전(亦當能轉)이니 여사리불(如舍利弗)이 비여이현여신(非女而現女身)인듯하여 일체여인(一切女人)도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수현여신(雖現女身)이나 이비여야(而非女也)니
천녀가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만약 이 여자의 몸을 바꿀 수 있으면 일체 여인들도 또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리불이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의 몸을 나타냈듯이 일체 여인들도 또한 다시 이처럼 비록 여자의 몸을 나타냈으나 여자가 아닙니다.”
참사람 입장에서 여자라고 할 것이 뭐 있으며 남자라고 할 것이 뭐 있으며 출가인이라고 할 것이 뭐 있으며, 속가인이라고 할 것이 뭐가 있는가? 그런 차원이다.
너무 명백한 논리가 되겠다.
시고(是故)로 불설일체제법(佛說一切諸法)이 비남비녀(非男非女)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일체의 모든 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고 설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말을 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출가인도 아니고 속가인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고 젊은이도 아니다, 그런 내용들이 다 깔려 있다.
다시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는 뜻에서 한 번 더 읽겠다.
천녀가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만약 이 여자의 몸을 바꿀 수 있으면 일체 여인들도 또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리불이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의 몸을 나타냈듯이 일체 여인들도 또한 다시 이처럼 비록 여자의 몸을 나타냈으나 본래는 여자가 아닙니다.
참사람 입장에서, 참마음 입장에서는 여자가 아니다, 참생명의 입장에서는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일체의 모든 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고 설하셨습니다.
아주 명백하고 시원한 법문이다.
즉시(卽時)에 천녀(天女)가 환섭신력(還攝神力)하니 사리불신(舍利弗身)도 환부여고(還復如故)라
그때에 천녀가 다시 신통력을 거두어들이니 사리불의 몸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여자가 됐다가 도로 사리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천(天)이 문사리불(問舍利弗)하되 여신색상(女身色相)이 금하소재(今何所在)오
사리불(舍利弗)이 언(言)하되 여신색상(女身色相)이 무재무부재(無在無不在)니라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여자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여자의 몸은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습니다.”
금방까지 여자의 몸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여자도 아니고 여자가 아닌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천(天)이 왈일체제법(曰一切諸法)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무재무부재(無在無不在)니 부무재무부재자(夫無在無不在者)가 불소설야(佛所說也)니라
천녀가 말하였다.
“일체제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으니, 대저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는 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입니다.”
이것이 결론이다.
일체제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으니 대저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는 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입니다.
부처님 법은 항상 이 현상에 쫓아다니면서 설법한 것이 아니고, 현상 이면의 실상을 보고 설한 것이다.
실상을 알게 설하고, 실상을 자신의 참생명체로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의 설법이다.
실상은 무엇인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자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아무 조건 없다.
그저 참사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 한 물건이 있다.
선불교는 오로지 그 한물건 드러내고 그 한물건을 깨우치자고 하는 것이 선불교의 전체다. 사실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간단명료하다. 그저 주장자를 떡 들어보이고 ‘보았느냐?’ 쿵 내리치고 ‘들었느냐?’ 이렇게 하는 데, 그것 전부가 무엇인가? 한 물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차별없는 참사람의 경지를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알라, 그것을 깨달아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 한물건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 한물건으로 존재할 뿐이다, 라는 그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방장스님이나 조실스님이 그 이야기를 하는가? 그 이야기는 숨겨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보았느냐, 들었느냐’ 그렇게 할 뿐이다.
유마경에서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생의 생사’라는 소단락을 살펴보겠다.
9. 중생의 생사
사리불(舍利弗)이 문천(問天)하되 여어차몰(汝於此沒)이면 당생하소(當生何所)오 천(天)이 왈불화소생(曰佛化所生)으로 오여피생(吾如彼生)하나이다
사리불이 천녀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에서 죽으면 마땅히 어느 곳에 태어납니까?”
천녀가 말하였다.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났습니다. 나도 그와 같이 태어납니다.”
부처님의 교화로, 의법출생(依法出生)이다. 법에 의해서 태어났다. ‘부처님의 설법 듣고 태어난 제자’ 법화경에 그런 말이 있다.
오직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우리는 이렇게 존재할 뿐이지 그 외 것은 보지 말라, 그 외 다른 현상들, 세속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마라, 그래가지고는 답이 없다, 그런 표현이다.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났습니다. 나도 그와 같이 태어납니다’
왈불화소생(曰佛化所生)은 비몰생야(非沒生也)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나는 것은 죽거나 태어남이 아닙니다.”
