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을 보겠습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3 사도들을 붙잡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다음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3장에서 시작된 설교로 베드로가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믿고 새 신자가 된 사람이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딸린 식구를 포함하면 만 명이 훨씬 넘었겠네요.
제가 대광고등학교 교목으로 일하다 나왔던 2004년도에 대광고등학교 전체 학생 수가 15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만 명 정도면 7개 고등학교 학생 수를 전부 합한 정도의 인원이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모두 회개하고 새 신자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본문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는 현대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는 것이 현대신학의 기본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베드로의 설교로 예루살렘에서 이런 소동이 일어나자 유대지도자들이 다시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장본인들인데 이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발 뻗고 자다가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까요. 베드로는 이들을 상대로 3장에서 하다가 막혔던 설교를 이어서 하는데, 오늘날 보수적인 교회가 애지중지하는 고백을 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소위 보수정통 기독교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라고 주장하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한 본문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한 본문의 베드로, 즉 베드로의 입을 빌어 이 고백을 하고 있는 누가는 불교나 유교, 도교 같은 동양의 고등종교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전에, 엘리자베드 테일러나 오드리 헵번 같은 세기적 미인을 볼 수 없었던 시골 외딴마을의 순진한 청년이, 자기 고을에서 제일 예쁜 순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그보다 더 예쁜 여자는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의 말은 진실일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확인한 사실이니 틀림이 없다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체험한 주관적 진실이 객관적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유대지도자들은 언변으로 베드로를 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설교를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4장 종반부에는 2장 종반부에 기록된 신자들의 공동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동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반복해서 기록했을 것인데, 5장으로 이어지는 본문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