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괘진을 깨면 한중으로 돌아가 영원히 나오지 않겠다고 제갈량이 호언
장담한 만큼 사마의는 진법 대결에서 철저하게 박살이 납니다. 나는 이
전투에 제법 큰 의의를 두고 싶어요. 제갈량의 북벌은 결과적으로는 실패
하고, 나아가 강유로 이어지는 '북벌'이라는 것 자체도 필경에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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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여건, 또 반대로는 사마의
내지는 위나라에서 잘 막아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 대결만큼은 그런 것
들을 모두 들어낸 순수한 의미에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일대일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포한 위군 장수 셋을 발가벗겨 얼굴에 먹칠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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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보내는데, 여기서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세 장수는 '대릉', '장호',
'악침'입니다. 모욕을 느낀 사마의는 전면전을 펼치는데 여기서도 대패합니다.
결국 이 전투는 사마의가 자신마저 통제하지 못하여 철저하게 제갈량에게
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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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승기를 잡았음에도 제갈량은 소극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이는
군량이 바닥난 까닭입니다. 구안이라 하는 군량담당자가 게으른 탓에 군량
보급이 보름이나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위 이미지의 구안의 얼굴이
깽판인 이유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 강유에게 얻어터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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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대로라면 참수해야하나, 구안은 다름 아닌 촉의 중신인 이엄의 조카인
까닭에 곤장 80대로 그 벌을 그쳤습니다. 구안은 성도로 복귀 중에 사마의
에게 잡혀 거짓밀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엄이 자신의 아들 이풍을 후려
갈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도로 복귀한 구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이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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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거지'하다가 거짓밀서(제갈량과 사마의가
어뷰징을 진행한다는 내용)를 보자 반응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갈량이 그럴 리가 없다, 승상이 무너지면 사직이 위태롭다'며 말린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이풍인데, 이때 이엄은 '무에 걱정이냐, 내가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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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보다 못할 것이 무어냐'고 답한다. 결국 제갈량은, 그가 북벌 중 가장
염두에 두고 있던 '동오의 개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복귀 되고, 죄를 물어야
할 유선이 쭈뼛쭈뼛 대자 이엄이 닦달 합니다. 이에 보다 못한 이풍이 끼어
들어 제갈량을 두둔하다가 쳐 맞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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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풍은 이때뿐만 아니라 제갈량이 복귀할 때에도 서한으로 미리 언질을 하는
등 적극 제갈량을 도와줍니다. 제갈량과 이별주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이엄이
‘이별주인가?'하고 묻자 제갈량은 '우정 주'라고 답해요. 이엄은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가고 이엄이 맡고 있던 직위는 그의 아들 이풍에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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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데, 이는 제갈량이 인재등용에 있어 깨끗한
모습을 보여준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엄은 유비의 입 촉 전부터
인망도 높고 나름대로의 능력도 갖춘 인재였습니다. 큰 언급이 없었지만,
드라마에서는 백제성에서 유비가 유언을 남길 때에도 곁에 남아 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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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깁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실 제갈량과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사이였고,
또 그것은 드라마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사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엄은 분명히
제갈량을 시기했고, 한창 승승장구하던 북벌을 망쳐놨으니 촉한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역적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이엄이 마냥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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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기가 어려워지더라. 흔한 패턴인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저마다 달랐다
'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고… 아무튼 간에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막연히
이엄을 나쁜 놈이라고만 몰아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서 생각하는 것이 바뀌어 그런가?
2022.12.16.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