당연하다.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나는 것은 죽거나 태어남이 아니다.
천(天)이 왈중생(曰衆生)도 유연(猶然)하야 비몰생야(非沒生也)니라
천녀가 말하였다.
“중생도 오히려 그러해서 죽거나 태어남이 아닙니다.”
중생의 생사도 역시 그와 똑같다. 중생의 모습도 죽거나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소식이다.
한물건의 입장, 참사람의 입장, 참생명의 입장,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말을 듣는 그 실체, 말을 듣는 당체다.
참사람은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너무 확실하게 있다. 역력고명(歷歷孤明)하다. 아주 역력하게 홀로 밝다, 외롭게 밝다, 그래서 고명인데, 역력고명하다.
역력하게 이것 뿐이다.
역력하게 이 세상은, 이 우주에는 오직 이것만이 밝게 존재할 뿐이다. 그런 뜻에서 역력고명 이렇게 말한다. 외로울 고(孤)자 밝을 명(明)자다.
이 한 물건에 대한 표현으로는 아주 잘 표현됐다고 할 수가 있겠다.
중생의 생사라고 하는 것은 이 짧은 한단락으로써 명확하게 이렇게 밝혔다.
‘죽으면 어디 가서 태어나느냐?’ 하니까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디서 가고 오고 태어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불법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 무슨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런 뜻이다.
다음으로 ‘보리의 무소득’이라고 하는 소단락으로 살펴보겠다.
10. 보리의 무소득(無所得)
사리불(舍利弗)이 문천(問天)하되 여구여(汝久如)에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
사리불이 천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얼마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까?”
보리(菩提)라고 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각(無上正覺)이다.
천(天)이 왈여사리불(曰如舍利弗)이 환위범부(還爲凡夫)라사 아내득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我乃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천녀가 말하였다.
“만약 사리불이 다시 범부가 되어야 내가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엉뚱한 대답 같은데 아주 명확하다.
‘가령 사리불이 다시 범부가 되어야 내가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이 언아작범부(言我作凡夫)는 무유시처(無有是處)니라 천(天)이 왈아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曰我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도 역무시처(亦無是處)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보리(菩提)는 무주처(無住處)일새 시고(是故)로 무유득자(無有得者)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내가 범부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녀가 말하였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어디 머물러 있어야, 그 실체가 있어야, 얻고 잃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의 실체가 없는데, 머무는 곳이 없는데 얻는다느니 잃어버린다느니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논리다.
사리불(舍利弗)이 언금제불(言今諸佛)이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 이득당득(已得當得)도 여항하사(如恒河沙)는 개위하호(皆謂何乎)아
사리불이 말하였다.
“지금 모든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이미 얻었으며 앞으로 얻을 것도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다는 것은 다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지금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며, 미래부처님은 얻을 것이며, 과거 부처님은 얻었다’ 그렇게 삼세 모든 부처님이 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인데 ‘그것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다는 것은 다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이것을 물었다.
천(天)이 왈개이세속문자수고(曰皆以世俗文字數故)로 설유삼세(說有三世)언정 비위보리(非謂菩提)가 유거래금(有去來今)이니다
천녀가 말하였다.
“모두가 세속의 문자인 숫자를 사용하여 삼세가 있음을 말한 것뿐입니다. 보리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세속의 문자인 숫자를 사용하여 과거 현재 미래가 있음을 말했을 뿐이다. 깨달음 그 자체는 그것이 본래 없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는 경지다. 시간을 초월한 경지다.
만약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시간에 제약되어 있거나, 공간에 제약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그런 아주 높은 의미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다.
천(天)이 왈사리불(曰舍利弗)이여 여득아라한도야(汝得阿羅漢道耶)아 왈무소득고이득(曰無所得故而得)이니라
또 천녀가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얻을 바가 없으므로 얻었습니다.”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이다.
아라한이 제일 높은 단계다.
지금 그것을 두고 이야기 하는데 ‘사리불이여, 그대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습니까?’라고 하니까 사리불이 ‘얻을 바가 없으므로 얻었습니다’ 얻었다 하더라도 얻은 흔적이 없다는 뜻이다.
천(天)이 왈제불보살(曰諸佛菩薩)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무소득고이득(無所得故而得)이니라
천녀가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얻을 바가 없는 까닭에 얻었습니다.”
화엄경을 이야기 할 때, 화엄경에서는 52위의 지위점차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이나 보살의 경지나 부처님의 경지 그것이 또한 똑같다. 함께 싸잡아서 이해해도 좋다.
