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신 이 본당은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華城郡 峰潭面 旺林里)에 있는 유서깊은 성당이다. 속칭 ‘갓등이’로 알려진 이곳은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전후하여 복음이 전해졌으며, ≪치명일기≫에 수록된 최 야고보와 한 안드레아 등 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수원에서 충청도로 가는 좋은 산길에 위치한 왕림리는 박해시대에 전교여행을 다니는 선교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아니라 교우들이 사는 곳이기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공소에 은신하고 있었다.
서울의 주교 · 신부들이 돌보던 이 갓등이공소는 1885년경부터 서울의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혼자 맡아보다가, 1888년 7월 앙드레(J. Andre, 安學古)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한수(漢水)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이듬해에 앙드레 신부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성당을 지었다. 관할지역은 수원군(현 화성군), 용인군, 안성군, 평택군 등 네 군에 공소는 24개, 신자총수 1,790명에 달하였다. 1889년 6월 앙드레 신부는 ‘덕곡(德谷) 김익제(金益濟) 사건’으로 고발당하여 서울 주교관에 소환되었다가 돌아와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대 본당신부로는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부임하였다. 교세의 확장으로 1895년에는 미리내본당을 분할하고, 1901년에는 33간의 웅장한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 뒤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뒷날 광성초등학교(光星初等學校)로 발전하였다. 3대 본당신부인 르 각(C. Le Gac, 郭元良) 신부는 3년간 열심히 전교하다가 1914년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 초대 앙드레 신부와 같이 왕림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행주본당에서 왕림본당까지 겸임하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17년에 주임으로 부임하여 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 69개 공소에 신자는 2,700여명으로 늘었다. 3.1운동 때는 본당관내의 신자인 이순모(李淳模, 가브리엘) 등 6명이 우정면(雨汀面) 여술(현 화수리) 주재소 방화 및 순사(巡使) 타살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0년 봉담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였다가 몇 달만에 6.25로 폐교되고, 1957년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재임시에 발안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1962년 임세빈(林世彬, 요셉) 신부 재임시에는 남양본당을 분할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수원교구로 편입되고, 1971년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재임시에 연와조의 현대식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부임한 본당신부들은 모두 상수도, 전기시설, 양돈, 양계, 약초재배 등 갖가지 사업을 시도하여 지역사회 개발과 본당 및 학교운영의 자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현재 최재필(崔在弼, 안드레아)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는 이 본당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들이 파견되어 있고, 신자총수 1,495명, 공소는 3개소를 관할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