사리불이 말하기를 ‘아라한의 도를 얻을 바 없으므로 얻었다’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 해도 얻은 바가 없다, 얻은 바 없이 얻었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보살의 경지도 얻을 바 없이 얻었고, 얻었으되 얻은 바가 없다.
부처의 경지도,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라고 하는 흔적이나 무엇이 실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얻었다. 그러면서 또한 얻은 것이 있다.
얻은 것이 없으므로 얻었고, 얻은 것이 없이 얻었다. 얻은 것이란 얻었다고 하지만 또 얻은 것이 없다.
그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말로 표현하자니 ‘부처다, 보살이다, 수다원이다 사다함이다 아나함이다 아라한이다’ 이렇게 말하지 사실에 있어서는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다.
차별없는 참사람이 있을 뿐이다.
차별이 없다는 그 속에는 6도도 다 들어가겠고, 52위점차도 들어가겠고, 여기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도 들어가겠고,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것도 그 속에 들어간다. 그런 차별이 없다. 차별없는 참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내용이다.
이시(爾時)에 유마힐(維摩詰)이 어사리불(語舍利弗)하되 시천녀(是天女)는 이증공양구십이억제불(已曾供養九十二億諸佛)하며 이능유희보살신통(已能遊戲菩薩神通)하며 소원(所願)이 구족(具足)하고 득무생인(得無生忍)하야 주불퇴전(住不退轉)이언마는 이본원고(以本願故)로 수의능현(隨意能現)하야 교화중생(敎化衆生)하나니라
그때에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이 천녀는 이미 일찍이 92억 부처님에게 공양하였으며, 이미 능히 보살의 신통에 노닐며, 원하는 바가 구족하고, 생멸이 없는 진리를 얻어서 물러서지 않는 경지에 머물지만 본래의 서원 때문에 마음대로 능히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유마힐이 천녀의 실체를 이렇게 밝혔다. 둘이서 티격태격하고 있으니까 그런 표현이 좀 죄송스럽지만, 아무튼 천녀와 사리불이 상당한 시간을 고준한 대화를 주고 받았는데, 결국 사리불이 천녀의 실체를 모르는 것 같고 그래서 유마힐이 결국은 사리불에게 천녀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다시 읽어보면
이 천녀는 이미 일찍이 92억 부처님에게 공양하였으며, 이미 능히 보살의 신통에 노닐며, 원하는 바가 구족하고, 생멸이 없는 진리를 얻어서 물러서지 않는 경지에 머물지만 본래의 서원 때문에 마음대로 능히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서원이 무엇인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내가 무슨 방편이라도 써서 중생을 교화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서원이다.
결국은 보살이다.
유마힐도 보살이고 천녀도 보살이고 대승불교는 보살대승불교라고 이야기를 한다.
보살의 정신은 중생을 구호하는 데 있고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는데 뜻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나툴 수가 있다.
92억 부처님에게 공양을 했다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수행을 쌓았겠는가?
92억이다.
92억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런 과거가 있는 천녀, 아리따운 천녀가 유마거사를 시봉하고 있다. 근사하다.
92억 부처님을 92억이나 되는 부처님께 공양한 오랜 세월동안 수행한 천녀가 유마거사를 시봉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없어도 유마거사 대신에 사리불 같은 사람들과 아주 고준한 대화를 하고, 대화하면서 밀리는 것은 조금도 없고, 전부 다 가르치고 깨우쳐 주고, 사리불 같은 소승불교의 인사는 충분히 깨우쳐 주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이 유마경은 하나의 극으로 해도 멋진 극이 되고 영화로 해도 아주 멋진 영화가 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 유마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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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계시는가 살펴보겠다.
모두들 동참하셔서 유마경 법석이 내용이 아주 수준 높고 대단하다. 이런 고준한 법문을 우리가 유튜브 TV라고 하는 이런 매체를 통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좋은 시간을 갖게 됐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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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더 밝아지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굴러가서
미망에 허덕이는 중생들
하루빨리 지혜의 눈을 활짝 뜨기를
발원하는 바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戒香ㆍ定香ㆍ慧香ㆍ解脫香ㆍ解脫知見香!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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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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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다방광불 화엄경
나무 대방광불 화엄경
나무 대방광불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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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정된 법은 없다. 男女老少 그별은 쓰잘데기없는 희론에 불과하다.
부처님의 교화로 태어났다. 生死를 거론할 것이 못된다.
깨달음은 얻을 바 없이 얻는 것이므로 시간에 제약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복습하면서 다시 익힙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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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참사람...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